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순 앞둔 6.25 국가유공자 곽훈섭씨

구순 앞둔 6.25 국가유공자 곽훈섭씨

1928년 ㄱ당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 곽동영 선생.
▲  1928년 ㄱ당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 곽동영 선생.
ⓒ 곽훈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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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는 빨갱이가 아니라 독립운동가입니다."

독립운동가 곽동영 선생의 아들 곽훈섭(89)씨는 해마다 광복절이 다가오면 아버지를 잊지 못한다. 대구에서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ㄱ당'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이지만 월북했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포상 대상자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오마이뉴스>와 만난 곽훈섭씨는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019년 3.1절 100주년 기념사에서 '친일잔재 청산에 대해 친일은 반성해야 할 일이고 독립운동은 예우 받아야 할 일이라는 가장 단순한 가치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했다"며 "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이고 평화주의자였다. 아버지의 명예가 꼭 회복됐으면 한다"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분단의 희생양이다. 북한에 가서 어떠한 역할도 맡지 않고 살다가 돌아가셨다"며 "죽기 전에 아버지의 명예를 꼭 회복하고 싶다. 국가가 나서 달라"고 말했다. 

독립운동자금 확보하려다 경찰에 붙잡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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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10월 대구 달성군에서 태어난 곽동영 선생은 1919년 3.1만세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후 신간회와 의열단에서 활동하면서 1928년 6월 독립 무장단체인 'ㄱ당'에 가입해 대구와 달성군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전개하다 일본경찰에 발각돼 고초를 겪었다.

'ㄱ당은 1928년 4월 신간회 대구지회의 노차갑, 장택원, 정대종 등이 신간회나 근우회에서 야학이나 강연회 같은 수단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해 직접적인 무장 투쟁 방식으로 독립을 쟁취하려 만든 비밀 결사체다.

이들은 그해 5월 20일 달성공원 숲속에 모여 당시 관헌의 이목을 피하고 한글 자음의 첫째로 한국의 바탕을 뜻하는 의미로 'ㄱ당'이라고 이름을 정했다. 'ㄱ당'은 중국 광동의 군관학교에 청년들을 유학시키고 만주 방면에 미간지를 개간하며 실력을 양성해 독립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곽동영 선생은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1928년 6월 11일 노차갑과 함께 야간에 대구의 부호 김교식의 집에 몰래 들어가 권총으로 위협하면서 잡지 발행 비용이라는 명목으로 5000원의 약속어음을 적게 했다. 김교식은 도장을 숙부가 가지고 있어 당장 어음을 줄 수 없다며 후일 등기우편으로 보낼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정보를 입수한 대구 경찰서의 경찰에 의해 곽동영과 노차갑을 비롯한 조직원들이 체포되면서 ㄱ당은 해체되고 말았다. 이때 곽동영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돼 2달간 옥고를 치른 후 8월 2일 형집행정지 선고를 받고 풀려난다.

곽동영과 함께 김교식의 집에 들어갔던 노차갑은 1928년 12월 2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공소했지만 1929년 6월 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됐다.
  
중외일보 1928년 7월 20일자 신문, 대구에서 발생한 ㄱ당 사건에 대해
▲  중외일보 1928년 7월 20일자 신문, 대구에서 발생한 ㄱ당 사건에 대해 "물증 전무의 대구사건, 경찰은 공연히 초조중. 위선 육 명은 구류 처분"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 국사편찬위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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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동영이 빨리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은 일제하 매국 7적의 한 사람으로 불리던 박중양의 도움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곽동영의 아버지 곽태순은 박중양과 친분이 두터워 선처를 부탁했다.

이후 여러 차례 경찰에 체포되거나 예비검속으로 구속되기도 했지만 박중양의 도움을 받아 출소를 반복한다. 그러다 달성군 유가면에서 양조장을 운영하며 일제의 감시를 피해 여러 차례 만주를 방문하고 의열단 등 독립운동세력과 연락을 취하며 군자금을 지원했다.

곽동영은 만주에 체류하던 중 의열단을 이끌던 김원봉과 같은 경남 밀양이 고향인 김혜숙을 만나게 된다. 김혜숙은 만주에서 식당을 운영하며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면서 김원봉을 지원하고 있었다. 곽동영은 김혜숙과 함께 대구로 돌아와 1945년 독립이 될 때까지 김원봉 등에게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게 된다.

