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파 유격대 백골 병단의 혈투 - 제 1 편
칠성은

북파 유격대 백골 병단의 혈투 - 제 1 편

손은석(97.05서울) 0 15,208 2009.12.07 14:15

북파 유격대, 백골 병단의 혈투.
                - 제 1 편 -


빨치산 출신 김일성은 대남 도발에서 유격전을 특히 중시하였다.

6.25 전부터 100명 -300명 규모의 강동 정치 학원 출신들을
주축으로
하는 유격대를 남한에  파견했었고 전쟁 중에도
남한 후방의
유격전을 선동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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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백골 병단 유격대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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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주변에서 활동하던 공비들만 최고 전성기에는
일만 명이 넘었었다.

김일성은 유격전에 의한 남한 적화의 헛된 꿈을 1968년

울진 삼척 지역으로 120여명의 무장 공비들을 파견해서

거의 다 죽게 만든 망동 때 까지도 버리지를 않았다.


북한의 유격대 남파가 활발했던 대신[ 영등포 학원이니

수색 학원등이 있었지만] 전쟁 전 남에서 북에 보낸 유격대는

정보 수집 수준 임무의 극 소수였다.

실제로 개마고원 유격대 같은 자생 유격대도 있었으나 남한의

유격 활동은 매우 저조했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고 6개월 뒤에 남에서 북으로

대규모의 유격대를 파견한 일이 있었다.


백골 병단이다.

병력이 무려 600여명이 넘는 백골 병단의 지휘관은 후에 주월

한국군 사령관으로 유명했던 채 명신 장군이었다.

그는 중령으로 이 유격대를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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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명신 백골병단 사령관은 소대장, 중대장까지
공비 소탕전을 했었고
북진했던 6사단 대대장으로서 중공군의
기습에 산산 조각이 났을 때도
부하 두 명과 여러 사선을
넘고 넘어 탈출해서 구사일생으로 황해도와
강화도를 거쳐
충남 당진 석문항으로 살아 돌아 온 유격전의 풍부한 경험자였다.


다시 말하면 유격전에 관해서 여러 가지로 박학했고 경험도 많아

가히 유격전의 명수라 할 전문가였다.


채 명신 장군이 적진 속으로 지휘하고 들어갔던 백골 병단의
활약은
그 분을 유격전의 전문가로 군내에 인정받게 만들었다.


월남전이 격화 되면서 맹호 부대를 파견할 때 이구 동성의
군 추천에 의해서 박 대통령은
 그를 맹호 부대장으로 지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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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월 사령관 시절의 채ㅤㅁㅕㅁ신 장군.
그가 육군 중령으로서 백골 병단을 지휘할 때
나이가 스물 여섯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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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유격대는 징집된 민간인들로 급조한, 말이 안 되는

집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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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골 병단 결사 13연대원들이 귀환후 강릉에서 촬영한 사진.
이 사진은 글을 본 브라질 교포 이 동철님이 보내주신
전 백골 병단 13연대원이었던 아버님의 사진이다.

아버님 군에 다시 투신, 켈로 부대 요원을 거쳐
월남전까지 참전했었다.

이 13연대는 남하중이던 북한군 빨치산 사령관
길 원팔 중장을 잡아서 처단한 부대다 .

결사 13연대의 투입된 124명의 병력중 단지 58명만
살아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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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믿어지지가 않는 것은 이들 북한 파견 유격대원들이

명색이 정보학교라는 대구 7훈련소에서 받은 훈련은
단 3주간이었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제식 훈련이나 겨우 끝난 논산 훈련소
훈병들을
북파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육군 본부입장에서 유격대원들이 살아 돌아오리라는

기대는 아주 작았기에 소모품으로 생각하고 되는대로 적진에 
투입한
이들 백골 병단 유격대원은 2개월의 악전고투를 하면서
단지 절반만
생환하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상상외의 전과를
거두었다.


백골 병단의 탄생에 관한 배경과 개략전인 작전 경과를
먼저 소개 하고
병단의 최대 전과라 할 수 있는 남파 유격대장
길 원팔 북한군 중장
체포 처단기를 병단의 전투 사례로서
소개한다.


그리고 이 글은 채명신 장군의 자서전 ' 사선을 넘고 넘어'
와 백골병단 결사 11연대 작전참모였던 전인식 선생이
썼던 '적진 800리의 혈투'를 참조했슴을 미리 밝혀둔다.


