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만에 찾은 무공훈장 - 故 백천수 육군대령의 비화
칠성은

반세기만에 찾은 무공훈장 - 故 백천수 육군대령의 비화

칠성 0 18,391 2007.12.11 14:41
2006년 10월 2일 해운대 장산 제53사단 연병장에서는 이미 고인이 된 故 白千壽(호적상 白榮壽 : 1917-1979년) 육군대령에게 사후 27년만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여하는 충무무공훈장·화랑무공훈장을 추서하는 훈장수여식이 거행되었다.

6·25전쟁에서 무공을 세운 수훈자에게 뒤늦게 무공훈장을 추서되는 일은 그동안 언론매체에서도 가끔 소개된 사례는 있었다. 그러나 새삼 필자가 본 지면에 故 백천수 대령의 경우를 소개하고자 하는 데에는 남다른 비화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인에게 사후 무공훈장을 수여하게 된 것은 1977년부터 정부가 ‘무공훈장 찾아주기 운동’을 전개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7만여개의 훈장이 주인을 찾지 못하고 死藏되고 있는 실정이라 매년 각 지방 향토사단에서는 정부를 대신해서 무공훈장 수여식을 거행해 오고 있다.

그러나 6·25사변으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증빙자료를 찾아 무공훈장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며, 더구나 당사자가 사망했을 경우에 그 유가족이 증빙을 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6·25전쟁 중에는 훈장수여자도 많이 나왔고, 전시라 훈장을 만들 시간도 촉박해서 무공자에게는 명암판 크기의 ‘훈장수여증서’를 대신 수여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지도 반세기가 넘어 당시 훈장증서를 아직도 보관하고 있기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라 주인을 찾지 못한 훈장이 7만여개나 남아있게 된 것이다.

2006년 1월 14일 필자는 월간 『시민시대』 서세욱 편집주간으로부터 중앙동 목로주존부산포」로 나와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장시간 환담을 마칠 즈음 그는 동아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백성도 교수를 소개하면서, 백교수의 부친은 육사2기 출신이라고 소개하는 것이었다.

육사 2기생 출신이라면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박정희 대통령이다. 뿐만 아니라 육사 2기생들은 6·25사변 개전초기에는 전투일선 대대장으로, 1953년 휴전직전에는 연대장급 일선지휘관을 역임하면서 많은 전투영웅을 배출한 기수이기도 하여 웬만한 이름은 필자도 기억하고 있다. 그리하여 백교수에게 부친의 성함을 물으니 ‘백천수’로 육군대령으로 예편하였고, 작고한지도 27년이 지났다는 것이었다. 백천수? 필자의 기억에는 없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박정희 정권 18년 아래에서 육사 2기생 출신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고위관직으로 등용되었거나 국회의원을 역임했었는데, 백교수의 부친은 초야에 묻혀 지내다가 타계했다는 점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엽관정치에는 무능한 인물이었거나 아니면 군사정권 하에서 군인정신을 지키고자 했던 ‘참군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어느 쪽이었을까?

육사 2기생은 1946년 9월 14일 263명이 입교하여 3개월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12월 14일 195명이 소위로 임관 했는데, 6·25전쟁 중에 전사 34명, 행방불명 4명, 월북 2명(강태무, 표무원)으로 40명이 희생되고 155명이 살아남아 그 중에서 79명이 장군으로 진급했으니, 웬만하면 모두 별을 달 수 있었던 행운의 기수이기도 하다. 그런데 백교수의 부친은 대령으로 예편되었고, 박정희 정권하에서 관직에 출사한 일도 없었으니 그 연유가 무엇이었을까? 궁금했던 것이었다.

다음날 필자는 국방부 전사편찬연구소 장학근 박사(해사 27기)에게 육군장교 군번 10297번 백천수의 장교인사기록부 사본을 요청했다. 한 시간 만에 팩스로 보내온 사본을 검토해보니 백천수는 분명히 육사 2기생 출신으로 1946년 12월 14일 임관하고는 청주주둔 제7연대로 배속된 것을 비롯하여 1959년 3월 31일 부산 구포 소재 육군수송학교 부교장으로 전역할 때까지의 군사경력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발견된 것이었다.

