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표 단양군수님.
칠성은

이건표 단양군수님.

민경철(88.11충북) 1 13,913 2011.03.17 20:28

[특집] 환갑 앞둔 해방둥이의 삶과 꿈
나의 한국 현대사 60년 - 李建杓 단양군수

『두 번 전쟁을 겪었다.
다섯 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월남전에 자원했다.
나는 이게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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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 建 杓 단양군수
1945년 충북 단양 출생. 단양中, 단양工高 졸업. 중앙大 정치외교학과 2년 중퇴. 단양군 새마을·재무·내무과장, 단양군 기획실장, 단양군 월남참전 전우회 회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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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1945년 8월5일 충북 단양군 단양읍 현천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단양 경찰서의 말단 경찰 관리였다. 내가 태어나고 곧 광복이 됐지만 우리 집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아버지는 중학교를 2학년까지 마치고, 경찰에 들어가 최하급 직원이 됐다. 경찰은 식민지 치하의 젊은이가 선택한 직업의 하나였을 뿐이다. 광복이 됐다고 親日(친일)이고 뭐고 따질 대상이 되지 않았다.
 
  2년 후 여동생이 태어났다.
 
  내가 여섯 살 때 6·25 전쟁이 일어났다. 한국전쟁은 내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다. 경찰 가족인 우리는 북한군이 단양을 점령하면 제일 먼저 처형 대상이 될 사람들이었다. 누구도 얘기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 당시 열여덟 살이었던 삼촌과 함께 피란길에 올랐다. 여동생은 삼촌의 지게 위에 올라 앉았고, 나는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등에 번갈아 업히고, 가끔 걸었다.
 
  우리 가족이 竹嶺(죽령)을 넘을 때 멀리서 총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이 「죽령전투」를 시작으로, 9·28 서울 수복으로 고향 단양에 돌아올 때까지 많은 전투에 참여했다. 총탄이 다리를 관통하는 부상을 당했으나, 다행히 불구가 되지는 않았다. 아버지 바로 아래의 삼촌은 휴전회담 바로 전날(1953년 7월9일) 육군 7사단 중화기 소대장으로 전사했다. 계급은 당시 대위였다.
 
  내가 나중에 軍에 입대해서 7사단에서 근무했으니, 참으로 인연이다.
 
  우리 가족은 경북 安東(안동)을 거쳐서 대구에서 피란생활을 했다. 대구까지 보름쯤 걸어서 갔다. 어린 내가 다리가 아파서 안 가겠다고 하면,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경찰 가족은 잡히면 다 죽는다. 죽고싶으면 너 혼자서 여기 있으라』고 하며 겁을 주었다.
 
  석 달쯤의 대구 피란생활은 어렴풋이 기억난다. 모기가 많아 어린 내가 『아이, 따가워』, 『아이, 따가워』를 연발했나 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도 한참 동안 우리 집에서 내 별명이 『아이, 따가워』였다.
 
  피란갈 때 곡식을 좀 가져갔고, 부족한 것은 여기저기서 얻어 먹었다. 밀기울 보리 개떡을 주로 먹었다. 전쟁 와중에도 경찰 가족에게는 정부에서 조금씩 배급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arrow.gif닭똥 치우고, 토끼풀 뜯어서 어머니 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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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10월 초쯤 우리는 丹陽(단양)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우리를 맞아 주었다. 경찰은 北進(북진)을 하지 않고, 자신들의 관할 지역에 남아 치안을 유지했다. 그 후 아버지는 단양군內 이곳저곳 시골 지서의 지서장으로 일했다.
 
  나는 民選(민선) 군수로 두 번 출마해서 두 번 당선됐다.
 
  선거기간 동안 日帝(일제) 때에, 한국전쟁 기간 중에 혹은 그 이후에 아버지에게서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아버지의 陰德(음덕)을 입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다니느라 국민학교 1, 2학년은 어상천 범바우골에서, 3,4학년은 竹嶺 아래 가곡에서, 5,6학년은 단양 읍내의 학교를 다녔다.
 