해방 후 건준위 참여, 6.25 때 월북... 자식들은 서로 총부리를 겨눴다

해방 이후 몽양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건준) 결성에 참여하게 된 곽동영은 해방 조국의 앞날을 위해 활발한 정치활동을 하기도 했으나 의열단, 인민공화당 계열로 분류되면서 좌·우익 이념갈등이 치열해지자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곽동영은 김혜숙과 함께 서울로 옮겨가면서 첫째 아들 기섭과 넷째 아들 규섭을 데리고 간다. 곽동영의 장남인 곽기섭은 대구공고 토목과를 졸업하고 경북도청에 근무했으나 좌익 성향의 활동으로 인해 서울로 피신하게 됐고 4남인 규섭은 경복중학교에 입학하게 됐기 때문이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고 북한군이 남한으로 내려오면서 곽동영은 항일운동을 같이 했던 옛 동지들을 만났다. 그러다 국군이 다시 서울을 수복하자 동지들을 따라 북한으로 넘어가게 된다.

곽동영의 셋째 아들 훈섭씨는 "아버지가 북한으로 가게 된 것은 당시 이승만 정부는 멸공통일이 국시였으나 아버지는 평화통일을 염원했기 때문"이라며 "반전론자인 아버지가 서울에 남아 있으면 고초를 겪을 것이라는 항일 동지들의 간곡한 권유에 따라 월북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곽동영은 북한으로 넘어간 후 어떠한 역할도 맡지 않았다. 그 후 휴전이 되자 과거 독립운동 동지들의 주선으로 평양 근처의 한적한 농장에서 요양을 하다 1970년경 남북통일을 보지 못한 채 타향에서 생을 마감했다.

6.25전쟁은 곽동영이 월북하게 된 동기가 되기도 했지만 자녀들이 국군과 인민군으로 나뉘어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아픔이 됐다.

첫째 아들인 기섭은 서울에서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보도연맹에 참여하게 됐다. 보도연맹은 1949년 좌익 운동을 하다 전향한 사람들로 조직한 반공단체로 주로 사상적 낙인이 찍힌 사람들이 대상이었다.

기섭은 6.25전쟁이 발발한 후 인민군이 서울에 내려오면서 체포돼 처형을 당하게 된다. 또 당시 중학교 3학년이던 규섭은 학교에 갔다가 인민군에게 붙잡혀 군인으로 끌려갔다가 행방불명이 됐다.

대구에서는 곽동영의 부인과 자녀들이 함께 모여 살았다. 둘째 아들인 주섭과 셋째 아들인 훈섭은 1950년 8월 함께 국군에 입대하게 된다.

곽훈섭씨는 "대신동에서 당시 영남일보 사장 집에 세들어 살았는데 군대에 입대하라는 권유를 받고 입대하게 됐다"며 "상서여중에서 2주간 훈련을 받고 7사단 의무대에서 근무하게 됐다"고 말했다.

주섭씨와 훈섭씨는 7사단을 따라 평안도 덕천까지 올라갔으나 인민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훈섭씨는 탈출해 평양까지 도망가 다시 7사단 전우들을 만났으나 형인 주섭씨는 어떻게 됐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훈섭씨는 "덕천에서 포로로 붙잡힌 후 탈출했는데 걸어서 평양까지 갔다"며 "거기서 얼마 남지 않은 전우들을 만났는데 형은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독립운동가였다는 걸 꼭 밝히고 싶다"
 
곽동영 선생의 셋째 아들 훈섭씨는 6.25전쟁 당시 국군에 입대해 부상을 당하고 국가유공자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 거실 벽에 사진을 걸어두었다.
▲  곽동영 선생의 셋째 아들 훈섭씨는 6.25전쟁 당시 국군에 입대해 부상을 당하고 국가유공자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 거실 벽에 사진을 걸어두었다.
ⓒ 곽훈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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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훈섭씨는 정부에 여러 차례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지만 반려됐다. 곽동영 선생이 6.25전쟁 당시 자발적으로 북한으로 넘어가 '적대지역'으로 도피했기 때문에 제외한다는 상훈법 때문이다.

곽훈섭씨는 "아버지와 함께 ㄱ당 활동을 했던 노차갑 선생은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45년 광복이 되자 귀국해 남조선노동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했다"며 "하지만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아버지도 북한으로 넘어갔지만 북한 정부를 이롭게 하지 않았는데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아버지가 북으로 넘어간 후 빨갱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살아왔다"며 "노무현 대통령 당시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지만 거부당했고 문재인 대통령이 3.1절 100주년 기념사에서 '빨갱이라고 낙인찍는 것도 청산해야 할 친일 잔재'라는 말을 듣고 용기를 냈지만 여전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독립운동을 했지만 남에서도 버려지고 북에서도 버려진 아버지를 잊지 못한다"며 "북한에 있는 아버지의 묘소를 가보지는 못했지만 대구에 가묘를 쓰고 해마다 잊지 않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훈섭씨는 "이제 내 나이가 구십이 다 되어 가는데 늙은이가 무슨 소원이 있겠느냐"며 "북한에서 눈을 감으신 아버지를 모시지는 못할망정 독립운동가였다는 것을 꼭 밝히고 싶다. 정부가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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