6·25사변 직후인 1950년 말부터 1952년 말까지 약2년 동안의 군사경력이 인사기록부에는 공백으로 남아있다는 점이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백교수에게 물어보니 한동안 군에서 파직된 사실이 있었지만 그 이유는 자신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부친이 1953년 6월 26일 충무무공훈장(훈기번호 12921번), 8월 18일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65010번) 2개를 받은 사실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모친이 아직도 생존해 있으니(1924년생) 모친에게 확인해보고 다시 연락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다음날 온 연락에서 모친도 금시초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백천수 대령이 육사2기 출신으로 태백산 공비토벌작전에서 대대장으로 참전하였고, 6·25사변 개전초기에 수많은 전투에서 대대장급 일선지휘관으로 참전했었는데, 파직이 되었다가 2년여만에 다시 복직되었다면 필시 무슨 곡절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파직사유가 그가 육군대령으로 예편되었지만 초야에 묻히게 된 원인일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했다.

                 
▲ 1950년 6월 27일 현재 강릉 제8사단 철수작전도
필자가 받은 백천수 대령의 인사기록부는 복사에 복사를 거듭하여 팩스로 받은 사본이라 글자라 명확히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잉크로 쓴 필서체는 탈색이 심해서 판독이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원본을 보지 않고서는 읽어 낼 수가 없는 곳이 많았다. 그리하여 필자는 국방부 전사편찬연구소로 찾아가 원본열람을 요청했다. 이곳에 소장되어 있는 것도 육군본부에서 소장하고 있는 원본을 복사한 복사본이었으나 비교적 판독이 가능했다.

이 기록으로 확인한 백천수 대령의 군경력을 살펴보니, 그는 1917년 강원도 삼척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중국으로 가서 안휘성 黃湖중학을 졸업하고 1942년 3개월 과정의 중국 국민당군 육군군관학교를 수료하고, 육군대위로 근무하던 중 해방이 되어 1946년 봄 귀국한 것으로 나타나 있었다. 그가 중국으로 간 것이 망명인지 유랑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백교수 모친의 기억으로는 살기가 어려워 중국으로 흘러들어 갔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백교수 모친이 생시 남편으로부터 단편적으로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그는 1936년경 살길을 찾아 무작정 중국으로 가서 공원에서 노숙을 하고 있던 중 어느 일본인 부인을 만나 그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일본인 부인은 조선인이나 영명한 청년인 그를 측은하게 생각해서 집으로 데리고 갔었고, 그의 남편은 일본군 영관급 장교였다. 남편이 전선으로 출정을 나간 집이라 집안 청소도 하고 부인의 잡일을 도우며 약 보름을 지내자 그녀의 남편이 귀가했다.

부인으로부터 젊은 조선청년을 데리고 있게 된 사연을 들은 남편은 자기 집에는 데리고 있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부인을 야단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 집에서 더 있을 수가 없게 되어 이들 부부의 소개로 다시 보내진 곳이 안휘성 황산부근 어느 중국인 비단장사 집이었다.

이곳에서 조선청년 백천수는 점포를 청소하고 허드레 일도 성심껏 하자 중국인 주인의 신임을 받게 되었고, 제법 시일이 지나자 주인은 그를 중학교도 다닐 수 있게 배려했다. 황호중학은 안휘성 황산 부근에 있는 학교이다. 1941년 7월 중학과정 5년을 졸업하고 25세 청년으로 성장한 그가 계속 중국인 비단가게에서 기거하기가 어려워 선택한 길이 중국 국민당군이 운영하는 단기군관학교였다.

