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업체 제치고 살기좋은 아파트 大賞 받은 이광래 우미건설 회장
칠성은

대형업체 제치고 살기좋은 아파트 大賞 받은 이광래 우미건설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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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업체 제치고 살기좋은 아파트 大賞 받은 이광래 우미건설 회장
주택명가 쌓아올린 힘은 `몰입과 집중`
입주민 칭찬이 나의 성공… 법정스님 책과 명상 즐겨

◆ CEO & CEO ◆



이 보소, 사실을 제대로 쓰고 평가하는 것이 신문의 역할 아닌가. 우미건설이 짓는 아파트도 있는 그대로 봐 달라는 것이지, 억지로 칭찬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아. 다만 중개업소에서 우미 아파트는 웃돈이 더 붙는다는 말이 돌고, 입주자들도 만족하고, 내게 고맙다는 이메일을 보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사실 이번에 매일경제신문에서 살기 좋은 아파트 대상을 받은 동탄 아파트는 내 개인적인 만족도로 따지면 70% 정도야. 앞으로 나오는 김포 한강, 영종도, 양주 고읍 단지를 보면 우미건설이 최고 아파트를 짓고 있다는 말을 절로 할 것이야.

인터뷰를 하기 위해 자리에 앉자마자 이광래 우미건설 회장(77)은 아파트 얘기부터 꺼냈다. 목소리가 얼마나 거침없고 우렁찬지 사업을 처음 시작하는 40대 젊은 사업가에게서나 나올 법한 패기가 느껴졌다.

2~3년 전만 해도 입주자들이 아파트를 선택하는 기준으로 가구 설계와 인테리어 등 내부 요인에 관심이 집중돼 있었지만 지금은 조경과 조망권, 단지 구성 편의시설, 건물 외형, 경관 조명과 같은 외부 디자인이 더 중요해지고 있는데 이런 부문에서 우미건설이 짓는 `우미 린`을 따를 업체가 없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자부심이 넘쳤다.

"평면 구성부터 단지 설계, 조경까지 주택에 대한 모든 것을 아는 최고경영자는 드물 거야. 30년 이상 주택사업을 하면서 `몰입과 집중`을 했거든. 그래서 모든 과정과 내용을 알게 된 것이지. 이런 경험과 노하우가 `우미 린`에 스며 있는 것이지."

지금은 주택건설에 자신감을 보이고 있지만 이 회장은 출발이 매우 늦었다.

1934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난 이 회장은 어린 시절 부친을 잃고 외갓집에서 동생들과 어렵게 자랐다.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겠다는 결심으로 서울에 올라왔다. 남대문시장 등에서 여러 가지 힘든 일을 하며 돈을 벌었지만 대학 입학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길이 군대였다. 그는 갑종장교 시험에 합격한 뒤 주베트남 한국군사사령부, 제2군사령부, 보병 7사단에서 경리장교 등으로 18년간 생활했다. 그리고 1973년 소령으로 예편한 뒤 사업에 뛰어들었다. 40대 나이에 사업을 시작한 셈이다. `늦깎이` 사업가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고향 친구와 서울에서 회로기판 사업을 시작했다가 실패해 퇴직금 180만원 중 150만원을 날렸다.

이런 시련 끝에 그가 본인 잠재력과 비전을 본 것은 주택사업이었다. 1975년 처음 단독주택 사업을 하면서 재미를 느꼈고 그래서 `몰입과 집중`이 가능했다.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부단히 노력했지. 공동주택이 대세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1982년 연립주택시장에 진출했어. `주식회사 우미`(우미건설 전신)를 세우고 아파트를 처음 지은 것이 1986년, 내 나이 54세였지. 당시 아파트 사업을 하는 건설사 사장 중 나이가 가장 많았어."

이 회장은 회사 설립 후 광주시 봉선동에 380가구 임대아파트 건설을 시작으로 10여 년간 성공적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하지만 1995년 최대 위기를 맞는다. 삼풍백화점 붕괴로 부실 시공에 대해 민감해 있던 시기에 광주에서 우미가 건립한 한 아파트 지반이 침하되고 있다는 문제가 제기됐다. 설상가상으로 무등건설 등 연대보증을 섰던 4개 건설사가 부도나 이를 책임져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 회장은 이 시기를 회상하며 "정말 힘들었다"고 짧게 말했지만 얼굴에는 만감이 교차했다.

