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차 중대출신 선배님.
칠성은

전차 중대출신 선배님.

이주석(82.02강원) 1 10,476 2011.06.15 16:27
[Why]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현대사의 거인' 동상 만든 김영원 홍익대 미술대학장

 
[조선일보] 2011년 04월 30일(토) 오전 03:04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볕 좋은 산 중턱에 창고가 두 채 있다. 남면(南面)한 채 틀어앉은 한 곳의 자물쇠를 따자 빛이 뽀얀 먼지 속을 세차게 파고들었다. 30㎝ 남짓한 입상(立像)이 보였다. 흙으로 빚은 박정희 (朴正熙) 전대통령이다.

이 찰흙이 곧 6m크기의 틀로 변한다. 거기에 정제한 구리와 주석을 녹여 부으면 비로소 청동상이 완성된다. 올 10월 경북 구미시 상모동 생가(生家)에서 환생할 박 대통령을 김영원(金永元·64· 홍익대 미술대학장)이 매만지고 있었다.

'업(業)'이란 말이 풀썩대는 먼지처럼 모락거렸다. 박정희와 김일성(金日成)은 한국 현대사 최대 라이벌이었다. 오래전 저승으로 떠난 둘이 이제 동상(銅像)이 돼 맞붙고 있다. 기 센 인간의 집념은 시공(時空)마저 뚫는 모양이다.



김일성의 필생의 꿈은 적화통일이었다. 그 유지(遺志)가 아들에서 손자 대로 넘어가고 있다. 전쟁광(戰爭狂)에 맞서 대한민국을 지킨 박정희의 삶은 달랐다. 살아선 외로웠고 죽어선 구박받았다. 공(功)은 잊히고 과(過)는 부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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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하나 짓는 게 이리 어렵고 모처럼 만드는 동상이 하필 김일성과 비교되니 팔자(八字)도 이런 팔자가 없다. 공교롭게 올해는 그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5·16 50주년이다. 논쟁을 촉발한 김영원은 기자가 "김일…"이라고 하자 말을 끊더니 언성을 높였다.

"도대체 조각을 모르는 사람들이 왜 자꾸 그리 말하는지 모르겠어요. 김일성은 그냥 손들고 있는 겁니다. 박 대통령은 지향(指向)하는 겁니다. 같습니까? 한 좌파매체가 그렇게 쓰니 모든 언론이 다 따라가는데 정말 답답해요."

◆"서서 국가개조 구상하는 자세가 제일 낫다"

―뭘 지향하는 겁니까.

"그분에겐 두 가지 이미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5000년 동안 수식어처럼 달고 다닌 '가난'을 종식시킨 문(門)을 연 열쇠와 시대를 앞당긴 시침(時針)입니다. 전 시침에 그의 8가지 주요 업적을 새길 겁니다."

―코트 입은 외양이나 금색이 평양 만수대의 김일성 동상을 연상시키는 건 사실입니다. 전에 작가가 만든 세종로 세종대왕상도 같은 색인데 금색을 좋아합니까.

"저기 저 모형이 양복 차림입니다. 그분은 체격이 왜소해요. 동상 8m에 좌대(座臺)가 2m60㎝인데 양복 차림 동상을 밑에서 보면 초라해 보입니다. 남산 김구 (金九) 선생 동상이 한복인데 풍성해 보이죠? 양감(量感) 때문이에요. 제일 정확한 비율로 배합된 청동은 황금보다 더 화려한 금빛이 납니다. 제가 좋아해서가 아닙니다."

―국민은 세종로에 서 있는 이순신(李舜臣)장군상 같은 색깔을 원하는 것 같은데.

"청동은 금빛이지만 녹슬면 그런 빛이 나옵니다. 이순신장군상은 제작 당시 재료가 모자라 놋쇠며 숟가락까지 녹여 만들다 안 돼 페인트를 칠한 겁니다. 얼마 전 이순신장군상 내부를 내시경(內視鏡)으로 검사했죠. 안에는 아직도 금색이 보여요. 조각 모르는 사람들 때문에 처음부터 일부러 녹슨 동상 만들 수는 없잖아요."

