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 승일교 박승일 대령의 최후 행방은?
칠성은

철원 승일교 박승일 대령의 최후 행방은?

손은석(97.05서울) 0 14,492 2010.10.25 18:06


서울에서 북으로 올라가면 한탄강 상류에 놓인
승일교라는
다리와 만나게 된다.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장흥리와 갈말읍을 있는 다리다.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다리는 남쪽 절반과 북쪽
절반의 디자인, 즉 생김생김이 다른 언바란스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img_58_251_2?1287472514.jpg
승일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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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승일교라는 다리 이름이 남쪽의 이승만 정부가
절반을 짓고
북쪽의 김일성 도당이 절반을 지어
승만의 승자와 일성의 일자를
따서 승일 교라는 이름이
주어졌다고 알려졌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자 승일교라는 이름은 6·25전쟁에서 평북
덕천 전투에서 전사한 박승일 연대장[대령]을
기린 이름이라는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승일교 다리 현장의 다리 설명이나 인접 승일 공원에도
전사한 박승일 대령을 기념해서 명명했다고 되어 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박승일 연대장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좀 알아가자 나는 꼭 같은 덕천 지역에서 비슷한 시기에
고근홍 대령이라는 분도 전사했음을 알았다.


고근홍 대령의 이름은 잘 알고 있었다.
다부동에서 북한군 3개 사단을 상대로 국군 1사단이 분전할 때
백선엽 사단장 지휘 하에서 김점곤, 김종갑 대령들과 함께
연대장으로서 격전중의 어려운 전황에서 부대를 지휘했던 분이다.


나는 다부동 전투에 관련된 여러 글을 자주 읽어서
이 분의 이름은 기억을 하고 있었다.


박승일 대령도 처음 접한 분이었다.
관심을 갖자
차츰 관련 정보들이 들어왔다.

고근홍 대령은 일본군 지원병 출신이고 박승일 대령은
만주군 출신으로서 둘 다 육사 1기 생이었다.
박대령은 함남 북청 출신으로 1920년 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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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 쪽에서 두 번째 카이젤 수염을 기른 분이 박승일 대령이다.
왼쪽에서 두 번째 별을 단 철모를 쓴 분이 7사단장 신상철 준장.

내가 유일하게 구할 수있는 그 분의 사진이다.

승일교가 있는 철원군에서 행정 경로를 밟아 성우회와
연락해서 육사 1기생 앨범을 구해 보면
박승일 연대장의 사진을 찾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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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박승일 대령이 덕천에서
고근홍 대령과 같은 시기에
전사한 것이 아니라
전투 후에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글을 볼 수가 있었다.


글을 쓴 분은 6·25전쟁때 한국군 총 참모장이었고
총리도 역임한 정일권 장군이었다.


그 분은 회고록에서 박승일 대령이 부하들과 함께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산악지대로 탈출해서 한동안
유격전을 했다는
사실을 말했다.


그 분은 박승일 대령이 유격전을 하다가 중공군에게 몇 겹으로
포위당한 뒤 무선으로 "중공군이 온산을 겹겹히 포위했다"라는
마지막 전문을 보내고 소식이 끊겼다고 썼다.


나는 그래서 박승일 대령이 상당한 세월 북한
북부
산악지대에서 유격 활동을 하다가 최후를
맞은 것으로 상상했었다.


그러면서 연대 급에 지급된 무선기가 어떻게 남한까지
교신이 되었는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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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을 넘어 북진하는 국군 3사단 장병들.
이때만 해도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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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여 년 전, 북한 문제에 관한 글도
많이 쓰고 책도 여러권 출판했던 이기봉 선생의
저서를 읽을 기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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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1월 덕천에서 작전중인 국군 7사단, 오른쪽의
무전기를 맨 병사가 이 기봉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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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은 국군 박승일 연대장의 7사단 5연대 소속
무전병으로 근무하다가 같은 덕천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포로가 된 뒤 평양 인근 순안 비행장 건설에
강제 동원되었다가 1951년 4월 초 탈출 했었다.

