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런 선배 전우 : 김용배 준장
칠성은

자랑스런 선배 전우 : 김용배 준장

칠성관리자 0 12,898 2007.05.01 12:00

● 한문 : 金龍培
● 생몰연대 : 1921. 4. 17. -1951. 7. 2.
● 출신지역 : 경북 문경
● 최종계급 : 육군 준장
● 상훈내용 : 태극무공훈장
● 참고문헌 :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 영웅, 자유민에게 전해다오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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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

*1921. 4 경북문경 출생
*1948. 4 국방경비사관학교 졸업 및 육군참위(소위) 임관
*1949 제 8연대 작전장교
*1949. 7 제 6사단 7연대 1대대장
*1950. 7 육군중령
*1951 제 6사단 제 19연대 부 연대장
*1951 제 6사단 7연대 부연대장
*1951 제 7사단 5연대장
*1951. 7 전사(양구지구)
*1951. 육군 준장(추서)

1. 생애

1921년 4월 17일 경북 문경군 호서면 남면리에서 출생한 김용배(金龍培) 장군은 문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5세가 되던 1935년에 고향의 농업을 발전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구치(山口) 현립(縣立)농업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가정 형편으로 인해 학비를 조달하지 못한 그는 졸업을 1년 앞두고 학업을 포기한 채 귀국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귀국 후 고향에서 가사를 돌보던 그는 1938년 12월 일제의 의해 지원병으로 일본군에 끌려가 나남(羅南)에 주둔하고 있던 보병 제26연대에서 3년 6개월간 복무하고 귀향하였다. 그러나 패색이 짙어진 일제의 최후 발악적인 제물로 1945년 6월 일본 관동군에 재소집되어 복무하던 중 일제의 패망으로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해방을 맞이한 그는 해방 조국의 간성이 되겠다는 신념으로 국방경비사관학교 제5기생으로 입교하여 6개월간의 교육을 받은 후 1948년 4월 군번 10828의 육군 참위(소위)로 임관하였다. 그는 보병 제8연대에 배속되어 작전장교로서 산악전 연구에 몰두하던 중 1949년 8월 15일 육군 소령으로 진급되어 제6사단 7연대 1대대장으로 부임하였다. 제7연대 1대대장으로 그는 오대산 지역으로 침투하는 북한군 유격대를 소탕하는 공비토벌작전에 참여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제7연대의 예비로 춘천에 주둔하고 있던 중 6.25전쟁을 맞게 되었다.
1950년 7월 4일 충청북도 음성군 동락리에서 제7연대는 북한군 제15사단 예하의 48연대를 기습하여 완전 섬멸하는 대전과를 거두었는데, 이는 개전 이후 국군의 가장 통쾌한 승리로서 북한군의 음성진출을 1주일간 지연시킨 전투였다. 7월 7일 제7연대는 이 전투의 공적으로 개전 이후 최로로 대통령부대표창을 수상하는가 하면 연대 전 장병이 1계급 특진하였으며, 따라서 김용배 소령도 육군 중령으로 승진하였다. 1951년 1월 20일 제6사단 19연대 부연대장으로 보직이 변경된 그는 3월 10일 제7연대 부연대장으로 전보되었으며, 6월 20일에는 육군 대령으로 진급과 함께 제7사단 5연대장으로 영전하였다. 그러나 그는 1951년 7월 2일 강원도 양구군 북면 토평리지구에서 중공군 제5군단 예하의 1개 연대와 고지쟁탈전을 전개하던 중 적의 포탄에 의해 현장에서 전사하였는데, 당시 그의 나이 31세에 불과했다.
용감하고 침착하면서 대범한 지휘관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는 김용배 장군은 6.25전쟁 기간 내내 최전선에서 뛰어난 지휘 통솔력으로 부대를 지휘하여 적을 섬멸하였으며, 정부는 그의 살신보국 정신과 불굴의 투혼을 기리기 위해 육군 대령에서 육군 준장으로 1계급 특진과 함께 1951년 9월 10일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였다. 그의 유해는 현재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장군묘역 1-52에 안장되어 있다.

