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이천우 이등중사는 1950년 9월 초 형이 입대한 지 한 달 만에 홀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원입대해 서울 수복을 비롯해 평양탈환작전ㆍ개천∼덕천전투ㆍ하진부리전투 등에 투입, 나라를 위해 용감히 싸웠다. 그리고 51년 9월 25일 백석산 탈환을 앞두고 무명 901고지 부근 능선에서 그만 안타깝게 전사했다. 당시 전사와 기록을 토대로 이 이등중사의 전사 모습을 재구성했다. 편집자
오후 내내 내린 비는 초저녁 무렵에야 그쳤다. 그래서인지 더욱 밤 공기가 차갑고 하늘의 별들이 유달리 빛났다. 멀리 인접 연대지역에서 포음만 간간이 들릴 뿐 얼마 전까지 요란했던 대대(3연대 3대대)의 선두 공격부대인 11중대 지역의 포소리도 이제는 잦아들어 고요함이 고지 주변을 감돈다.
미처 마르지 않은 군복 때문에 뼛속까지 밀려오는 추위를 참아가며 참호 속에서 전방을 주시하던 이 하사(현 상병)는 자신이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생각에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비에 젖은 건빵을 꺼내 먹으려는 순간, 전방 중대 지역에서 섬광과 함께 포소리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주야간 전투에 지칠 대로 지친 소대원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잠시 벗은 철모를 다시 쓰고 소총을 들었다. 11중대가 주간에 점령한 890고지 일대에 적의 야간 역습이 개시된 것이다.
잠시 후, 적들의 포탄은 이 하사가 속한 9중대 지역인 901고지 일대까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하사는 직감으로 바로 옆 3소대 참호에 직격탄이 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아마도 몇 사람의 전우가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오늘 낮 전투에서만 12명의 중대원이 전사했다. 이제 소대에 그와 함께 북진에 참가했던 전우는 불과 10여 명밖에 남지 않았다. 매일 접하는 죽음들….
백석산 점령 위해 반드시 탈취
지난해 9월 입대 이래 치른 수많은 전투에서 담배연기처럼 사라져 간 전우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하루하루 스스로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러나 그는 비록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한 번도 비겁해 본 적이 없었다. 함께했던 전우들을 대신해야만 한다는 스스로의 각오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이맘때 집을 떠나올 때 마을 입구까지 따라 오면서 눈물 흘리시던 어머니는 잘 계신지…. 한 달 먼저 입대해 1사단에 배치된 형님은 무사한지 몹시 궁금했다. 지난해 10월 평양탈환전투 때 1사단이 입성했다는 소식에 행여 형님을 만날 수 있을까 막연히 기대했었는데.
이런저런 생각에 어느새 아침이 밝았다. 공격을 재개한 11중대를 후속해 890고지를 거쳐 950고지에 다다른 오전 11시쯤, 9중대에 11중대를 추월해 공격 선봉에 서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오후 12시 15분, 이 하사를 포함한 중대원들은 일제히 산개해 미 9연대 공격목표인 1024고지 서측방 또다른 무명 890고지를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 고지는 백석산 점령을 위해 발판을 제공하는 중요한 지형으로 반드시 탈취해야 할 곳이었다.
중대의 공격을 지원하는 아군의 포격이 함께 시작됐다. 이 하사는 불안해하는 신병을 독려해 가며 전진을 계속하던 중 소대의 전진을 저지하던 적 기관총 진지에 봉착했다.
고지 정상에 적 시체만 즐비
빗발치는 적의 포탄 속을 뚫고 목표 정상 부근에 접근한 9중대 용사들은 소대장의 신호에 따라 수류탄 투척과 동시에 일제히 함성과 함께 적진으로 돌입했다.
이윽고 올라간 고지 정상에는 적의 시체만 즐비할 뿐, 몇 안 되는 패잔병만이 북쪽으로 도주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바로 전 우측 1024고지가 미 9연대에 의해 점령됨에 따라 아군의 협공을 우려한 나머지 전의를 상실한 적 주력은 이미 백석산 방향으로 퇴각한 것이다.
목표탈취 후 잔적 소탕을 위해 조별로 분산해 고지 주변을 수색하던 중 이 하사는 15m 앞 참호 한 구석, 적군 시체 속에서 뭔가의 움직임을 느끼고 그쪽을 향해 몇 발 사격을 했다. 순간 누군가가 공포에 질린 채 손을 번쩍 들었다. 미처 도주하지 못한 17세가량의 앳된 북한군 병사였다.
중대본부에 포로를 인계하고 소대로 향하는 이 하사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포로를 잡았다는 기쁨보다 중대본부 하사관들의 대화 중에 3일 후 사단이 재편성을 위해 후방으로 이동할 거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8월 초, 이 전선에 투입된 이래 근 2개월 동안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7사단은 전투력이 60%에 지나지 않았고, 장기간 전투로 인해 피로에 젖은 터라 휴식과 정비를 통한 전투력 회복이 절실한 때였다.
이 기쁜 소식을 소대원들에게 전하려는 생각에 이 하사의 발걸음은 빨라졌다. 작은 언덕을 넘는 순간 울려 퍼진 몇 발의 총소리. 불과 40여m 전방 바위 틈에 숨어 있던 잔류 적병이 쏜 총탄에 그의 가슴이 관통된 것이다.
쓰러진 이 하사는 이내 의식이 몽롱해졌다. 고향 마을의 전경과 어머니의 모습이 잠시 스쳤다.
해는 벌써 서산을 넘어가고 있었고, 주변은 그가 흘린 피로 검붉게 물들었다.
51년 9월 25일, 지는 해와 함께 20세 어린 또 하나의 꽃잎이 떨어진 것이다. 그로부터 이틀 후 이 하사가 속한 7사단은 8사단에 전선을 인계하고 후방으로 이동, 정비 및 재편성에 들어갔다.
백석산 전투는 6ㆍ25전쟁 중 대표적인 산악전투로, 51년 7월께 정전회담이 군사분계선 분할문제로 답보상태에 빠져든 상황에서 51년 8월 중순부터 10월 하순에 양구 북쪽 백석산(1142m) 일대에서 국군 7ㆍ8사단과 북한군 12ㆍ32사단이 백석산에서 벌인 공방전이다. 국군7사단이 주 목표인 백석산 공격에 필요한 전초전 성격의 전투를 통해 주변고지를 점령한 다음 본격적인 공격전투(1차)는 9월 24일부터 27일까지 이뤄졌다. 이어 2차 전투에서 8사단과 미2사단의 협조된 공격으로 백석산은 물론 그 북쪽 어은산(백석산 북방 10km, 현 휴전선 이북)까지 국군이 진출함으로써 정전이 될 때까지 이 지역의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