당시 중국 국민당군은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 이후 일본군과 각지에서 전투를 수행하고 있어 초급장교가 대량으로 필요하게 되자 3개월 과정의 단기군관학교를 여러 곳에 설립했다. 조선청년 백영수는 본명을 숨겨 백천수로 개명하고 이 군관학교로 들어갔던 것이다. 아마도 본명이 밝혀지면 고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일본경찰로부터 위해가 생길 것을 우려해서 이름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마땅히 갈 곳도 없고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군관학교로 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1942년 국민당군(장개석군) 장교로 임관되어 대위로 재직하던 중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했다. 일제가 패망하고 종전이 되자 중경 임시정부 김구 주석은 중국 국민당 장개석 총통에게 중국군에 편입되어 있는 조선청년들을 전역시켜 본국으로 데리고 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여 백천수도 자동 전역되어 미군이 제공한 LST편으로 10여년 만에 귀국하게 된 것이다.

1946년 봄 부산항으로 들어 온 그가 갈 수 있는 마땅한 곳은 없었다. 그는 서자 출신이라 고향 삼척으로도 갈 형편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미군정청이 설립한 부산 감천 소재 국군 제5연대(연대장 참위 박병권, 군사영어학교 출신, 1946년 1월 29일 창설)에 사병으로 입대했다. 그러나 중국 국민당군 대위로 근무했던 그가 사병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당시 육군사관학교는 유자격 지원자가 부족해서 가두방송을 다니면서 입교생을 모집할 정도였고, 연대장의 추천서만 있으면 입교되는 시절이었다. 그는 5연대의 추천을 받아 육사 2기생으로 1946년 9월 14일 입교하여 3개월의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12월 14일 육군소위로 임관되어 동기생 12명과 함께 청주 주둔 제7연대(연대장 참위 민기식, 군사영어학교 출신, 1946년 2월 7일 창설)에 배속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중대장으로 근무하면서 영동출신으로 대전 대동여고(현재의 대전여고)를 졸업한 손순애(1924년생)를 만나 1948년 봄 결혼을 하여 가정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로서는 32살의 만혼이었다.

1948년 5월 1일 강릉에서 제10연대(연대장 백남권, 예비역 소장, 군사영어학교 출신)가 창설되게 되자 그는 신설연대 창설요원으로 발탁되어 신혼부인을 데리고 강릉으로 갔다. 당시 10연대는 3개 대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제1대대장 박원근(예비역 중장, 생존), 제2대대장 고백규, 제3대대장 백천수로 모두 육사 2기생 출신이었다.

이들은 강릉 시내 철도관사에서 나란히 함께 살았다. 이곳에서 그는 소령으로 진급도 하고 대대장으로 태백산 공비토벌작전에 투입되었는데, 당시 태백산 공비는 북한에서 정규 게릴라 교육을 받은 강동정치학원 출신들이라 토벌작전은 치열했으며, 이때의 전투상황은 백남권(예비역소장, 군사영어학교 출신) 장군의 회고담(『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 2001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민족문화연구소 편, pp.198-199)에서도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 육군수송학교 부교장 시설의 백천수 대령
태백산 공비토벌작전에서 교대된 대대장 백천수 소령은 보병학교 고등군사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다시 8사단으로 배속되었다. 강릉 제8사단은 1949년 6월 1일 10연대를 주축으로 개편된 사단(사단장 이형근 준장)이었다. 제8사단에서 6·25사변을 만난 백천수 소령은 개전초기 강릉사수작전에 투입되었다가 육군본부의 작전명령에 따라 인민군에게 강릉을 내어주게 되자 전선은 후퇴하여 남쪽으로 내려오게 되었고, 그의 가족(부인과 아들 백성도)도 대구로 피난하게 되었다.

다시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역전되어 그의 부대 제8사단은 북진하여 1950년 11월 평안북도 영변까지 진격하게 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혹한·폭설과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인하여 제7사단, 제8사단이 전멸한 것이다. 육군본부 지휘부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두 사단장을 비롯하여 일선 지휘관인 연대장, 대대장 모두를 파면시킨 것이다. 대대장 백천수 소령도 파직되어 철수하는 국군을 따라 남으로 내려와 가족이 피난살이를 하는 부산에서 칩거하였다.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사단이 전멸하여 사단장을 포함한 일선 지휘관들이 모두 파면되었으나 제7사단, 제8사단 두 사단장은 파면 3개월만에 복직된 것이다. 이어서 연대장, 대대장이 복직되었으나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부산에 칩거하고 있던 백천수 소령은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황금 같은 전시기간 2년여를 허송세월로 지내게 된 것이다. 그 책임은 사단장에게도 있다. 전투사단의 붕괴로 인하여 지휘관 책임을 물어 파직될 수는 있으나 1차 책임의 당사자인 사단장에게 복직이 허용 되었으면 그의 부하에게도 기회는 균등하게 주어져야 했으며, 사단장은 자기 부하들의 복직도 챙겨야 했었는데도 이를 등한시 한 것이다.