2. 공적

김용배 육군 준장은 1950년 7월 5일부터 10일까지 제6사단 7연대 1대대장으로 음성전투에 참가하여 발군의 전공을 수립하였다. 동락리전투로 불려지는 이 전투는 한강방어선의 붕괴로 서부전선의 국군 부대들이 평택과 안성으로 집결하고 있을 때, 원주에서 충주로 남하한 제6사단 7연대가 이천-장호원-충주로 이어지는 3번 도로 축선을 따라 남진중인 북한군 제15사단을 저지하기 위해 장호원 방면으로 진출하던 중 음성 북방의 동락리에서 적의 선두부대인 제48연대를 기습, 격퇴하고 남침을 지연시킨 공세적 방어전투이다. 제1대대는 이 전투에서 보현산을 야간에 점령한 후 배후공격을 가하여 패주하는 적 270명을 사살하고 6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45㎜ 대전차포 등 각종 무기를 노획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또한 1951년 7월 12일 제7사단 5연대장으로 양구 토평리지구에서 중공군 제5군단 예하의 1개 연대와 치열한 고지쟁탈전을 전개하면서 작전을 지시하던 중 지근거리에서 작렬한 적의 포탄에 의해 전사, 타의 귀감이 됨으로써 1951년 9월 10일 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 제15호)을 수여받았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계속적으로 남침을 강행하자 국군은 차령산맥을 연한 선에서 이들을 저지하기로 계획하였다. 1950년 7월 4일부터 10일 사이에 제6사단 7연대와 제1사단이 북한군 제15사단과 일전을 벌인 음성지구는 경기도와 충청북도의 도계를 이루는 차령산맥이 중앙부에 형성된 분지로서 지리적으로나 교통상의 요충이었던 까닭에 피아간에 이곳의 선점(先占)이 곧 중부지역 제압의 관건으로 보고 쟁탈의 각축을 벌이게 되었다.
음성 방어를 담당한 국군 제1사단이 도착하기에 앞서 음성 전방에서는 김종오 대령이 지휘하는 제6사단 7연대가 엄호부대로서 북한군 제15사단과 접촉 중이었다.
7월 4일 충주, 장호원 방면으로 남진중인 적 제15사단을 저지하고 장호원을 확보하라는 임무를 받은 제7연대는 이날 밤 제2대대를 선발대로 출발시켰다. 제2대대로부터 동락리 부근의 조우 상황을 보고 받은 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적이 이미 무극리 및 생극에 진출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다음날 아침 1개 대대를 급히 진천으로 투입하여 이천 방면에서 철수하고 있는 제19연대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은 연대장은 제2대대를 진천으로 전환토록 하고 제1대대로 무극리를 그리고 제3대대로 생극을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반면에 북한군 제15사단은 개전 초 제2군단 예비대로 있다가 3일 장호원으로 투입되어 무극리에 제49연대, 생극에 제48연대를 전개하고 제50연대를 예비로 확보하여 음성 돌파를 기도하였다. 그러나 북한군 제15사단은 10,000여 명의 병력과 장갑차 20여 대 등 많은 병력과 각종 장비에도 불구하고 훈련 정도가 낮고 전투경험이 없는 부대였다.
7월 5일 쌍방은 기름고개와 동락리에서 조우하였다. “무극리로 진출하여 남하하는 적을 저지하라”는 임부택 연대장의 명령을 받은 제1대대장 김용배 소령은 06시에 부대를 집결지에서 출발시켰다.
제3중대 3소대장 이상우 중위가 지휘하는 정찰대가 음성 서북쪽 3㎞에 위치한 소여리를 지나 일명 기름고개라 불리는 유현(油峴)으로 접어들 때, 고개를 넘는 일단의 무리를 발견하였다. 정찰대장 이 중위는 정지신호와 함께 차량을 우측 숲속에 은폐시키고 대원들을 도로를 감제할 수 있는 언덕 위로 배치하여 접근하고 있는 무리의 동태를 살피게 하였다. 무리의 선두에는 자전거를 탄 군인과 사복차림을 한 몇 명의 사람이 앞장서고 1개 중대 병력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정찰대가 피아 확인을 위해 망설이는 동안 무리는 100m 거리로 접근하였고, 배낭을 메고 모자를 쓴 모습으로 보아 북한군이 틀림없었다. 500m 후방에 있는 제3중대 본대에 보고하기에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고 판단한 이 중위가 사격명령을 내리자 대원들의 사격이 적에게 집중되었다. 기습을 당한 적은 퇴각을 시도하였으나 제3중대가 발사한 60㎜ 박격포탄으로 인해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어 본대가 가세할 즈음에 적은 40여 구의 시체만을 남기고 도주하였다.