그러나 대동강을 건너다가 붙잡혀서
평양 사동 교화소에서 당분간 수감 생활을 했었다.

그러나 다시 탈출, 갖은 역경 끝에 그 해 5월 25일
임진강을 넘어 국군 1사단으로 귀대했다.

그는 그의 저서 제 5 전선- 장백산에서 임진강까지-
이라는 저서에서 포로가 된 박승일 연대장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사실을 전하고 있다.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 온 미군들 모습.
한 책자는 이들이 1951년 2월 중공군 4차 전역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하여 미군 전선으로 귀환한 미군들이
라고 되어 있으나 다른 책자에는 중공군이 석방한 미군
포로들이
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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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생은 포로가 된 직후 온 천지가 얼어 붙는 추운 날씨에
북으로 끌려 가면서 수많은 참혹한 장면을 목격을 했었다.


그는 북으로 끌려가는 도중 고근홍, 박승일 대령이
포로가 되어
북한군에게 넘겨졌다는 정보를 동료
포로들에게 들었다.


궁금해 하던 그는 우연히 포로가 된 박승일 대령을 목격했다.
이 선생은 자기의 자서전에서 그는 그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포로로 끌려 가서 아연 광산인 초산군 화풍 광산
얼음굴에서 고생하다가 다시 분류되어 이동하기 위해
광산 사무소 앞에 전 포로들이 집결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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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병들의 포로 인원 점검이 한참 진행되고 있는 도중이었다.
“야! 저기 7사단 5연대장 아녀?”


포로 중에 누가 이렇게 외치며 손을 들어 한 쪽을 가리켰다.
나는 귀가 번쩍 틔어 그 쪽을 바라봤다.


물론 나뿐이 아니라 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봐도
그는 분명히 박승일 대령이었다.


그러나 그의 몰골은 너무나 처참하였다.
그는 지난 날 [6·25전쟁]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에서부터
이른바
귀신 유격대 대대장 [당시 제 5사단 3연대의]으로서
발군의 전공을
세운 거구와 카이젤 수염으로 이름난
명 지휘관이었다.


그런데 이제 무운(武運)이 다 했단 말인가?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는 무척 인정 많고 부하를 친형제처럼 아끼던 지휘관이었다.
적병에게도 인자했다.


지난 날 중상을 입고 피를 철철 흘리는 북한군의 포로를
자기 지프에
싣고 의무대로 달리는 걸 보았고 때때로 최전방
초소에 나가 사병들과
산병호에서 비를 맞으며 밤을
지새우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나는 박 대령의 부대[국군 제 7사단 5연대]에 배속되어
낙동강 전선의 영천에서부터 여러 번 전투에 참가한 바 있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덕천에서 중공군 포위망에 빠져
함께 적중을
헤매다가 헤어지지 않았던가?


그 후 포로가 된 박 대령은 이 수용소 어딘가에 따로
감금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저만치 둔덕길 위에서 역시 국군의 고급장교
[연대장 또는 대대장급]로
짐작되는 수명의 다른 포로와 함께
소 달구지에 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박 대령의 얼굴에 그 인상적인
카이제르 수염이 안 보인다.
스스로 깎아 없애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그 쓰라린 심정이 오죽 했을까?


일반 포로들이 모여 서있는 광장 저만치 둔덕길 위에서
박 대령 일행을 태운 소달구지는 이내 구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주위는 착검한 총을 든 5-6명의 북한 병들이 따랐다.

“ 연대장님!”
포로 가운데 누군가가 이렇게 불쑥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박 대령은 달구지 위에서 머리에 쓰고 있던 방한모를
벗어
우리를 향하여 흔들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머리를 죄수처럼 박박 깎지 않았는가?
박 대령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계속 방한모를 흔든다 .