―크기도 조금 지나친 것 같은데, 이순신장군상도 6m, 그 뒤에 있는 세종대왕상도 6m 아닌가요.

"공모 때 정해진 기준인데 저도 줄이자는 생각에 동의해요. 생가이니 5~6m 정도로 축소해도 괜찮습니다.(이 대화를 나눈 1차 인터뷰가 있은 지 2주 후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이 동상 축소 의견을 냈다. 박 의원은 권위주의적인 자세도 수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자세를 수정한다면 어떤 포즈가 될까요.

"추진위에 세 가지 안을 전했어요. 서서 걷는 모습, 앉아서 사색에 잠긴 모습, 서서 지도나 국가개조 같은 단어가 새겨진 두루마리 같은 것을 보고 있는 모습, 이렇게요."

―어떤 자세가 제일 나을까요.

"개인적으론 세 번째가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처음 제안한 게 권위적이라면 넥타이를 푼다든지 하는 식으로 바꿔도 괜찮습니다. 좌대를 없애면 생가 방문객들이 사진촬영도 할 수 있고 만질 수 있으니 더 친근감을 느끼겠지요."

―박 대통령 동상의 얼굴은 몇살 때입니까.

"한창 활동하던 50대 때 모습입니다. 그분이 62세 때 돌아가셨는데 그땐 이미 나이 든 얼굴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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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 동상이 국내에 몇개나 있나요.

"제가 알기론 청남대에 흉상 하나와 구미 쪽에 작은 것 하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건 처음입니다."

―좌파단체에서 욕설을 퍼붓거나 협박하진 않던가요.

"그런 일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개의치 않습니다. 저도 대학(홍대 미대) 다닐 땐 3선 개헌 반대도 하고 그분을 독재자로 생각했지만 군 입대 후 뒤 바뀌었어요."

―이순신장군상을 만든 고 김세중 작가의 부인 김남조(金南祚) 시인 가족에 따르면 조각가의 얼굴이 작품에 반영된다더군요.

"제 얼굴은 날카로워서 반영하기 힘든데. 예를 들어 세종대왕은 운보 김기창 선생의 표준 영정이 있는데 굉장히 문약(文弱)해보입니다. 그래서 태조 이성계, 영조(英祖), 고종(高宗)의 어진(御眞)에 가요 '비둘기 집'을 부른 가수이자 왕손(王孫)인 이석씨 얼굴을 전부 참고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중흥(中興)을 이룬 두 지도자의 동상이 모두 선생 손에서 이뤄졌습니다.

"세종대왕도 대단한 분이지요. 노비가 아기 낳으면 산전(産前) 백일, 산후(産後) 한 달 휴가를 준 기록이 나옵니다. 해시계를 백성들을 위해 종로에 설치한 것도 그렇고요."

◆8·15에 되살아날 또 한명의 지도자 이승만

올 4·19를 즈음해 이승만 (李承晩) 재평가 움직임이 일어났다. 동상 하나 없이 잊힌 건국대통령 이야기를 김영원에게 묻자 뜻밖의 답이 나왔다. "이승만 대통령 동상, 이미 3년 전에 제가 끝냈어요. 한국자유총연맹 의뢰를 받고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자유총연맹 안에 세우겠다고 당시 권정달 총재가 요청했습니다. 3m 크기로 의상 때문에 고민했는데 이 박사가 국제적인 지도자잖습니까. 그래서 그분껜 양복을 입혔지요. 한 손에 헌법 책을 들고 한 손은 국민에게 인사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동상이 왜 안 보입니까.

"모금운동이 지지부진하기 때문이래요. 주물(鑄物)작업만 하면 되는데… 다행히 모금이 재개돼 올 8월 15일 동상이 설치될 겁니다. 공교롭게 세종대왕, 박 대통령, 이 대통령 세 분 동상을 제가 다 제작했어요. 만들고 싶은 분은 다 만든 것 같습니다."

―선생은 사실적인 조각의 대부(代父)인데 위인(偉人)동상으로도 유명합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동상 중 제일 걸작이 뭘까요.