이후 약 3시간이 경과하여 제1대대의 주력이 기름고개의 정상 부근에 이르자 패주한 적의 본대로 보이는 1개 대대 규모의 적이 기름고개 서쪽의 507고지인 보현산 동쪽의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포격을 가하면서 제1대대의 전진을 가로막고 나섰다. 이로 인해 제1대대는 연대에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기름고개 동쪽의 385고지 일대에 포진하여 그들과 대치하였다. 18시경에는 음성 북쪽 4㎞ 지점에 위치한 용산리로 전진한 제2대대와 연계하여 적의 야간 침투에 대비하였다.
7월 6일 날이 밝아오자 교착된 기름고개의 동과 서에서 총격이 한층 가열되었다. 연대장은 04시를 기해 제1대대와 제2대대의 공격을 재개시키고 무극리의 확보를 명하였다. 각 대대는 지난 밤 사이 적이 알지 못하도록 간헐적인 사격을 계속하는 가운데 제1대대가 보현산 북단부의 376고지를, 제2대대는 385고지를 각각 확보하고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04시 약정된 신호에 따라 제1대대와 제2대대 그리고 제2포병중대는 각종 화기의 화력을 보현산으로 집중하였다. 이에 적도 385고지를 향해 각종 화기를 집중하였지만, 아군의 배후사격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기회를 잡은 제1대대장 김용배 소령은 81㎜와 60㎜ 박격포로 계속 제압토록 하고 관측장교로 하여금 105㎜의 포격을 346고지 북향으로 연신시킨 다음 제1중대를 우일선에, 제2중대를 좌일선으로 하여 보현산을 목표로 반격토록 하였다. 그러나 적은 이 고지를 포기하고 346고지 방향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제1대대는 공격을 개시한지 1시간도 못되어 보현산을 점령하고 제2대대와 제2포병중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12시경 무극리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제1대대는 적 연대 규모의 반격을 받고 무극리 남동쪽에 위치한 백야리의 351고지에 진지를 급편하고 방어태세에 돌입하였다. 제1대대는 이 전투에서 적 270명을 사살하고 6명을 포획하였으며, 45㎜ 대전차포 등 각종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제3대대도 조우전에서 적의 압력이 강해지자 철수하여 다음날 가엽산 남쪽 290고지를 점령하였다. 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중앙지역의 방어력 강화를 위해 예비대인 제2대대를 동락리 남쪽 부용산 일대에 투입하고, 제1대대에는 제19연대 2대대를 지원.배치하여 백야리에서 적을 저지토록 하였다.
한편 동락리에 진입한 적 제48연대는 제3대대가 철수한 것으로 판단, 6일 밤부터 이동대형을 취하지 않고 경계대책을 소홀히 하였다. 정찰대로부터 이러한 상황을 보고받은 제3대대장은 부대를 즉각 310고지, 용원리 부근으로 이동시켜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날이 밝을 무렵 정찰활동에 나섰던 제3대대 9중대가 용원리 부근에서 적의 선두를 공격하자 적은 소규모의 국군이 저항하는 것으로 판단, 첨병중대만을 공격에 투입하고 주력은 차량에 탑승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기회를 잡은 제3대대 주력은 적을 측방에서 공격하였다.