  아버지가 경찰 공무원이었지만, 우리 집 생활은 굶주림을 겨우 면하는 수준이었다. 春窮期(춘궁기)에 밥굶기를 밥 먹듯이 해서 얼굴이 누렇게 뜨는 친구들에 비하면 나는 그래도 호강이었다.
 
  국민학교 5학년 무렵, 어머니가 양계장을 시작했다. 닭은 200~300마리쯤 키웠고, 토끼는 수십 마리 키웠다.
 
  양계장에서 닭똥을 치우고, 토끼가 먹을 풀을 뜯어 오는 것은 장남인 내 몫이었다. 국민학교 때, 중·고등학교 시절에 수업을 마치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도왔다. 어머니는 닭을 키워서 우리 육남매를 키웠다. 아버지는 집안 살림에 무심했다.
 
  내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닌 1950년대의 丹陽은 가난했다. 석회암 土質(토질)로 농경지가 적었던 丹陽의 궁핍함은 다른 지역보다 더 했다. 한 반에서 운동화를 신는 아이는 부잣집 아이 한두 명이었다. 이 아이들도 운동화를 손에 들고 오다가, 학교가 가까워지면 신었다. 아이들 대부분은 까만 고무신을 신었다.
 
  양은으로 된 도시락이 없어서, 사기 밥그릇에 밥을 싸 오는 친구들이 태반이었다. 김치는 좋은 반찬이었고, 된장이나 소금을 반찬으로 가져오는 친구들이 많았다. 어머니가 양계장을 했지만, 달걀 반찬을 싸간 적은 거의 없다.
 
  요즈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꽁치다. 일년에 한두 번 어머니가 약간 물이 간 꽁치에 소금간을 해서 구워 주면, 찬밥과 꽁치를 함께 먹었다. 그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중·고등학교 때 「월사금(수업료)」을 내지 못하면, 조회시간에 선생님이 불러내서 집으로 돌려보냈다. 집에 가서 『빨리 월사금 달라』고 울고불고했다. 아버지가 월급을 받고, 어머니가 양계장을 했지만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자식 서너 명의 학비를 제때에 맞춰 대기는 벅찼던 모양이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친구 중 30%쯤이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고, 중학교를 졸업하는 친구의 30%쯤이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은 극소수였다.
 
 
  arrow.gif韓日수교 협상 반대 데모로 除籍
 
  나는 단양工高를 졸업하고 1963년 봄 중앙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내 나이 열아홉 살이었다. 당시는 대학별로 입학시험을 치렀다. 16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입학했지만, 서울 자취생활은 힘들기만 했다.
 
  그 무렵 아버지가 경찰을 그만두고 탄광업을 시작했다. 탄광사업이 난관에 부닥치면서 家勢(가세)가 크게 기울었다. 내게 학비를 부쳐 주는 것만도 어머니에게는 벅찬 일이었다. 서울 흑석동 비탈길에서 자취생활을 하다가, 충북 괴산 출신 친구의 집에서 6개월간 더부살이를 했다. 공짜로 먹고 자고 했다. 시골 출신인 내가 입주 가정교사를 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나는 장터에 나온 촌닭이었다.
 
  1964년 3월 金鍾泌(김종필) 공화당 의장이 일본을 방문해 韓日 수교를 서두르자 대학가의 시위가 폭발했다. 당시 2학년이었던 나는 늘 데모대의 앞줄에 서서 구호를 외치고, 플래카드를 들고 다녔다. 경찰과 마주치면 치고받고 몸싸움을 벌이는 데 앞장섰다. 서울 아이들은 살살 잘 빠지는데 우리 같은 촌놈들은 우직하게 데모를 했다.
 
  1964년 봄, 나는 중앙大에서 열린 韓日회담 반대를 위한 토론회들에 발제자로 혹은 토론자로 참가했다. 숙명女大에서 열린 세미나에도 참석한 기억이 있다...