"아산병원의 정주영 (鄭周永) 회장 흉상, 교보창립자 대산 신용호 (愼鏞虎) 회장, 태평양 서성환 (徐成煥) 회장, 가수 현인 동상 등을 만들었지만 동상으로 이름나는 건 바라지 않습니다. 다른 분 작품 중엔 인천에 있는 맥아더 동상과 남산에 있는 백범 김구 선생 동상이 제일 낫다고 봅니다. 사실 동상 만들 때마다 구설에 오르는데 국새 만들 때 해프닝보다 약과예요."

―국새도 만들었습니까?

"1998년 9월인가 10월에 행정안전부 서기관이 찾아왔어요. 3대 국새를 제작할 계획인데 제가 12명의 지명공모작가에 포함됐다고요. 당시 장충단공원 3·1독립기념탑을 만들 때였어요.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이 취임 1주년 기념식을 거기서 한다고 해 밤샘 작업을 할 때였습니다. 그래서 못한다고 했죠."

―그랬더니요?

"나랏일인데 왜 협조 안 하느냐며 굉장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돌아갔어요. 그 서기관이 간 뒤에 행정안전부가 뭐 하는 곳이냐고 물어보니 옛날 내무부래요. '앗 뜨거라' 싶었어요. 내무부가 한때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말이 있을 만큼 힘 있었잖아요. '면피용'으로 응모작을 냈는데 그게 당선이 됐어요."

―그럼 영광스러운 건데.

"주물작업이 잘못돼 실금이 생겼어요. 육안(肉眼)으론 안 보이고 100배 확대경으로 봐야 겨우 보이는데 김 대통령 임기 때 잘 썼어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등장하자 '국새에 금이 가 국운이 나빠졌다'느니 '쌍봉(雙鳳)을 새겨 국론(國論)이 분열됐다'느니 하는 말이 많아졌습니다."

―누가 그런 소릴 하던가요.

"4대 국새 제작했다가 얼마 전 구속된 그 사람이 선동하고 다녔어요."

―국새를 혼자 다 만들었습니까.

"전 인유(印 金+丑), 즉 손잡이만 만들었죠. 서체, 보자기, 매듭, 상자 같은 것은 최고의 인간문화재들이 했고요."

―그런데 왜 혼자 비판받습니까.

"저도 모르죠. 그 친구가 별말을 다 했어요. 자기는 600년 비기(秘記)를 안다, 음양사상에도 해박하다고. 전 '600년 비기도, 음양사상도 잘 모르는데 괜히 모르는 분야에 뛰어들어 망신당하는구나'하고 속만 끓였어요."

―봉황이 두 마리라 국론이 분열됐다면 한 마리만 새겨야 하나요.

"명나라 황제가 조선국새엔 거북만 새길 수 있게 했습니다. 우리 정부 1, 2대 국새도 손잡이가 거북이 모양입니다. 금도 아니고 은(銀)이었어요. 3대 국새 만들 때 청룡(靑龍)을 고려했는데 용이 서양에선 사탄의 상징이잖아요. 쌍봉도 정부에서 정한 겁니다."

―4대 국새 만든 이가 엉터리로 밝혀졌으니 무척 억울했겠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때 무슨 국론이 분열됐습니까. IMF 극복하고 남북정상회담했고 노벨평화상 탔고 정권재창출까지 했는데. 600년 비기에 음양사상 해박한 사람이 만든 국새 쓴 분은 절벽에서 뛰어내렸잖아요."

◆이병철 회장에게 두 번 '노(NO)'했다

김영원은 만들었다 하면 상(賞)을 타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어렸을 적 병치레가 잦아 경남 창원 고향 논밭에서 크레용을 들고 시작한 그의 미술 재능을 김해 한얼고 미술교사였던 곡우 전종만 선생이 알아봤다. 찰흙 때문이었다.

―찰흙?

"고1 때 미술시간에 찰흙으로 사람 손을 만들었습니다. 선생님이 그걸 보더니 무조건 동아대 에서 열리는 전국 학생실기대회에 참가하래요. 기대도 안 했는데 공작부문 최고상을 탔습니다. 그 소식 듣고 집에선 난리가 났어요. 부모님이 족보(族譜)에서 파내겠다고 했을 정돕니다."

―그 시절엔 대개 그랬죠.