이야기는 유엔군이 중공군의 공세에 몰려 서울을 내놓고
철수했던
1951년 1.4 후퇴 전으로 올라간다.


미 8군의 정보국은 전부터 한국 육군 본부 정보국에게 남한에는

북한 빨치산들이 우글거리는데 왜 당신들은 북한에 같은 꼭 같이

게릴라 부대를 보내서 운용할 줄을 모르느냐고 채근해왔다.


모든 것을 미군에게 꽉 잡혀있던 국군에서야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업무는 육본 정보국에 떨어졌고 정보국 장교 중 

이 극성 중령이 지휘 하도록 지명되었다.


이래서 북파 유격대가 번갯불에 콩 구어 먹듯 조직되어서

북으로 파견되었다.

말로만 연대라는 부대명이 붙은 결사 11연대, 결사 12연대,

그리고 13연대의 3개 연대로 구성되어 있다.

각대 인원은 11연대가 378명, 12연대가 170명,
13연대가 124명이다.

총 600명이 넘는 대부대였다.


구성을 보면 게릴라전의 기본도 모르는 대 병력 편성이었다.]

유격전은 분대, 또는 소대 규모로서 광 면적에 다발적으로
투입해야
하는 것으로서 병단 사령관이었던 채 명신 장군도
이 엉터리 발상을
비난했다.

[이는 역시 게릴라 전의 전문가가 없던 미 8군 정보국의
 주먹구구식
부탁을 육본이 들어 준 것이 아닌가 한다.]


상식으로 생각 안 되는 것은 이들이 거의 대부분 자의 또는
타의로
군에 모집된, 장정들이었다는 것이다.


추진자 이 극성 중령은 전방에서 병력을 뽑아오기도 힘들고,
그럴 병력도
후방에 없어서 훈련소에 입소한 장정 중에서
북으로 보낼 유격대원들을
차출했다.


[600여명의 생명이 걸린 중대한 이 업무를 적어도 참모총장
정도의
힘 있는 사람이 진두지휘 한 것이 아니라 육본이
별다른 힘도 없는
영관 장교에게 네가 다 알아서 추진하라고 
떠맡긴 인상이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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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사 12연대의 환송식에서 사열중인 정일권 총장.
바로 옆은 미군 정보국의 하우스만 중령이다.
한국군내에 넓은 인맥이 있었고 이 인맥때문에
은퇴할 때까지 한국에 근무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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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중에 대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나 의용 경찰 출신등을
학력을 기준으로 장교로 임관하고 나머지를 사병으로 편성했다.


11연대장은 병단 사령관이었던 채 중령이 직접 지휘했지만
12연대나 13연대는 역시 신병 중에서 선발한 사람이 임명되었다


연대장이니 대대장이니 하는 직책도 유격전에 대해서는 이들
사병들과
다를 바 없는 장교들에게 주어졌다.


이들 장교 계급은 백골 병단이 극적으로 생환 한 뒤에
없던 일로
부정 당하는 어이없는 엉터리였다.

어차피 죽으러 가는 인간들에게 인심이나 쓰자는 것으로 보인다.

북에서 극적으로 살아 돌아온 채 명신 중령이 유격대 편성에
도움말을
주기위해서 초빙 되었다가 차마 이런 아마추어 부대를
그냥 사지로 보낼 수 없어서 대장 직을 맡았다고 그의 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에서
회고했다.


백골 병단이라는 유명한 유격대 명칭은 따로 북파 되었던 연대가

적 후방 퇴곡리에서 에서 조우해서 함께 휴식하던 1951년 2월 21일 

세 연대를 통합 지휘하던 채 명신 중령이 명명한 것으로서 지금도

존재하는 3사단 18연대의 별칭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지금의 백골 부대 명칭은 한 신 장군이 연대장이 되면서
명명한 것이다.


유격대에게 부산 피복창에서 만든 북한군 누비옷 군복을 입고

무기도 아식 보총과 따발총등을 지급받았다.

식량이라고는 단지 2주 분의 미숫가루가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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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격대에게 지급된 소제 따발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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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들도 다 들고 내려오는 무전기도 구하기가 힘들어 겨우

두 대만 전 부대에 지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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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식 보총 -모신 나강 소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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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단에 주어진 임무는 산악이 많은 동부 전선에 적 부대 후방

에 침투하여 유격전을 하며 적 대부대를 교란하라는 것이다.