뒤늦게 동료들의 복직사실을 알게 된 백천수 소령은 육본당국에 소청하여 1952년 말에야 복직이 결정되어 제3사단(사단장 임선하 준장, 예비역 소장, 군사영어하교 출신)에 배속되었다. 그동안 그의 동기생들은 준장으로 진급한 동기생은 부사단장급, 대령으로 진급한 동기생은 연대장으로 활약하고 있었으나 2년여 전시를 후방에서 허송세월한 백천수는 여전히 소령계급이었다.

1953년 4월말 그가 배속된 제3사단은 중부전선 북한강전투에 투입되었다. 판문점에서는 휴전회담으로 어수선한 시절이었다. 북한강 관망산을 중심으로 연일 중공군과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고 있었다. 529고지는 6차례나 주인이 바뀌는 치열한 전투였다. 이곳이 무너지면 32키로를 후퇴해야 하고 화천댐과 철원평야를 중공군에게 내어주어야 할 형국이었다.

                 
▲ 고 백천수 대령의 무공훈장
제3사단장 임선하 장군은 제22연대를 투입했으나 연대가 전멸하자 대체 투입된 부대가 제23연대로, 백천수 소령은 대대장이었다. 이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당시 사병으로 참전했던 李善永(75세, 현재 철원 거주)씨의 증언으로도 짐작할 수가 있다. 그의 중대는 중대원 172명이 투입되어 46명만이 살아남았다고 증언했다. 중대원 73%가 희생된 지옥 같은 전투였던 것이다.

따라서 백천수 소령이 지휘했던 대대는 600여명이 고지에 투입되어 400여명이 희생되는 피해를 보고 고지는 탈환 되었다. 이 전투의 공로로 대대장 백천수 소령에게는 충무무공훈장이 상신되었고, 이어서 제8사단 부대표창으로 화랑무공훈장이 추가되었다. 두 훈장으로 그는 1953년 9월 1일 중령으로 진급했다. 그러나 그가 갈 보직은 마땅치 않았다.

많은 동기생들이 장군으로 진급하였고, 육사 후배들이 대령급 연대장으로 있는 전투병과에서 기수는 높으나 계급이 낮은 그와 함께 있자는 전투지휘관은 없었다. 그는 제5군단장 보좌관으로 지내다가 전투병과 보병에서 전과를 결심했다. 더구나 제3사단 23연대 대대장으로 1953년 4월말 북한강전투에서 수많은 젊은 부하들을 잃은 망령이 그를 괴롭혔다.

마침 동기생이자 육군본부 수송감을 역임하고 있던 박형훈 장군이 수송병과에서 함께 일하자고 제의했다. 그는 전과를 신청하여 육군본부 수송감실 통제과장, 제6군단사령부·제2군단사령부 수송부장을 거치면서 1955년 9월 1일 임시대령으로 진급하였다. 그러나 수송병과에서도 육사 기수가 높은 그가 갈 보직은 여전히 마땅치 않았다. 그러던 차에 구포 소재 육군수송학교 교장인 육사 3기생 김현옥 대령(전 부산시장·서울특별시장 역임)이 함께 있자고 해서 그는 1956년 3월 5일 부교장으로 부임했다.

김현옥과는 1946년 봄 부산 감천 국군 제5연대에서 사병으로 함께 지냈던 사이였고, 기수 차이도 크게 나지 않았으며, 그래서 성격이 원만한 김현옥 대령과 함께 지내게 된 것이다. 이곳에서 그는 1957년 9월 1일자 대령으로 진급했다가 육군대학 단기교육과정을 거쳐 1959년 3월 31일자 예편을 신청했다.