이 무렵 동락리 일대에서도 제2대대가 적을 기습공격하고 있었다. 부용산 일대에서 경계를 강화하고 있던 제2대대는 동락리 앞 도로에 병력을 수송하고 있는 적 차량을 관측하고, 일제 약진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방심하고 있던 적은 제2대대와 제3대대의 기습공격을 받고 차량과 장비를 유기한 채 분산.도주하였고, 그들 중 상당수가 아군의 추격을 받고 사살되거나 생포되었다.
동락리전투에서 제7연대는 적 제48연대를 기습공격하여 군수참모를 비롯한 적 132명을 포획하고 각종 포 54문과 차량 75대 등 수많은 장비를 노획하였을 뿐 아니라 열세한 병력과 장비로도 적을 섬멸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제7연대의 전승보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이 전과는 표창만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전사의 귀감으로 기억되야 한다”고 전승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제6사단 7연대가 전개한 동락리전투는 개전이래 패배감에 젖어있던 국군에게 자신감을 안겨 준 가장 통쾌한 전투였으며, 북한군의 음성 진출을 1주일이나 지연시킴으로써 국군이 진천-음성-충주로 이어지는 저지선을 형성,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가져다 준 의미 있는 전투였다. 제7연대는 이 공로로 대통령 부대표창과 연대 전 장병 1계급 특진의 기록을 세웠으며, 김용배 소령도 중령으로 진급하였다.
그 후 제6사단 7연대 1대대는 축차적인 지연전을 전개하면서 음성 부근에서 적의 남하를 10일간 저지하였고, 용기동과 군위-의흥, 신령지구 등에서 적의 공세를 막아냄으로써 총반격의 발판을 마련한 후 조림산지역에서 적을 격퇴하고 단양-충주선을 따라 진격에 나섰다.
10월 6일 38선을 돌파한 제1대대장 김용배 중령은 화천-김화 축선으로 진격, 원산을 점령하고 계속하여 성천-순천-개천-희천으로 북진하였다. 제1대대는 초산 남쪽 6㎞ 지점에서 저항하던 연대 규모의 북한군 혼성병력을 2시간에 걸친 교전끝에 격퇴하고 초산에 돌입하여 10월 25일 14시 15분에 압록강변에 태극기를 꽂았다. 이리하여 그의 부대는 낙동강전선에서 반격을 개시한지 41일만에 한만국경선에 가장 먼저 도달한 최선봉부대의 명예를 안게 되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철수명령을 받은 제1대대는 대부분의 장비를 유기한 채 극적으로 탈출, 개천에서 사단 주력과 합류하였다. 1951년 6월 제7사단 5연대장에 임명된 김용배 대령은 1951년 7월 2일 양구 북면 토평리지구에서 중공군 제5군단 예하의 1개 연대와 치열한 고지쟁탈전을 앞두고 최전선 예하부대를 방문하여 현장지도 중 지근거리에서 작렬한 적의 포탄에 의해 전사하였다.

* 참고문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2003
국방부, 자유민에게 전해다오 제1집, 1955
육군본부, 한국의 전쟁영웅들, 1992
이원복, 호국용사100선, 명성출판사, 1976
국방부, 호국의 별 제3집, 1979
포병학교, 포병의 발자취, 1963
병학사, 내 젊음 조국에, 1987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38도선 초기전투: 중동부전선 편, 1982
국방일보,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2002. 11. 9
국방부, 한국전쟁사 제8집, 1975
공군본부, 공군사 제1집
육탄 10용사 현충회, 육탄 10용사, 도서출판 法政, 1986
국방부, 호국의 별, 제6집, 국방부 정훈국, 1982
국방일보, 한국의 전쟁영웅들 (1) 육탄 10용사, 1992. 6. 4
국방부, 호국전몰용사공훈록 제3집,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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