그러나 힘든 시절을 넘긴 뒤 우미건설은 도약 기회를 잡는다. 1997년과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다. 남들이 모두 몸을 움츠릴 때 과감한 투자로 엄청난 수익을 올렸고 이때 축적했던 자금은 전국적인 건설사로 도약하는 발판이 됐다.

"광주 서구 풍암지구에서 1200가구 공공 임대아파트 공사를 막 시작했을 때 외환위기가 왔어.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공사를 했고 100% 분양을 끝냈지. 외환위기 직후에는 목포에 주택이 부족할 것이라는 분석을 한 뒤 택지 2필지를 공급받아 1500가구를 건립해 큰 성공을 거뒀지."

이 회장에게 2002년은 잊을 수 없는 해다. 사업 본거지를 광주에서 수도권인 수원으로 옮겼다. 이때 신입사원과 막 결혼한 사람 몇 명을 빼고 직원 100여 명 대부분이 이 회장을 따라 수원으로 올라왔다.

"지금도 직원들 정신교육을 할 때 강조하는 것이 `수처작주(隨處作主)야. 어느 곳에서나 주인처럼 일하라는 것이지. 주인의식으로 무장된 우리 직원들 정신력은 어떤 대기업도 따라올 수 없어."

현재 이 회장이 `몰입과 집중`을 하는 분야는 수도권 택지에서 `우미 린`을 랜드마크 단지로 만드는 일이다. 동탄에 이어 김포와 영종도, 남양주 별내, 양주 고읍에서 아파트가 완공되면 그의 꿈과 도전은 현실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수도권 단지들이 준공되면 우미는 최고 전문 주택업체로 평가를 받을 거요. 대기업 대비 70% 비용으로 건립해도 입주민 만족도는 최고가 될 테니까."

우미건설은 건설업계에서 자금 사정이 가장 좋은 회사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 이유는 이 회장이 도입한 독특한 회계시스템 덕분이다. 이 회장은 "분기별로 3년 계획을 수립하는 회사는 있지만 월 단위로 3년간 자금 계획을 짜는 곳은 없다"며 "주택사업이 착공에서 완공까지 2~3년 걸리기 때문에 3년 자금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런 회계시스템으로 우미는 IMF 등 유동성 위기를 잘 극복했다. 그 결과 건설업계 도급순위는 57위(작년 매출 7400억원)에 불과하지만 작년 말 기준으로 부채비율 66.8%, 여유자금 1780억원 등으로 재무 건전성을 자랑한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법정 스님 책을 읽으며 명상과 요가, 걷기로 건강을 관리한다는 이 회장은 "정도경영과 투명경영을 실천하며 조직원 호응을 얻어내고 `우미 린`에 입주한 분이 주거생활에 만족감을 느끼고 칭찬해 주는 것이 곧 나의 성공"이라고 강조했다.

■ He is

△1934년 전남 강진 출생 △1965년 홍익대 경제학과 졸업 △1973년 육군 소령 예편 △1973년 동광써키드 대표이사 △1975년 주택사업 시작 △1987년 우미건설 대표이사 △1992년 우미건설 회장

[장박원 기자 / 사진 = 김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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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리장교 출신이시라네요.

Comments

이주석(82.02강원) 2009.09.02 07:23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맞습니다, 주인 의식 바로 초심 입니다.
나도 언제인가는 이 회장님 처럼 될수 있을까.
김철민(85.03경북) 2009.09.03 12:12
칠성인과  무슨 관련?
민경철(88.11충북) 2009.09.04 15:58
사단에서 경리장교로 근무하다 예편하셨다는것 같습니다.
손은석(97.05서울) 2009.09.07 13:04
칠성부대 경리장교 출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김철민(85.03경북) 2009.09.08 17:22
아~ 네. 이렇게 센스가 무딥니다.  역시 칠성인의 저력을 보여 주는군요.
칠성인 화이팅
이 나라 이 민족 각계 각층에서 활발한 영향력을 더욱 소망합니다.
유도영(05.07서울) 2009.09.16 12:15
칠성선배님 자랑스럽습니다!
정유광(03.10경기) 2009.12.02 17:04
부대가 훌륭하다보니..
훌륭한선배님들이 많으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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