 배고픔과 배부름을 함께 맛본「축복받은 세대」는 이제 대한민국을 위한 마지막 봉사를 준비한다. 지나간 60년, 앞으로 60년. 이것을 우리의 시간으로 만들기 위하여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영원한 어린이」37만2000명은 다시 童心으로 돌아간다

해방둥이 특별취재반
金 演 光 月刊朝鮮 차장대우〈yeonkwang@chosun.com〉
李 根 美 자유기고가〈gosus@dreamwiz.com〉
李 相 姬 조사요원〈gwiwon27@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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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극동사령부 사진반이 찍은 6·25 전쟁 중의 어린이들.
  우리는 2005년에 해방 60년, 분단 60년을 맞는다. 王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국민을 주권자로 세운, 共和(공화) 憲政의 역사도 57년이라는 두터운 연륜을 갖게 된다.
 
  1945년에 태어나 2005년에 대한민국과 함께 환갑을 맞는 해방둥이들은 영원한 어린이다. 광복절이 되면 언론은 이들의 성장을 집중 조명했고, 해방둥이들은 사회의 귀여움 속에 자랐다. 해방둥이가 성숙하는 만큼 대한민국도 성숙해 가고 있다고, 기성세대들은 기뻐했다.
 
  2000년 인구·주택 센서스에 따르면, 1945년에 태어난 해방둥이는 약 37만2000명으로 추정된다. 남녀의 性比는 여자가 2000명쯤 많다. 해방둥이는 1944년 母胎에 자리를 잡았다. 일본 제국주의의 戰時 식민지 수탈이 극에 달했던 때다.
 
  징병제도가 1944년 실시돼 광복 때까지 약 20만 명의 남자들이 징집됐고, 이른바 학도 지원병 제도가 1943년에 실시돼 전문대생들이 전쟁터로 끌려갔다. 「징용」, 「보국대」, 「근로동원」, 「정신대」 등으로 끌려간 조선인은 113만 명 또는 146만 명으로 추계된다. 일본군의 性 노리개로 끌려간 한국 여성이 10만 명을 넘겼다는 보고도 있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1941년 무렵에 태어난 이들이 40만8000명, 1942년에 태어난 이들이 42만9000명, 1943년에 태어난 이들이 38만1000명이다. 1944년 무렵 출생자는 37만7000명으로 1945년생보다 5000명이 많다.
 
  이에 비해 「베이비 붐」 세대인 1955년 무렵 출생자는 73만8000명으로, 해방둥이의 두 배에 이른다.
 
  1945년 봄, 일본 본토의 식량 사정은 심각했다. 식민지 조선의 주민들 사정은 이보다 훨씬 나빴다.
 
  <(일본인들의) 식량은 하루 1200kcal의 개인 배급으로 줄었는데, 이것은 제 1차 세계대전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독일인들의 수준보다 낮았다.
 
  1945년 3월8일 도쿄에 대한 미국의 단 한 차례 공습에서 8만3000명이 죽었는데, 이것은 전쟁 全 기간을 통해 공습으로 죽은 모든 영국인들보다 2만 명이 많은 숫자다>(테일러 「제2차 세계대전」)
 
 
  arrow.gif굶주림을 아는 마지막 세대 풍요로움을 맛본 첫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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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둥이인 방송인 박찬숙씨는 『같은 해방둥이라도, 1945년 8월15일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은 「너희가 일본의 압제를 맛보기나 했어」라고 큰소리를 친다』고 했다. 하지만 통계수치는 모든 해방둥이들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일제 수탈의 아픔을 몸으로 겪었음을 보여 준다.
 
  해방둥이인 국회의원 李良熙(이양희)씨는 『두 형님보다 내 키가 10cm쯤 작다』며 『아버지와 숙부들의 키가 8척 장신인 걸 보면, 일제 말기의 식량사정 때문에 내 키가 이렇게 작은 것 같다』고 했다.
 
