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녕 조림산지구 전투
칠성은

신녕 조림산지구 전투

칠성관리자 0 15,784 2007.05.01 11:56
● 전투시기 : 1950.8.30-9.4
● 전투지역 : 영천 신녕, 군위 조림산
● 주요지휘관 : 김익렬 대령, 함병선 대령
● 참고문헌 : 한국전쟁사(국방부), 한국전쟁사(전쟁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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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신령 조림산지구 전투의 개요

신녕-조림산 부근 전투는 신녕-화산지구 전투와 더불어 대구 북동부방면 방어작전 중 하나이다. 낙동강을 건너게 된 북한 제 8사단은 아군 제 6사단과 교전하면서 신녕 북쪽의 조림산 부근으로 남침하였고, 북한 제 12사단과 제 15사단은 보현산 지구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이 신녕지구 싸움은 대구를 우회공격하려는 적 8사단을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여 앞으로 북진반격을 하는데 큰 공헌을 세운 전투이다.

2. 신령 조림산 지구 전투의 주요 지휘관

*아군
제 2군단장 준장 유재흥
제 6사단장 대령 김종오
제 2연대장 대령 함병선
제 1대대장 소령 김병진
제 7연대장 대령 박부택
제 1대대장 중령 김용배
제 2대대장 중령 김종수
제 3대대장 중령 조현목
제19연대장 대령 김익렬
제 1대대장 소령 허용우
제 2대대장 대위 김욱전
배속부대
제 5연대장 중령 최창언
기갑연대장 대령 백남권
지원부대
제16포병대대장 소령 김성
병력 약 8500명

*적군
제 2군단장 중장 김무정
제 8사단장 소장 오백용
제 81연대장 총좌 이영래
제 82연대장 총좌 사세
제 83연대장 중좌 오윤섭
포병연대장 중좌 김명항
병력 65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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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령 조림산지구 전투의 진행과정

가. 신령 조림산 부근 전투 전 상황

8월초 북한군 제 2군단장은 북한군 8사단으로 하여금 안강, 포항 지구로 침투시키려고 계획하고 있었으나 이 사단이 8월 7일 아군 제 8사단에 의하여 의성 지구에서 1개 대대 이상의 병력 손실을 입었기 때문에 계획을 변경하여 의흥, 신녕 선으로 진출하도록 하였다. 북한군 제 8사단은 8월중 의성, 의흥 등지에서 아군 제 6사단과 대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연일 계속되는 아군 지상군의 반격과 공군의 맹폭에 의하여 적은 병력과 장비 면에 많은 손실을 입게 됨으로써 사기가 저하되기에 이르렀으나 아군의 반격태세가 아직 완전히 갖추어지기 전인 9월초 최후 발악적인 공격을 시도했으나 역시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북한군 제 2군단 예하 북한군 8사단이 인접사단과 합세하여 의흥을 거쳐 대구를 목표로 우회공격을 꾀하고 있었던 8월 말에 이르러 아군 제 6사단은 신녕 북쪽에 강력한 방어진을 편성하여 적의 최후 공격을 저지하려는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 당시 아군 제 6사단은 예하 연대인 2연대와 7연대 그리고 19연대 외에 제 7사단의 5연대와 기갑연대의 증원을 받아 도합 5개 연대로써 동서간 32km의 산악정면을 담당하고 있다가 아군 제 1사단이 제 6사단 좌측에 투입되자 제 1사단은 가산에서 신원에 이르는 13km 정면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제 6사단은 운산동에서 화산에 이르는 15km 정면을 맡아 지키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전투지경선의 변경과 조정에 따라 제 6사단에 배속되었던 제 8사단의 10연대는 30일 원대 복귀하기로 결정하고 5연대(제 1, 2대대)와 기갑연대도 역시 명에 의하여 제 7사단에 복귀한 다음, 육군본부 예비대가 되도록 사전 조치가 취해지고 있었다.
제 6사단의 신녕 지구 싸움은 대구 외곽선을 끝까지 방어하게 함으로써 대구를 점령하려는 적의 야욕을 완전히 수포화시켰으며 나아가 낙동강 방어선에서의 총반격에서도 중요한 일역을 맡아보게 된 것이다.