서글픈 듯한 미소를 띄우며---


“ 연대장님 !”

“ 박 대령님 !”

포로들의 목 메인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잇달아 일어난다.
박 대령은 달구지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두 팔을 쳐들어
포로들의 아우성에 응답을 했다.

“아, 아니! 이 동무들 덜 돼 먹질 않았구만잉 !
  닥치라우. 쌍 ---!”

북한 경비병들은 당황해서 포로들의 머리 위에 총대를
휘두르며
악을 썼다.


박 대령을 부르는 포로들의 아우성은 곧 잠잠해져 버렸고
박 대령과 그의 몇몇 고급장교 포로들을 태운 소달구지는
계속 계곡 아랫길로 사라져 버렸다.


어디로 압송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렇게 압송 당하고 있는 본인들도 물론 모르리라.
이것이 박승일 대령의 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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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봉 선생은 고근홍 대령의 신상도 전했다.

이 선생은 앞에서 말했듯 포로 수용소를 탈출했다가
다시 체포되어 평양 사동  교화소에 구속되었었다.


그는 이곳에 고근홍 대령이 갇혀 있었고 그가 수준 이하의
대접에 분노하여 격렬히 항의하자 교화소 경비자가 그를
구타했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img_58_251_0?1287472514.jpg

혜산진에 도달한 미 7사단 17연대 장병들이 두만강을
넘어 중국 땅을 바라보고 있다.

서부 전선이나 장진호 방면과 달리 이 방면에는
중공군이 투입되지 않아 한미 연합군은 비교적 쉬운 북진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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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연대장이 포로가 된 덕천 전투를 간단히 소개한다.
한국군의 7사단이 주축이고 6, 8사단이 구원군으로 나선
군단 병력이 중공군의 대병력에 두들겨 맞고
붕괴 된
덕천 전투는 1950년 11월 26, 27일 양일간에 걸쳐
평북 덕천에서
발생했었다.


중공군이 군우리와 운산에서 미군들과 한국군들을
격파해서 재미를 본 제 1차 전역에 이어 보급과 정비를
마치고
다시 공세를 시작한 2차 전역에서 7사단을 주축하는
국군의 3개 사단이
무참히 당한 것이다.


포위되었던 신 상철 7사단장은 상부의 명령에 의해
미 고문관과 함께 연락기 L-19로 탈출했다.

사단장도 포로가 될 가능성이 높았던 상황이라 장군을
포로로 넘겨줄 수 없다는 상부의 결정에 의한 지시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덕천에서 북창 방면으로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는 설이 유력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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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군 사령관 워커 중장[왼 쪽]과 24사단장
윌리엄 딘소장[오른 쪽].

그는 대전 전투후 35일간 헤매다가 포로가 되었다.
북한은 그가 포로가 된 사실을 1년 반이 지난
1951년 12월 18일까지 알리지 않았다.

북한은 그의 손가락 밑에 성냥개비 같은 뾰족한 것을
넣고 고문했었다.

체구가 당당했던 그가 돌아 올 때는 뼈만 앙상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그는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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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 사단의 국군 패잔병이 우글거리는 덕천의
텅빈 7 사단 CP에 모인
연대장들은 8사단 10연대의 고근홍 대령,
6사단 2연대의 김봉철 대령,
7사단 5연대의 박승일 대령,
7사단 8연대의 김용주 대령이었다.


이들은 선임인 고근홍 대령을 임시 총 대장으로 추대하고
돌파를 시도했다.

그러나 부대가 혼재 되어 와글거리는 상황에서 지휘할
병력조차
파악 할 수가 없었다.

김용주 대령과 김봉철 대령은 산을 타고 탈출했지만
그런대로 부대를
편성해서 밤까지 저항하던 고근홍, 박승일
두 연대장은 부대가 궤멸되고 포로가 되었다.