그가 대령진급 2년만에 예편신청을 한 사유는 알 수가 없으나 생활방편의 준비도 없이 예편한 것을 보면 중국군 출신이라는 편견과 동기생들의 승승장구에 비해서 초라한 자신을 자책하여 군을 떠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당시는 퇴직금도 없고 연금도 없었다. 부대 장교들이 십시일반 걷어 준 전별금 1만원이 전부였다. 이미 백천수 대령에게는 자녀가 4명이나 생겼고, 군생활만을 해온 그에게 특별한 재능이나 생활방편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 고 백천수 대령의 국가유공자증서
그는 생전에 가족들에게 자신은 ‘실패한 군인’이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다고 한다. 수많은 젊은 부하들을 희생시켜 받은 무공훈장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자책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부인에게조차 자신이 무공훈장을 받은 사실을 발설하지 않았던 점으로 충분히 추정이 가능하다. 그리하여 그의 무공훈장은 53년간 잊혀져 있다가 이번에 필자의 발굴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백천수 대령은 1946년 육사 2기생으로 입교할 당시 30세로 노장 축에 속하며 박정희와는 동갑생(1917년생)이었다. 1960년 박정희 소장이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근무하고 있을 당시 그는 부산에서 거주하는 유일한 동기생이자 예편하여 어렵게 지내는 백천수를 찾아왔다.

“백형! 우리 모친도 수원 백씨인데 ....” 하면서 연민의 정을 보이며 함께 간 아들 성도에게 500환짜리 동전 하나를 주면서 “과자나 사먹어라” 하면서 주었다.

또 그가 부산에서 작고하기 얼마 전인 1978년 동기생이자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가 위로금 100만원을 들고 와 어려운 살림에 보태라 하면서 부산 시내 구청장직이라도 하라고 권했으나 그는 응하지 않았다. 아마도 박정희 대통령이 시킨 일이겠으나 정치군인이 득세하고 있는 세상에 등을 돌렸던 군인이 바로 백천수 대령인 것이다.

그는 동기생이자 대통령이 된 박정희를 늘 가슴 속으로 존경했으나 찾아가지는 않았다. 어느 날 그는 1946년 가을 태릉 육사에서 교육받을 당시의 박정희 생도를 회상했다.

교관 이치업(예비역준장, 군사영어학교 출신)과 장창국(예비역대장, 군사영어학교 출신)이 고구마를 삶아 몇 통을 가지고 와 훈련 중인 생도들에게 내놓았다. 허기에 지친 생도들이 먼저 먹겠다고 아수라장이 된 광경을 뒤에서 묵묵히 보고 있던 박정희 생도는 다 먹고 떠난 뒤 통에 붙어 있는 나머지를 빡빡 긁어 모아 혼자 먹는 광경을 잊을 수 없다고 하면서 “일본육사 출신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고 회상했었다. 한계상황에서도 자신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부산 자택에서 2년여 투병생활을 했던 백천수 대령은 자신이 죽으면 화장을 해서 유골은 태종대 앞바다에 뿌려달라고 유언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군생활 사진을 비롯하여 흔적이 될만한 것은 몽땅 없애고 1979년 1월 16일 이승을 하직하였다. 자신은 ‘실패한 군인’으로 늘 생각하고 있던 고인은 자신의 자취를 남김없이 치우고 떠난 것이다.

그러니 사후 27년만에 받는 무공훈장에 본인은 큰 의미를 두지는 않을 것이라는 노파심이 없는 것도 아니다. 무공훈장 수여자에게 주어지는 특전 중에서 가장 큰 혜택이 국립묘지 안장이다. 고인을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것은 그의 명예를 사후라도 국가가 인정하는 것이라 미룰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예편 이후 불우하고 말년을 보낸 그의 ‘참군인 정신’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도 필요한 작업이었다.