  가난과 굶주림은 해방둥이들의 공동 체험이었다. 해방둥이는 굶주림을 아는 마지막 세대이고, 풍요로움을 맛본 첫 번째 세대다. 해방둥이들은 『배가 그득할 때의 행복』을 너나없이 얘기했다. 그 시절을 얘기하는 그들의 얼굴에는 「이제 그런 시절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종이로 된 큰 드럼통에 가득 담긴 미국산 粉乳(분유)가 수십 개씩 국민학교로 왔다. 지금 생각하면 사람 먹는 우유는 아니고, 동물용이 아닌가 싶다. 학교 숙직실 앞에 큰 솥을 걸고 나무 막대기로 저어 가며 우유를 끓였다. 우유가 바닥에 눌어 붙어 우유 색깔이 누렇게 변해 갔다. 한 양동이씩 교실로 퍼 가지고 가서, 아이들 도시락 뚜껑에 담아 줬다. 1주일에 한 번쯤 선생님이 『빈 도시락을 가져오라』고 했다. 미군 「C 레이션」에 담긴 음식을 선생님이 아이들 도시락에 나눠 줬다. 칠면조, 쇠고기, 콩, 스파게티…. 별의별 음식을 다 먹어 봤다. 봉지에 담긴 쓴 커피를 아이들이 서로 먹으려고 다퉜다>(李良熙 국회의원)
 
 
  arrow.gif飢餓 탈출과 朴正熙
 
  「飢餓(기아)에서 탈출했다」는 것을 대한민국 60년의 가장 위대한 성취로 꼽는 해방둥이가 적지 않았다. 그 연장선상에서 해방둥이들은 朴正熙를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았다.
 
  朝鮮日報의 인물 DB에서 뽑은 55명의 해방둥이들을 상대로 전화 인터뷰를 했다. 이들은 대한민국 60년의 성취로 「경제성장」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경제성장」을 얘기한 이가 42명이었고, 「민주화」를 꼽은 이는 5명이었다. 해방둥이들은 『세 끼 밥을 굶지 않고, 내일의 끼니를 걱정하게 되지 않아도 되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굶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고 했다.
 
  베트남전 참전용사인 許萬善(칼럼니스트)씨는 고엽제 후유증을 겪고 있는 1급 상이용사다. 그는 『베트남전에서 한국이 경제성장의 돌파구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참전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1968년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납북되고, 이어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급습한 직후에 베트남에 파병됐다. 한국도 언제든지 전쟁터가 될 상황이었다. 베트남의 전장은 비참했다. 미국은 한국의 파병에 대한 보답으로, 브라운 각서(1966년 3월7일)를 통해 한국 기업과 노동자의 베트남內 경제활동을 보장했다. 각종 차관과 경제원조, 기술이전 확대로 한국 발전의 계기가 마련됐다. 우리가 베트남에 가지 않았다면, 미국은 이렇게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을 것이다>
 
 
  arrow.gif피로써 이룬 경제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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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李建杓(이건표) 단양군수는 『다섯 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7사단에 근무하던 중 맹호부대(수도사단)로 전출을 자원했다』며 『베트남에서 우리가 피를 흘렸기 때문에 미군이 한반도에서 우리를 지켜 준 것』이라고 말했다.
 
  55명의 해방둥이에게 「제일 좋아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었다. 예를 제시하지 않은 주관식 질문이었다.
 
  朴正熙 대통령을 꼽은 이가 11명이었고, 다음이 도산 安昌浩(안창호) 선생 5명, 백범 金九 선생이 4명, 이순신 장군이 3명, 李承晩 대통령과 세종대왕이 각 2명이었다. 외국인인 테레사 수녀를 꼽은 사람이 3명이었다.
 
  해방둥이는 고등학생으로 5·1...


Comments

이주석(82.02강원) 2011.09.13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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