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9월 16일 우리는 경북 군위군 고로면 인각사 능선 주변에서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철모를 잠시 벗고 땀을 닦는 순간 적탄이 김용배 대대장의 머리 윗부분을 때리며 지나갔다. 머리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1㎝만 아래로 맞았다면 머리가 두 갈래로 터졌을 것이다.
그는 “괜찮아. 뼈엔 이상이 없는 것 같아”며 위생병에게 약을 듬뿍 바르게 했다. 붕대로 두둑이 감은 머리에는 철모가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산 위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대원들은 “훌륭한 대대장을 따라 나라를 위해 이 한목숨을 기꺼이 바치겠다”고 입을 모았다.
김용배 장군(준장·1921년 4월 17일~1951년 7월 2일)은 경북 문경시 출신이다. 김 장군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북한군에 사정없이 밀렸던 한국군에 처음으로 승리의 깃발을 안겨다 준 주역이다. 제6사단 제7연대 1대대장이었던 그는 한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충북까지 내려온 북한군을 1950년 7월 5일부터 10일까지 공세적 방어로 막아 세웠다. 충북 음성군의 동락리 전투라고 불린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의 군수참모를 비롯한 132명을 잡고 대전차포 등 각종 무기를 노획했다. 또 한국군이 진천과 음성, 충주로 이어지는 저지선을 구축하고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줬다.
그는 그해 10월 38선을 넘어 압록강변에 태극기를 꽂았다. 한반도의 북쪽 국경선에 가장 먼저 도달한 최선봉 부대의 명예를 안았다. 전투 때마다 큰 공을 세운 그는 1951년 7월 제7사단 5연대장으로, 강원 양구 토평리 전투에서 중공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김 장군은 문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구치 현립 농업학교에 다녔다. 한국으로 돌아와 1948년 국방경비사관학교 제5기로 입교해 졸업 뒤 소위로 임관했다. 정부는 1951년 9월 태극무공훈장과 1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매년 문경시 문경읍 용배공원에서는 김용배 장군 추모제가 열린다.
김지홍기자 kjh@idaeg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