6월은 호국 보훈의 달 1

종군기자들은 이러한 격전을 지켜보며 983고지 일대를 이름하여 "피의 능선"이라 보도하였다. 때문에 이러한 보도 이후 그곳을 피의 능선이라 부르게 되었다.

6월은 호국 보훈의 달 1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 , 피의 능선 전투 전적비

피의 능선은 양구 북방 15㎞ 지점에 있는 983-940 두 고지를 동서로 연결하는 능선으로 5㎞ 정도 뻗어 있다. 피의 능선 북쪽에 길게 남북으로 뻗어 있는 능선 중 894고지-931고지-851고지를 연결하는 5㎞ 정도를 단장의 능선이라 한다. 피의능선 전투는 주저항선 전방의 전초진지 확보를 위해 국군과 유엔군이 제한된 공격작전을 실시하고 있을 때, 양구 북방의 피의능선을 미 제2사단과 국군 제5사단 제36연대가 북한군 2개 사단인 제12사단과 제27사단을 격퇴한 전투이다. 낙동강 방어선을 제외하고 전쟁 기간 중 최다 사상자를 낸 전투이다.

1951년 8월~10월까지 이 두 개의 이름 없는 능선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낙동강 방어 기간을 제외하고 미군은 이 전투에서 6·25 전쟁 기간 중의 혈전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처럼 많은 손실이 좁은 지역에서 발생하였다는 것은 이 전투가 얼마나 격렬하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전투는 휴전회담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공산군 측은 1951년 봄에 실시한 중공군의 춘계공세가 실패로 끝난 것을 계기로 6월 23일 유엔 주재 소련 대표 말리크를 통하여 군사력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휴전회담을 제의하였다. 유엔군도 이에 동의하여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7월 10일부터 개시되었다. 이에 따라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은 대규모 군사작전을 자제하고, 진지 강화, 전투력 증강을 하면서 휴전회담의 진행을 지켜보고 있었다.


                                                               양구피의능선전투전적비 

휴전회담에선 군사분계선 문제가 첨예한 화두로 떠올랐다. 유엔군 측은 현 접촉선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공산군 측은 38도선을 주장하며 맞섰다. 이런 와중에 공산군 측은 보급수송차량이 유엔군 측 항공기로부터 피격받았다며 7월 21일 일방적으로 회담을 연기시켰다. 공산군 측을 회담장으로 복귀시키기 위해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장은 제한된 공격작전을 미 제8군에게 수행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리하여 미 제2사단 제38연대에 의하여 펀치볼(해안분지)을 장악하기 위한 공격이 개시되어 대우산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집중호우와 장마가 때마침 닥쳐 공격작전이 중단되었다. 장마가 그치고 8월 중순 휴전회담은 재개되었으나 진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에 장마로 인해 중단된 공격작전을 밴플리트미 제8군 사령관이 다시 재개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의 전선은 미 제10군단 지역이 남으로 쳐져있고 굴곡이 많았기 때문에 이러한 전선을 정리하는 데 역점을 둔 작전계획이 마련되었다. 1951년 8월 18일부터 유엔군의 하계 공세작전이 실시되었다. 전선을 약간 북상시키기 위해 캔자스선(임진강-영평-화천-양구-속초를 잇는 선) 북방 10~20㎞ 사이에 있는 934고지-983고지-가칠봉 선을 확보하는 한편, J능선이라 불리는 1031고지-924고지-884고지로 이어지는 능선을 점령하여 남강 이남지역을 확보하는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미 제10군단과 한국 제1군단이 담당하였다. J능선에 대한 공격은 미 제10군단 소속의 한국 제8사단과 한국 제1군단의 수도사단 및 제11사단이, 934고지와 983고지의 공격은 미 제10군단의 한국 제7사단과 미 제2사단이 실시하였다.


                                                            양구 피의능선 전투 전적비 


                                                                                피의 능선 전투


                              피의능선 고지에서 미제8군이 예하 제780 야전포병대대의 ‘B'포병중대가 중공군 기지에 유탄포를 발사하는 모습

                             (출처=국사편찬위 원회 전자사료관)


                                                      피의능선" 940고지에서 미8군 예하 제780 야전포병대대의 "B" 포병중대가 유탄포 공격

                                                      (출처=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일련의 작전 중 983고지 공격의 선봉은 미 제10군단의 중앙사단인 미 제2사단의 한국 제5사단 제36연대가 담당하였다. 미 제2사단에 배속된 한국 제36연대는 983고지-940고지로 이어지는 능선을 제10군 포병과 미 제2사단 포병의 화력 지원을 받으면서 공격하였으나 북한군의 대인지뢰, 강력한 화력 그리고 유개진지로 인해 공격 5일만에 많은 인명 피해를 내고 983고지 일대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과도한 손실로 인해 전투력이 약화되어 북한군의 강력한 역습을 저지하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미 제2사단에서는 미 제9연대를 983고지에 투입하였으나 몇 차례의 공격이 모두 실패하였다.

이러한 전황을 바라보던 바이어스 미 제10군단장은 북한군의 방어력 분산을 위해 피의 능선을 동시에 군단 전 정면에서 공격하기로 계획하였다. 미 제9연대는 험준한 지형과 130㎜가 넘게 쏟아진 폭우를 무릅쓰고 연일 공격하였으나 983고지와 940고지에서 완강하게 저항하는 북한군을 격퇴시키지 못했다. 상황 타개를 위해 미 제2사단장은 피의 능선 동측방을 제38연대로 공격하였다. 동시에 공격을 동·남의 양면에서 받게 된 북한군은 9월 5일 퇴로가 차단당할 위기에 빠지자 피의 능선을 포기하였다. 그리고 피의 능선 북쪽에 있는 단장의 능선으로 철수하였다. 이 전투에서 국군 및 유엔군은 2,700여 명의 인명 손실을 입고 간신히 피의 능선을 점령하였고, 북한군은 15,000 여명의 피해를 내고 이 고지에서 물러났다.

종군기자들은 이러한 격전을 지켜보며 983고지 일대를 이름하여 "피의 능선"이라 보도하였다. 때문에 이러한 보도 이후 그곳을 피의 능선이라 부르게 되었다.   참조, 양구 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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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