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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철8811충북 2 1,975 2021.08.13 23:18

독립군·광복군 거쳐 6·25전쟁 지휘…

 조국 위해 군복 입은 한평생

정호영 기사입력 2021. 08. 03   16:50 최종수정 2021. 08. 03   16:52

 
독립군·광복군 출신 국군지휘관 이준식 장군

1919년 독립운동 위해 중국 망명
통의부·정의부서 활약
중국군 장교로 물밑 지원
1939년 임시정부 본격 참여
육사교장으로 한강방어선전투
영덕·강구 일대서 북한군 남하 저지
영덕지구전투 공로로 태극무공훈



육군사관학교 1·2기 생도와 육군7사단 9연대소속 장병 일부는 1950년 6월 29일부터 약 3개월동안 불암산 일대에서 북한군과 유격전을 벌였다.  일명 ‘불암산 호랑이’로 불린 이들 유격대를 기리는 충혼비가 불암산 입구에 세워져 있다.  이헌구 기자

육군사관학교 1·2기 생도와 육군7사단 9연대소속 장병 일부는 1950년 6월 29일부터 약 3개월동안 불암산 일대에서 북한군과 유격전을 벌였다. 일명 ‘불암산 호랑이’로 불린 이들 유격대를 기리는 충혼비가 불암산 입구에 세워져 있다. 이헌구 기자


대한민국 국군은 100년의 전쟁역사를 갖고 있다.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1919년 4월 11일 상해 임시정부에 의해 지어진 뒤 1948년 정식 정부 수립 후에도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 만주 일대의 독립군을 산하로 편입해 일본과 독립전쟁을 벌였다. 100년이 넘는 전쟁역사의 출발점이다. 이에 국방저널(국방일보)은 올해부터 지난 100년간 나라를 위해 앞장서서 싸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전쟁영웅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8월호의 주인공은 독립군과 광복군 출신으로 해방 이후 국군이 돼 6·25전쟁에서 북한군을 물리치는데 혁혁한 전공을 세운 국군 전쟁사의 산증인 이준식 장군이다. 글=정호영/사진=국방일보 DB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애국지사 이준식 장군(1900~1966) 묘역.  양동욱 기자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애국지사 이준식 장군(1900~1966) 묘역. 양동욱 기자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의 일원이 돼 일본과 북한을 상대로 전쟁을 치른 유일한 군인이 김홍일 장군이라는 기사에 대해 많은 분이 문의를 했다. 그중 육군박물관 김재범 학예사가 제기한 이준식 전 육군사관학교장은 확인 결과 독립군과 광복군 출신으로서 6·25전쟁 당시 국군지휘관이었음이 맞았다. 기사가 잘못된 것이었다.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지난 두 달간 이준식 장군에 대해 각종 자료를 뒤졌다.

흔히 독립군이라고 하면 1920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해 만주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운 항일무장군대를 말한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의 주인공이 바로 이들이다. 김좌진 홍범도 이범석 등 쟁쟁한 독립군 영웅들의 활약상은 지금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 독립군은 1921년 자유시 참변 이후 급격히 무너진 뒤 명맥만 간신히 유지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그러다가 1931년 만주사변이 벌어지자 한인 독립군은 항일 중국군과 연합해 일본군과 싸우며 다시 활발한 무장투쟁을 벌였다. 하지만 193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사실상 만주에서의 독립군 역사는 무대에서 사라졌다.

1930년대의 독립군이 바로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독립군과 양세봉이 지휘하는 조선혁명군이었다. 이렇게 볼 때 만주 일대의 독립군 역사는 약 15~20년 정도에 불과하다. 이준식 장군은 이러한 독립군 역사에서 명맥만 간신히 유지하던 1920년대 중반부터 1930년 초까지 활동했던 독립군이었다. 침체기인 이 시기의 독립군 활동은 미비했고, 더욱이 김좌진이나 이범석처럼 유명하지도 않은 이준식 장군의 자료는 더욱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준식 장군은 이범석·김홍일 장군과 동시대의 인물이다. 독립군 활동 시기에서 약간의 시차만 있을 뿐 연령대가 비슷하고 광복군, 국군으로 이어지는 삶의 과정도 비슷하다. 1900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난 이준식은 일찍이 중국으로 망명, 명문 군관학교인 운남강무당에 입학해 독립군의 자질을 쌓았다. 이후 만주로 달려가 항일독립군 연합단체인 통의부와 정의부 등에서 활약했다. 그는 또 중국군의 고위 장교가 돼 일본군과 싸우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물밑에서 지원하기도 했다.

이준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40년 광복군을 창설하자 광복군의 핵심간부로 활동하다가 해방이 되자 국군지휘관이 돼 6·25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특히 개전초 국군 3사단을 지휘하며 영덕지구에서 북한군을 격퇴, 아군이 낙동강전선을 지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의 핵심지휘관이었지만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 한평생 묵묵히 군인의 길을 걸었던 이준식 장군을 ‘대한민국의 전쟁영웅’에서 재조명한다.

6·25전쟁 초 포천 일대에서 북한군과 싸웠던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참전 기념비.