나. 신령 조림산 부근 전투 경과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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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30일
아군 제 6사단은 우로부터 좌로 19연대, 2연대, 7연대, 5연대, 기갑연대 순으로 배치되어 남하를 계속하는 적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날 558고지 일대의 기갑연대 방어선에서는 별다른 적과의 접촉이 없는 가운데 전방의 적과 대치중이었고 제 5연대(연대장 최창언 중령)는 527고지와 318고지 선에서 경미한 탐색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 7연대(연대장 대령 박부택)는 223고지와 284고지 및 370고지를 이은 선에서 적과의 접촉은 없었으나 적정을 살피기 위하여 전방에 수색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한 편 제 2연대(연대장 대령 함병선)는 3대대가 370고지에서 04:00에 침입해 온 적을 격전 끝에 격퇴하고 있었으며 우측의 1대대는 화전동 남쪽으로 이동한 다음 2대대와 더불어 조림산 부근에서 공격을 감행해 온 적을 맞아 21:00까지 치열한 접전을 전개하였다.
또한 제 2연대 우측의 제 19연대는 3대대가 조림산 부근 경사면에서 월산 부근의 동남쪽 경사면에 배치된 제 1사단 15연대 2대대와 더불어 방어하고 있었으며 1대대는 여덕동에, 그리고 2대대는 723고지 일대를 각각 점령한 다음 인각동 쪽에서 공격해 온 적 1개 대대 병력과 쉴 새 없이 교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날 신녕지구로 이동하고 있던 제 15연대 1대대는 530고지에, 그리고 3대대는 모고산(558고지)일대에 집결하여 새로운 진지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제 7사단 8연대 2대대는 괴산동 부근 고지 일대에서 화산 부근으로 침입을 기도하는 적에 대비하고 있었다. 한편 제 16포병대대(대대장 김성 소령)는 105mm M-2포 3개 포대(18문)로서 각 연대 전역을 직접지원하고 있었다.

8월 31일
제 2연대는 30일의 방어선에서 적의 남침을 저지하고 있었으며, 제 19연대 3대대와 제 15연대 2대대는 조림산을 탈환하기로 결정한 결과 반격을 시작하였으나 13:00 현재 8부 능선까지 진출하다가 전진이 부진하기에 이르러 다시 원진지로 되돌아 왔다. 제 15연대및 제 8연대 2대대 정면은 낮에는 비교적 평온하였으나 밤에 이르러는 적이 야음을 이용하여 화산으로의 침투를 꾀하려는 징조가 농후하게 보였다.

9월 1일
제 2연대는 적의 압력이 우측 제 19연대 정면인 조림산에 가중해지므로 연대지휘소를 동지동(東池洞)으로 이동하게 되었으며 예하 각 대대는 31일에 이어 현진지를 계속 확보하면서 적을 맞아 칠 준비에 분주하였다.
제 19연대 3대대는 이날 02:00부터 적의 압력을 받기 시작하여 그 방어진지가 동요하기에 이르렀으므로 04:00에 조림산 남쪽으로 일단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10:00에 이르러 제 7연대의 1중대의 지원을 받게 됨으로써 다시 반격을 시작하려 하였으나 병력의 부족 등으로 커다란 진전을 보지 못하고 다시 반격의 기회만을 노리게 되었다. 이 당시 여덕동의 제 1대대는 조림산 부근의 적에 대비하기 위하여 진지를 남쪽으로 약간 이동한 다음 부대를 재수습 하면서 대비하고 있었다.
한편 화산동 일대에서 야간을 이용하여 침투하여 들어오는 적을 발견하자 곧 이것을 격퇴하기로 결심한 다음 여명공격(黎明攻擊)을 시작한 제 7연대 1대대(대대장 중령 김용배)와 제 15연대 1대대(대대장 소령 유재성) 및 3대대(대대장 소령 최병순)는 이날 14:00에 이르기까지 격전을 계속한 끝에 화산동 일대의 적을 격퇴하고 말았는데 이때 제 15연대 1, 3대대는 637고지 북쪽까지 적을 추격하여 섬멸하였다.
이 화산동 싸움으로 말미암아 일시나마 침체되었던 아군의 사기가 다시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9월 2일
제 15연대 1대대 및 3대대는 화산동 선을 확보하고 있었고 제 19연대 3대대와 제 15연대 2대대는 합동하여 조림산 남쪽으로 반격을 가하였다. 그리고 제 7연대 1대대는 전투가 없는 가운데 고지에서 진지를 보강 중이었다.