"대학입시 두 달 앞두고 고향 창원에서 부산으로 가 학원 단과반을 다녔어요. 법대 가려고요. 그 학원에 홍대 미대 지원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 따라 시험봤는데 또 덜컥 붙은 겁니다."

―친구도 합격했습니까?

"저만 됐어요."

―거 참 희한한 재능입니다.

"대학 저학년 때 제 조각의 선(線)이 꽤 예뻤어요. 남들이 '상업작가 하겠다'고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대학원생 때 '계간조각' 사진기자가 제 작품을 촬영해간 적이 있어요. 70~80㎝ 정도 크기로 소녀가 가슴에 살포시 손을 얹고 명상하는 모양인데 나중에 그걸 삼성그룹 고 이병철 (李秉喆) 회장이 낙점하셨대요."

―돈 좀 버셨겠습니다.

"재료비가 7만원이었는데 80만원 주셨어요. 주머니에 불룩하게 넣고 자랑하고 다니며 술깨나 마셨지요. 이 회장님이 그 뒤에도 '오수(午睡)'라고, 부부와 아이가 낮잠 자는 조각을 호암미술관에 설치하셨죠. 공중에 붕 떠있는 것 같은 작품인데…, 제가 이 회장님 말을 잘 안 들었어요."

―재벌 회장 말을 잘 안 듣다뇨?

"소녀 명상 조각이 마음에 드셨는지 2m짜리로 만들라고 한 걸 거절했어요. 그 작품은 크면 안 되거든요. '오수'도 좌대를 설치하라고 했는데 거부했습니다. 좌대 놓으면 느낌이 달라지거든요. 그때 부탁하러 왔던 분이 꽤 고생했을 겁니다. 매년 작품 1~2개씩 사주겠다고 했는데도 고집을 부렸으니까요."

―저 같으면 못 이기는 척하고 말 들을 텐데.

"호암미술관 100m 정도 되는 언덕에 인간군상(群像) 150개를 세우는 작품을 그분이 재가했어요. '중력 무중력-순환'이라고. 그 작업이 이 회장이 갑작스레 돌아가시면서 중단됐어요. 재료비만 지원받으면 학교를 1년 휴직하고라도 해보려 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아쉽습니다."

―원래 조각은 추상이 주류인데 선생은 사실주의적인 것 같습니다.

"당시 전국대학미전이 있었어요. 국전(國展)에 버금가는 권위였는데 대학 3학년 때 '파열'이란 추상으로 그랑프리를 땄어요. 인터뷰를 꽤 했는데 제가 '이 작품은 우리 전통에 대한 부정의 몸짓이야'라는 말을 많이 했어요. 근데 그게 나중에 창피해지더군요."

―왜요.

"그 직후 입대해 탱크병(兵)이 됐습니다. 강원도 화천 7사단에서 무척 고생했습니다. 꼭 보초를 밤 12시부터 새벽 2시까지 섰는데 '우리 전통에 대한 부정의 몸짓'이라고 했던 게 겉멋이었던 걸 깨달았거든요. 우리나라에 그때까지 실증주의, 합리주의 이런 게 없었잖아요."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없는 걸 어떻게 부정부터합니까. 그래서 '전통'부터 세우자 마음먹고 사실주의로 돌아선 겁니다."

―탱크병 생활이 나빴던 것만은 아니네요.

"박 대통령에 대한 인식도 그때 달라졌어요. 박 대통령은 국민을 합리적으로 만들려 했습니다. 그러면 독재자가 스스로 무덤 파는 격인데 그걸 했습니다. 그때 전 그분이 바보 아니면 진짜 애국자라고 생각했어요."

◆기공과의 기연(奇緣)

1980년대 중반 민주화의 물결이 나라를 강타했다. 학생은 교수를 어용(御用)이라 지목했다. 노동자는 사용자를 크레인 위에 올려놓고 매판자본가라 비난했다. 김영원은 자신의 작품을 깨기 시작했다. 그러곤 얼기설기 붙여냈다.

―왜 작품을 부숩니까.

"사회가 해체의 시대면 예술도 그걸 반영해야죠. (도록을 보여주며) 이 작품 보면 부서진 남자의 몸속에서 여성이 나오죠? 해체 후의 통합이랄까, 그런 이미지를 담으려 한 겁니다."