필자는 장남 백성도 교수와 상의하고 육군본부에 53년 전에 부친이 받은 충무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을 찾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무공훈장 추서를 추진하면서 문제는 여기에서도 발생했다. 육군본부에 무공훈장 추서를 신청하는데 필요한 자료는 필자가 발굴한 장교인사기록부 사본 이외에는 징빙이 될만 한 자료가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수소문 하니 대전에 살고 있는 고인의 처남이 명암판 크기의 흑백 독사진 한 장이 있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이 사진에는 군번 10297번에 기재되어 있어 이를 확대하여 첨부하고 육사2기생 앨범을 복사해서 신청서를 만들었다. 신청자는 부인 손순애 여사 명의로 하기로 했다. 혹시 고인과 같이 사후에 무공훈장을 추서받기 위해서 노심초사할 무공자나 그 유가족을 위해서 신청서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수  신 : 육군참모총장 2006. 2. 20.
◇ 참  조 : 육군본부 인사처리과장
◇ 제  목 : 무공훈장 수여 신청

1. 진충보국에 헌신하시는 육군참모총장님과 장병들의 노고에 먼저 심심한 경의를 표합니다.

2. 저희 남편 白千壽(本名 白榮壽 : 1917년 6월 22일~1979년 1월 16일)는 1946년 12월 14일 육군사관학교 2기생으로 수료하시어 장교군번 10297번을 받고 1947년초 청주 주둔 제7연대에서 초급장교를 시작으로 창군에 참여하셨습니다.

3. 6·25동란 때에는 보병사단 대대장(계급 소령)으로 여러 전투에 참전하셨고, 각종 육군보직을 거쳐, 마지막으로는 부산 구포 소재 육군수송학교 부교장으로 재직하다가 1959년 3월 31일 육군대령으로 전역하였으며, 1979년 63세로 부산에서 작고 하셨습니다.

4. 남편은 대대장으로 참전한 전투의 공로로 1953년 6월 25일자 陸一命 제245호로 [충무무공훈장], 1953년 8월 18일자 陸一命 제158호로 [화랑무공훈장]을 받았으나, 나라가 어려운 시절이라 생전에 무공훈장을 수여받지 못하였습니다.

5. 남편은 1959년 3월 31일 육군에서 전역하신 후 실패한 군인으로 [훈기증서]를 비롯한 육군 재직시의 모든 관계자료를 소각하여 유족들도 남편의 무공훈장 수여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6. 1948년 3월 육군중위 白千壽와 결혼하여 4남 1녀를 둔 제가 옛 기억을 더듬고,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도움으로 국방부에서 보관하고 있는 [육군장교 인사기록부]에서 남편의 훈장수여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현재 육군본부에서 [무공훈장 찾아주기 운동]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본 신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7. 현재 83세인 제가 살아있는 동안 국가가 수여하는 무공훈장을 찾아서 남편에게 바쳐 올리는 것이 부부의 연을 맺은 사람으로서 마지막 도리라 여겨 예비역 육군대령 白千壽(본명 白榮壽)의 무공훈장 수여를 신청합니다.

8. 무공훈장을 찾기 위한 근거자료로 미망인인 본인이 소장하고 있는 군번 10297번이 기재된 사진 사본 1장, [육군장교 인사기록부] 사본 1부, 육군사관학교 제2기생 앨범에서 백천수 부분 사본 1부, 부부관계 사실을 입증하는 [호적증본] 사본 1부와 [제적 주민등록등본] 1부를 첨부합니다.

육군대령(예) 白千壽(本名 白榮壽)의 미망인 孫順愛 拜上

◇ 유  첨 :
1) 육군장교 인사기록부 사본 1부
2) 유족 보관 육군대령 백천수(군번 10297번)의 독사진 사본 1장
3) 육군사관학교 제2기생 앨범 사본 1부 (백천수 부분)
4) 부부 사실관계 입증을 위한 호적등본 사본 1부
5) 제적등본 사본 1부 



                 
무공훈장 추서 신청서를 보내고 육군본부 인사기록과와 상훈과로 연락하니 신청자가 많고 사실여부를 조회하는데 시간이 수개월 걸린다는 대답이었다. 신청한지 7월만에 육군본부로부터 백천수 소령은 제3사단에 재직시 무공훈장 2개를 수여받은 사실이 확인되었으니 관할 보훈지청에 국가유공자 등록을 신청하라는 회신공문을 받게 되었다. 무공훈장 수여자에게는 훈장과 함께 사후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는 특혜가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제3조에 명시되어 있다.