9월 3일
제 2연대 3대대는 지금까지의 방어진지였던 370고지를 제 1사단 12연대에 인계하고 아침 일찍 무암동 서쪽으로 이동하여 진지를 점령하였다. 이날 북한군 제 8사단은 화산, 조림산 지구의 아군 제 19연대 정면에 전자 12대를 선두로 대병력을 투입하여 전면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하였으나 아군은 이 적의 진격에도 불구하고 동요하는 바 없이 적을 진지 앞까지 끌어들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적의 충격력(衝擊力)은 예상외로 강하여 제 2연대의 1대대 및 2대대는 우측방에 대한 적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에 제 19연대와 동일선으로 전선을 정리하였으니 곧, 제 1대대는 무암동 서북쪽 일대에, 그리고 2대대는 무암동 일대를 점령하여 조림산 부근에서의 적의 측방 위협 행동을 무효화 하려고 하였다.
한편 제 19연대 3대대와 제 15연대 2대대는 새로 증원된 정예한 제 7연대 3대대와 더불어 조림산에서 남하하고 있던 적을 맞이하여 분전난투를 거듭한 결과 11:00까지에 대부분의 적병을 섬멸하고 이어서 조림산을 향해 추격을 감행하였으나 이미 날이 저물기 때문에 그 이상 전진하기를 단념하고 원위치로 되돌아와 진지를 더욱 강화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덕동 일대를 점령하고 있던 제 19연대의 18대대는 도로를 따라 화산 부근으로 남진하는 적 전차 6개를 발견하는 즉시 포격을 집중하였으나 적의 전차는 화수동으로 재빨리 후퇴하였다. 또한 제 6사단의 우측 지구를 점령중인 제 15연대는 제 7연대에 진지를 인계한 다음 연정동으로 이동하여 차후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날 적이 전(全) 전선에서 공세로 나오자 미 제 5공군 예하의 전폭기 편대가 출격하여 대폭격을 가함으로써 적 지상부대에 많은 출혈을 내게 하였고 전차 3대와 야포 3문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던 것이다. 이와 같이 적의 주간 진격상태가 매우 부진하게 된 까닭은 주간에 있어서 우군의 항공활동의 위력이 컸고 이에 호응하여 아군이 지상에서 쉴 새 없이 그들에게 공격을 하는데 서로 앞을 다투었던 까닭이라 하겠다.

9월 4일
제 6사단 전면의 적은 아군의 반격과 공중 폭격으로 인하여 많은 손실을 입고 진출을 주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날의 상황은 비교적 평온한 편이었으므로 아군은 진지를 더욱 강화하면서 닥쳐 올 싸움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날의 특기할 사항으로는 제 19연대의 1대대가 화산동 깊숙이 숨겨놓은 적의 전차 8대를 발견한 결과 곧 특공대로서 이를 모두 파괴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4. 신령 조림산지구 전투의 결과

8월 말부터 북한군 제 8사단은 인접 북한군 제 13사단 및 제 15사단과 서로 호응하면서 신녕지구를 돌파한 다음 대구 방면으로 진출하여 보려고 최후의 총공세를 다짐하였던 것인데 이 적을 맞이한 아군 제 6사단은 장병 모두가 일심동체가 되어 대구 외곽선을 끝내 사수하는데 성공하여 적의 야욕을 드디어 분쇄하고 말았다.
9월 15일부터 반격에 들어간 아군은 낙동강 선의 모든 전선에서 끝까지 저항하고 있던 적에 일대 타격을 가하면서 일로 북진반격을 재촉하였다. 원래 제 6사단의 신령 지구 싸움은 대구를 우회공격하려는 북한군 제 8사단에게 섬멸적인 타격을 가하여 그 전투 능력을 빼앗고 그 사기를 극도로 저하시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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