무책임한 군부대의 관료주의와 무지함이 죽음으로 내몬 이
결사부대는
한국군이 중공군의 침공으로 남쪽으로 내몰렸다가
다시 반격에 오른
2007년 2월1일 당시 최 전선이었던
강원도 영월에서부터 적진으로 침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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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열하는 군단장 김 백일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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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사 11연대가 먼저 침투하고 일주일 뒤 결사 12연대가 침투했다.

그리고 며칠의 날짜를 두고 결사 13연대가 투입되었다.


전방에는 북한군 2개 군단 병력, 즉 잔인한 최 현 중장의 군단과

105전차 여단을 지휘하고 서울을 점령했던 유 경수가  지휘하는

군단의 대병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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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경수에 대한 김일성의 총애가 남달라서 궁금했는데

전 인식 선생의 저서에서 이 자가 김일성의 동서라는 것을

밝혀 놓아서 수긍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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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군단 병력의 북한군 배후를 600여명의 아마투어 부대가

몰래 파고 든 것이다.


유격대는 북진하는 국군 -수도 사단과 3사단-의
전방 수색대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기도 했지만 적 전방
2-30키로의 후방, 때로는 50키로
후방에서 작전을 했었다.


백골 병단이 활약한 곳은 말했듯 지금 강원도 북방 산악지대이다.

유격대는 필설로 못하는 고통을 겪었다.

강원도 산간에 몰아친 혹한도 북한군 못지않은 적이었고

만성적인 식량부족도 부대의 존속을 우려하게 할 만큼의
공포꺼리였다.

더구나 피아 안 가리고 적전선 후방에 퍼부어대는
미 해군 함재기의
폭격 역시 공포스런 적이었다.

당시 미 항공모함 부대가 동해안에서 작전중이어서 강원도

동부의 항공 작전은 이 항모 부대 관할이었다.

함재기의 오폭은 세 차례나 있어서 수십 명의

유격대원들이 저 세상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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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골 병단에게 집요한 폭격을 가하던 미 해군
스카이 레이다 공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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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투 후 최초의 유격대 사상자도

북한군이 아니라 함재기의 오폭이었다


그러나 부대는 곧 도저히 아마추어 부대라고 보기 힘든
전과를
올리기 시작한다.

결사대는 분산된 적 소 부대를 기습해서 전멸시키기도 하고
지역의
악질 빨갱이들이나 공산당 추종자들을 차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도처에 간이 검문소를 설치해놓고 내왕하는 적군을
잡아 처치했다.

유격대에 걸려든 북한군 중에 북한군 군관들도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여자 군관이었다.


적에 관한 귀중한 정보들을 획득해서 후방으로 급송해서

미 공군 공습목표나 군 작전의 중요한 자료가 되게 하기도 했다.


최 현 군단의 위치를 알아내서 이를 급습하고자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위치를 확인하고 기습을 시도하다가 너무 경계가
삼엄해서
중도에 단념했으나 적 군단의 위치를 후방에 통보하여
공습을 가하게 했다.


특히 포로가 된 북한군 대위에게서 동해안 방어를 맡은 
독립 여단인
적 69여단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알아내서 
북진하던
수도 사단에게 이 부대가 섬멸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아마추어 유격대가 거둔 최대의 전과는 1951년 3월 17일

강원도 깊은 산골 군량밭에서 김 일성이 직접지시해서 남파하던

북한 남파 유격대 제 5지대장 길 원팔 과 그 참모장
강 칠성 대좌를
잡아서 중요한 정보를 빼내고 처단한 것이다.


길 원팔의 중요한 위치는 그가 적어도 전쟁 발발 무렵에는
유명한 남부군의 총 사령관 이 현상
동격이라는 사실에서
알 수가 있다.
[그러나 1950년 말  훨씬 연장자인
이 현상이 남한 빨치산들의 총 사령관으로 임명된다.]


백골병단 결사 11연대 작전 참모였던 전 인식 선생이 쓴 저서에서

길 원팔의 체포와 처형 과정을 모두 발췌해서 정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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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골 병단은 3월 16일 군량밭이라는 지역으로 진출하고 이 지역을

점령하고 주민 아무도 탈출하지 않도록 단단히 봉쇄하였다.


다음날 3월 17일

결사 제 13연대 수색 정찰 요원과 식량 조달 요원들은 먼저
서쪽 마을을
정찰한 뒤 동쪽 마을로 들어 왔는데 부락 외딴 집에
보초 같은
한 놈이 서성대고 있는 것을 목격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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