―조각가들에게도 해부학이 중요하겠습니다.

"환일고에서 5년간 교사로 있을 때 야간부 대상으로 미술부를 만들었습니다. 방학 때면 남자들끼리니 팬티만 입고 일을 했어요. 해부학은 교과서로도 배웠지만 그때가 진짜였어요. 온통 벗은 몸들이었으니까요."

―왜 선생 작품엔 여성의 신체가 별로 없습니까.

"여성의 신체는 심미적(審美的)이고 탐미적이지요. 전 작품에 사회학적, 철학적 요소가 강해 여성 신체는 맞지 않아요. 뼈와 근육, 이완과 긴장, 돌출과 생략을 표현하려면 남자가 낫지요."

―그 뒤 무중력 시리즈가 나옵니다.

"해체를 주제로 작품을 하다 몸과 마음이 다 상했어요. 제 작품을 제가 깨다 보니 저 스스로가 깨지더군요. 그때부터 기공(氣功)에 빠져들어 별의별 경험을 많이 했지요."

―무슨 경험이기에요?

"현기(玄氣) 선생이라는 분께 배웠는데 백회혈(百會穴)에 기가 흐르면 몸에 전류가 흐르듯 몸이 짜릿해지고 정신과 몸이 따로 놉니다. 머리를 기둥에 처박고 몸을 땅바닥에 패대기쳐도 다치질 않지요. 그 덕을 톡톡히 봤는데 1990년 12월 눈 오던 날, 경기도 이천에서 수련 마치고 우이동 집으로 돌아오다 사고가 났어요."

―자동차사고인가요.

"옆에 앉아있던 분이 '기공에서 배운 직시(直視)를 해보자'는 겁니다. 직시를 하면 아무리 빨리 달려도 괜찮다는 겁니다. 그걸 믿고 눈길에서 속도를 내다 그만 5m 계곡 아래로 추락했어요. 그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뭡니까, 그게.

"그 찰나에 그와 제가 긴 대화를 하는 겁니다. 떨어진 뒤에도 승용차 지붕이 팥죽 끓듯 내려오는 게 보였고요. 빠져나왔는데 다친 곳이 없었어요. 근처 공장에 사고 신고하러 갔는데 직원들이 저흴 귀신 취급하더군요. 전 그때 깨달았습니다. 시공(時空)이란 건 없는 거구나 하는."

―원효대사가 해골에 담긴 물 먹은 이야기 비슷한데 시공을 초월하면 작품이 어떻게 바뀝니까.

"이상하게 작품을 만들기가 싫어졌어요. 하루만 더 손질하면 끝날 것도 손대기 귀찮고. 현기 선생이 흙기둥을 만들어놓고 주물러보고 싶은 대로 주물러보라더군요. 시키는 대로 하니 뱀 같고 도깨비 같은 형상만 나왔어요."

―왜 그럴까요.

"물어 보니 '당신의 마음상태가 지금 그렇다'는 겁니다. 제가 그때 세계 양대(兩大) 비엔날레 가운데 하나인 상파울루 비엔날레 한국 초대작가였습니다. 뭘 출품할까 고민하다 그 흙기둥을 내기로 했지요."

―귀신 형상이라면서요.

"현기선생이 그랬어요. 수영장에서 잠수하면 조금 지나 제가 물이 되는 느낌이 들 때가 올 거라고. 돌을 들었을 때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 오는데 그때 작업하라고요. 결국 제 출품작이 굉장한 호평을 받았습니다. 당시 총감독이 '이번 비엔날레에서 한 작품만 꼽으라면 나는 코리아에서 온 김영원의 작품을 선택하겠노라'고 평했으니까요."

김영원을 2주에 걸쳐 세 번 만났다. 그때마다 그는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었다. 예술가의 삶이란 원래 이리 곡절이 많은 것인가 싶었다. 그런 김영원의 손에 의해 흥망(興亡)과 성쇠(盛衰)를 맛보다 간 인물이 되살아나니 그 또한 운명이 아닐까.




[문갑식 gsmoon@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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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이주석(82.02강원) 2011.09.13 16:51
운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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