6·25전쟁 초 포천 일대에서 북한군과 싸웠던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참전 기념비.


이준식은 1900년 2월 18일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울의 휘문중학교를 졸업한 뒤 1919년 3·1운동이 벌어지자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 상해의 임시정부를 찾아간 이준식은 청산리대첩 등 만주에서 활약하는 독립군 소식을 듣고 군사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1921년 중국의 명문 군관학교인 운남강무당에 입학, 5기로 졸업했다. 이후 그는 만주로 가 자유시사변 이후 무너진 독립군조직을 재정비하기 위해 조직한 대한통의부에 가입했다.

1925년 대한통의부를 비롯한 남만주의 12개 독립운동단체가 모여 정의부(正義府)를 결성하자 이준식은 중앙위원이 됐다. 이어 1927년 군사위원장 겸 총사령관이던 오동진이 일본 경찰에 잡히자 그 후임이 되었다. 이준식은 1928년 국민부(國民府)의 수립에 주동적 역할을 했다. 그 결과 중앙집행위원회의 군사위원장에 선임된 뒤 8개 중대, 1개 호위대 병력의 독립군사령관이 됐다.

이준식은 그러나 만주에서의 무장독립투쟁이 갈수록 어려워지자 1930년 상해로 가 임시정부와 상의 끝에 장개석의 중국군에 들어간다. 1937년 상해 임시정부가 중·일전쟁으로 광저우로 이전하게 되자 중국군 장교로서 임시정부 청사를 확보하는 데 갖가지 지원을 했다.

중국군 고급장교를 지내면서 임시정부를 물밑에서 지원하던 이준식은 1939년 중국군을 나와 임시정부에 본격 참여한다. 그리고 마침내 1940년 임시정부가 직속 군대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자 1지대장이 되었다. 1941년에는 광복군 제1징모분처 주임위원으로 활동하며 광복군의 초모활동·군사훈련 등의 임무를 담당했다.

이준식의 삶은 동년배인 이범석의 삶과 여러모로 비슷하다. 명성에 차이가 있을 뿐 시차를 두고 독립군, 중국군, 광복군으로 이어지는 삶의 행로는 일제강점기하 한국인의 투철한 애국심의 전형이었다.

그는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해방되자 1946년 귀국해 이범석이 창설한 민족청년단의 부단장이 됐다. 이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되자 육사 특별반으로 입교한 뒤 7사단장으로 보임됐다. 광복군 동료였던 이범석이 초대 국방부 장관이 되자마자 광복군 출신을 중요 보직에 기용한 탓이었다.

이준식은 6·25전쟁이 발발하기 보름 전에 단행된 대규모 인사이동을 통해 육군사관학교장이 됐다. 국군이 광복군의 법통을 물려받은 ‘광복군의 후예’라는 인식이 장교를 양성하는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임명하는 인사에서도 적용됐기 때문이었다. 이준식 장군은 그러나 육군사관학교장으로 영전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편치 못했다. 가까운 시일에 북한군이 침략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불안은 현실이 됐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38선 전역에서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이 물밀 듯이 쳐들어왔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북한군은 압도적인 병력과 장비로 순식간에 38선을 돌파했다. 국군 지휘부는 북한군의 전면전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속수무책으로 전방이 뚫리고 포천과 의정부 방향으로 북한군이 물밀 듯이 몰려와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서울 태릉에 위치한 육군사관학교로 육군본부의 명령이 하달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육군본부는 전방의 상황이 악화되자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보병학교 교도대를 전방으로 보내고, 생도대로 하여금 포천 후방의 서피-퇴계원 지역을 방어하라고 명령(육군본부 작전명령 제90호)했다.

이때 육군사관학교는 임관을 20여 일 앞둔 육사 생도 1기와 입교한 지 불과 20여일 밖에 되지 않은 생도 2기 등 총 530여 명의 생도가 있었다. 참전이 불가피하자 생도들은 부평리(내촌), 금곡리, 태릉 등의 지역에서 부여된 임무에 따라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고자 결전을 벌어야 했다.

육군사관학교장인 이준식 준장은 6월 27일 육군본부로부터 명령을 하달받아 교내에서 휴식 중이던 국군 7사단 9연대 후퇴병력과 생도들을 교내와 학교 주변 삼육신학교(현 삼육대학교)와 92고지에 배치했다. 북한군의 접근을 전초에 파악하고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북한군은 서울의 최후 방어선이었던 창동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추가적으로 구축한 미아리방어선까지 압박했다. 이미 육군사관학교 후방에도 적이 출현하고 있었다.

6월 27일 밤 22시를 기해 육군사관학교 부근에도 적의 포격이 시작됐다. 6월 28일 새벽에는 진지에서 대기하던 생도들을 향해 북한군은 무자비한 공격을 펼쳤다.