그리하여 2006년 10월 2일 해운대 장산 제53사단에서 무공훈장 수여식이 거행되어 장남 백성도 교수가 고인된 부친을 대리하여 받았고, 이어서 10월 11일 대통령으로부터 「국가유공자증서」가 고인에게 추서되었다. 남은 일은 국립묘지로 안장하는 일이다.

                 
▲ 고 백천수 대령의 국립묘지 안장식
무공훈장 수여자가 안장될 수 있는 국립묘지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1955년 7월 15일 조성)과 국립대전현충원(1976년 4월 14일 조성) 두 곳이 있는데,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는 이미 수용한계를 넘어 대전현충원으로 가야 한다. 국립대전현충원은 국가원수묘역, 애국지사묘역, 장군묘역, 장교묘역, 사병묘역, 경찰관묘역과 일반묘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장교나 사병 및 경찰관 묘역에는 전사자, 순직자 및 무공훈장 수여자만이 갈 수 있는 곳이다. 그러니 군인으로서 국립묘지에 안장 된다는 것은 당사자로서도 영예이자 유족에게도 가문의 영광인 것이다.

일반묘역에는 순직한 소방관, 국위를 선양한 자로서 국무회의 의결이 된 사람만이 묻힐 수 있는 성역이다. 올림픽 영웅 손기정 선수, 민관식 전 대한체육회 회장 등이 대전 현충원 일반묘역에 안장 되었으며, 2006년 5월 2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작고한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 이종욱 씨가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일반묘역에 안장된 바가 있다. 따라서 국립대전현충원 장교묘역에 사후 27년만에 안장될 수 있는 고 백천수 대령의 경우는 뒤늦게나마 안장될 수 있으니 고인도 기뻐할 것이다.

국립묘지 안장신청은 인테넷으로 신청하도록 되어 있다. 10월 14일 신청한 국립묘지 안장 신청서는 즉각 승인되어, 영현은 2006년 12월 8일 원불교 부산교당에서 국립대전현충원 현충각에서 옮겨 정중한 안장의식을 거행하고 의장대의 봉송 속에서 장교 제2묘역에 이장되었다.

필자도 현장을 지켜보면서 유족대표인 백성도 교수의 얼굴을 쳐다보니 감격해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부친의 무공훈장 수여사실을 반세가 동안이나 모르고 지내다가 사후 27년만에 국립묘지에서 안장식을 거행했으니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얻은 교훈은 무엇인가? 53년만에 무공훈장을 찾았으나 고인이 이승을 하직한지 27년이 지났고, 세상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떠났지만 고인의 군인정신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소위 말해서 출세한 군인은 아니었다. 더구나 43살에 예편한 이후 20년 동안 사회생활에서도 큰 족적을 남긴 인물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고인을 다시 생각해보는 것은 혼돈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참군인 정신으로 일생을 마쳤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젊은 부하를 희생시켜 받은 무공훈장에 연연하지도 않았고 평생을 ‘실패한 군인’으로 자책하면서 일생을 마친 그에게 누가 실패한 인생이라고 할 것인가!

그는 박정희 군사정권 18년 하에서 마음만 달리 먹었으면 일신의 영달을 꾀할 수 있는 여건을 가지고 있는 위치에 있었으나 초야에서 묻혀 지내다가 조용히 떠난 참군인이었다. 동기생인 박정희 대통령과는 같은 해에 태어나(1917년) 같은 해(1979년)에 이승을 떠났으며, 군에서 파직의 쓰라림도 맛본 두 사람이 오늘의 세태를 보면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지 그것이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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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agsimin.com/news/read.php?idxno=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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