박승일 대령은 산위에 고립되어 겹겹으로 포위 된 뒤에
중공군의 거듭된
권고에 할 수없이 산을 내려와 투항했다고 하니
앞서 정일권 장군이
회상한 유격전은 이 짧은 전투가
와전되어서 그렇게 오해를 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덕천 전투에서 피해가 컸던 7사단 중에서도
박승일 대령의 5 연대는 거의 전멸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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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다.

나는 그 뒤에도 틈만 나면 두 연대장이 북한에 남긴 무슨 자취가
있을까하고 자료를 찾아 보았지만 그런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중국에 간 기회에 그 곳 연변 대학교 도서관에서도 자료를
찾아 보았는데
두 분의 자취는 없었고 좌익 월북자 강 태무
소령의 전후 행적만 부수적으로 수확할 수가 있었다.

이 자는 표무원 소령[지원병 출신]과 함께 군에 잠복하고
있었던 좌익이었는데 숙군의 초점이 자신들을 겨누자
지휘하던 대대를 이끌고 이북으로 넘어가서 국군 역사에
큰 오점을 남겼다.


알아보니 그 자는 전쟁이 끝날 무렵 동해안에 주둔한
북한군의
사단장이 되어 있었다.


더 찾아보니 세월을 흘쩍 넘어 1980년대 초, 노쇠한 강 태무가
자신에 의해 강제 월북한 부하들과 촬영한 사진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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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58_251_3?1287472514.jpg
포로가 된 흑인 구성 24연대의 병사들-
전투력에 문제가 있어 흑인 연대는 해체되었다.

중.북한은 유엔군 포로들을 국군들 보다는 비교적
나은 대우를 했다고 주장하지만 1951년 봄에 수용소에
창궐한 발진 티푸스로 절반이 사망했다.
이 기간 국군 포로가 당한 학대는 이루 표현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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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일 연대장은 물론이고 고근홍 연대장의 그 뒤
소식에 대해서
아무런 정보도 접할 수가 없었다.

이 글을 쓰기 전 두 분이 과연 전사 처리가 되었는지 알기위해
전쟁 기념관을 찾아가 전사자 명단을 검색하니 고근홍 대령은
덕천에서
사망 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단지 전사일이 덕천 전투가 있던 때보다 열흘 정도 빠르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박승일 대령이 전사자 명단에 보이지 않았다.
검색을 여러번 시도해봐도 발견할 수가 없어서 한가닥
기대감이
생겼다.

행여 내가 모르던 사연이 있어 박대령이
전사한 것이
아니라 생존해 있기 때문에 다르게 분류되지 않았나 하는
기대감이었다.

국군 전사자를 관리하는 국방부의 성기욱 사무관에게
긴급 부탁을 했다.


이런 것도 마치 국가 기밀인양 쉬쉬하던 인간들도 있었던지라
조바심이 났지만 이 국방부의 얼짱 사무관은 엘리트답게
이 주제의
중요성에 빠르게 관심을 가져 주었다.


그가 찾아낸 자료는 박승일 대령이 역시 덕천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고 했다.


실오라기 같은 기대가 사라지자 낙심천만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떻게 더 알아 볼 길은 없었다.

img_58_251_1?1287472514.jpg
승일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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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한탄강의 상류에 걸린 승일교는 흐르는 물에
묵묵히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 다리는 등록 문화재 26호로서 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북한 김일성 일당의 손아귀에 그 운명이 던져진 것을
마지막으로 보이
고 사라진 박승일 대령의 최후는 물론
고근홍 대령 두 분 최후의 진실이 어땠는지 정말 궁금하다.

북한과 교류가 있으면서 궁금했던 이광수 선생이나
조만식 선생의 마지막 모습들이 밝혀진 것처럼 북한에서
종적이 묘연해진 행방불명 국군중 제일 계급이 높았던
두 분 국군
장교들의 마지막도 밝혀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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