이에 이준식 장군은 생도들의 전멸을 우려해 후퇴명령을 내렸다. 이준식 장군은 “혼란을 피해 침착하게 한강을 건너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 지시는 와전돼 일부는 후퇴명령을 거부하고 끝까지 싸우기 위해 잔류하기도 했다. 이때 남아 끝까지 싸운 이들(생도 1기 10명과 생도 2기 3명)과 나중에 합류한 9연대 소속의 장병(부사관 1명과 병사 6명)들이 훗날 ‘호랑이 유격대’ 혹은 ‘불암산 호랑이’로 불리게 됐다.

이준식 장군은 북한의 서울 함락 후 6월 28일 오후부터는 육사 생도들을 이끌고 서울 광장리 일대에서 한강방어선전투에 참가했다. 이어 7월 1일부로 급조된 혼성3사단장에 임명됐다. 이준식 장군은 예하 22연대와 25연대, 육사 생도대대를 이끌고 금곡리-수원 축선에 방어선을 형성하고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지연함으로써 북한군이 전략적인 차질을 빚도록 유도했다.

전쟁 발발 보름 전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임용되었다가 개전 1주일 만에 다시 야전 사단장으로 전격 복귀한 이준식 장군은 경북 영덕으로 지연전을 벌이며 철수했다. 그리고 얼마 후 북한군 주력인 5사단과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전투를 벌이게 된다. 일명 영덕지구전투가 그것이었다.

1950년 6월 27일 강릉을 점령한 북한군 5사단은 이 일대를 방어하던 국군 8사단이 대관령~제천으로 철수한 후, 국군 병력이 배치돼 있지 않은 동해안 축선을 따라 남하했다. 이들은 7월 1일 울진을 점령하고, 7월 12일 영덕 북쪽 1㎞ 지점인 평해까지 진출했다.

국군 제8사단이 내륙으로 이동한 후 동해안 지역은 국군 3사단 23연대가 담당하게 됐다. 본래 국군 3사단은 예하에 2개 연대를 두고 있었지만, 전쟁 발발 직후 22연대가 전방으로 이동함에 따라 23연대만이 영남지역을 방어하게 됐다.

이준식 장군은 7월 10일 3사단장에 임명된 뒤 23연대와 독립 제1대대를 지휘해 영해-영덕을 방어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에 따라 23연대는 7월 16일 영덕 북쪽 4㎞ 지점의 활인산~237고지~매정동을 연하는 선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북한군과 대치했다.

북한군 5사단은 영덕을 목표로 11연대와 12연대를 해안도로로, 10연대를 진보-청송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7월 16일, 북한군이 야간을 이용해 일제히 공격을 벌이자 국군 23연대의 방어선은 순식간에 뚫렸다. 이에 이준식 장군은 아군의 병력과 화력의 열세로 현 전선의 유지가 곤란하다고 판단, 일단 영덕 남쪽 181고지와 207고지로 부대를 철수시켰다. 미군의 공군과 화력을 지원받아 반격하자는 계획이었다. 중국에서 일본군과 싸울 때 지연전을 벌였던 경험을 살린 전술적 지휘였다.

포항 방어를 위한 마지막 보루였던 영덕이 피탈되자, 미 8군은 화들짝 놀랐다. 미 8군은 동해안의 해군력을 증강하고 미 공군 35전술비행단, 40전투비행대대로 하여금 국군 23연대를 직접 지원토록 조치했다. 미군 해·공군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자 3사단 23연대는 7월 17일 반격을 감행했다. 이어 영덕을 탈환했으나, 그 뒤에 다시 빼앗기고 빼앗는 혈전을 반복했다. 격전이 반복되는 동안에 국군 3사단 전술지휘소는 강구로 이동하고, 26일에는 개전 초기 수도권에 투입되었던 22연대가 원대 복귀했다.

22연대의 증원으로 전투력이 배가된 국군 3사단은 유엔 해·공군의 근접지원을 받으면서 영덕·강구 일대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끝내 저지할 수 있었다. 훗날 전사는 적시에 가해진 유엔 해·공군의 화력지원, 예하 부대의 철수와 투입 시기에 대한 예리한 판단 등 사단장의 지휘력이 돋보인 전투였다고 평가했다. 이준식 장군은 영덕지구전투 공로로 태극무공훈장을 수상했다.

영덕지구전투는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물론 7월 하순까지 포항을 점령하려던 북한군의 계획을 좌절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준식 장군은 이후 1군단 부군단장, 육군본부 전방지휘소장, 작전참모부장 등 6·25전쟁 동안 국군의 주요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뒤 1959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군과 광복군으로 일본군과 싸우고, 해방 후에는 국군지휘관이 돼 6·25전쟁에서 북한군을 격퇴한 이준식 장군은 40년간 조국을 위해 군복을 입은 자랑스러운 전쟁영웅이다.


정호영 기자 < fighter7@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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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손은석9705서울 2021.08.13 23:46
지휘 능력을 보면 승승장구할 수 있었는데 야전사단에서 빼서 육사교장 보낸거며 그 후 군단장에서 끝난거며.. 일본군 출신이 아니라서 그런가 보네요.
최장옥9710서울 2021.08.16 09:26
초대 사단장님이 전우회 사무실에서 가까운 곳에 계셨네요....
전우회 임원들과 한번 찾아 뵈야 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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