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70주년 영남일보 특별기획 1부-경북의 戰線 .4] 구국의 일전 영천지구 전투
칠성소식

[6·25전쟁 70주년 영남일보 특별기획 1부-경북의 戰線 .4] 구국의 일전 영천지구 전투

생존 참전용사들 그날의 기억
적 탱크 위세에 눌려 3개월간 거지꼴로 후퇴
'더 이상 갈 곳 없다' 영천사수 명령 떨어져
"고지 점령 못하면 총살" 9일간 사투끝에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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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전투 중 고지 사수를 위해 부상병을 옆에 두고 전투하는 모습. 〈영천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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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전투에 참전한 국군장병들이 승리후 휴식을 취하고 있다 . 〈영천시 제공〉

미국은 6·25전쟁 초기 전황이 불리하자 한때 한국을 포기하려 했다. 당시 미 합참이 대한민국 정부와 군대를 포함해 약 62만 명을 미국령 사모아에 재배치해 신한국을 건설하는 '뉴코리아플랜(New Korea Plan)'을 승인한 것. 이 계획은 1950년 9월7일 영천 방어가 가망이 없어졌을 때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이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철수계획을 알려주면서 드러났다. 이에 정 총장은 영천을 탈환하면 이 계획을 백지화할 수 있느냐고 물었고, 워커 장군은 "물론이다. 영천만 되찾는다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포항·안강·기계·다부동·왜관·창녕·마산 등 모두가 이곳 영천만 무사하면 다 무사해진다"고 답했다.

1950년 9월5∼13일 9일간 이어진 영천지구 전투는 '영천대첩'으로 불릴 만큼 구국의 일전이었다. 앞서 북한군은 8월공세에서 칠곡 다부동과 대구에 대한 공격이 실패하자 제15사단을 의성을 거쳐 영천으로 이동시켰다. 영천을 점령한 후 대구 또는 경주로 진격하겠다는 의도였다. 실제 북한은 9월공세로 보현산 방어선까지 진출해 영천 점령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국군 제2군단 예하 제7사단과 제8사단은 북한군 제15사단을 맞아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그 결과 적 3천799명을 사살하고 309명을 포로로 잡았다. 또 전차 5대를 파괴하고 장갑차 2대, 차량 85대, 포 14문, 소화기 2천327정 등을 노획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이 전투로 북한 제15사단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퇴각했다.

영천전투는 불리한 전세를 극적으로 역전시키고 마지막 보루인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 데 기여한 전투로 기록된다. 국군이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으며 총공세를 단행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전투다. 실제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북한군의 배후를 차단하는 데 성공한 국군과 유엔군은 9월18일부터 낙동강 전선에서도 공세로 전환해 북진을 시작했다. 하지만 영천전투 그날을 기억하는 이는 이제 3~4명에 불과하다. 91세의 김점철옹(전남 순천)을 비롯해 모두 90세 안팎. 48개월 동안 8사단 6중대에서 복무한 김옹 등이 기억하는 그날과 기록영상물 등을 참고해 영천전투를 되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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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시 고경면 국립영천호국원에 건립된 영천대첩비. 〈영천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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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영천전투 참전용사를 비롯한 내외빈들이 제69주년 영천대첩 기념식에 참석해기념촬영하고 있다. 〈영천시 제공〉

#1. 후퇴, 후퇴, 또 후퇴

6·25전쟁 1년 전 20세 나이로 광주 21연대에 입대한 김점철은 이후 강원 삼척 보병 8사단에 예속됐다. 1년간 태백산지구 공비 토벌에 참전하다가 6·25전쟁이 터지자 바로 강원 주문진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의 부대는 북한군의 진격에 주문진에서부터 후퇴를 거듭했다. 속수무책이었다. 탱크 앞에서는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다. 그는 후퇴 과정에서 공포감을 느꼈다. 탱크도 탱크이지만 적의 위세가 대단했기 때문이다. 북한군으로부터 '부산 앞바다에 빠져 죽을래 일본까지 헤엄쳐 도망갈래'라는 방송을 수시로 들어야만 했다. 아군은 거의 3개월 동안 그렇게 쫓기다시피 강릉→대관령→제천→단양→소백산→풍기→영주→영천까지 밀려왔다.

"몰골이 거지꼴이었지. 후퇴하는 3개월여 동안 우린 군인도 아니었어. 피난간 빈집에 들어가서 뒤주를 뒤져 생쌀을 먹었지. 어쩌다 주먹밥이 나오기도 했지만 배고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 이발은 물론 옷도 갈아입지 못했어. 총만 멘 거지꼴로 후퇴만 했지. 그러다 영천까지 왔던 거야."

그가 속한 부대는 3개월 간의 후퇴 끝에 마침내 화북면 보현산 일대에 주둔한다. '영천사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 사수는 목숨을 걸고 지키라는 뜻 아닌가. 얼마 되지 않아 올 게 왔다. 영천 시내로 인민군이 들어왔다는 소대장의 말을 들은 부대원은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동시에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화북면(8사단 주둔지)은 영천 북쪽인데 말이야. 인민군이 영천을 점령해 버리면 오도 가도 못하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

#2. 보현산, 돌격 앞으로

9월5일 이곳에서 처음으로 돌격전이 시작됐다. 서로가 최후의 발악처럼 전투를 치렀다. 한마디로 돌격전은 지옥이었다. 지휘관들은 당시 '고지를 점령 못하면 총살, 고지 탈환하고 다시 빼앗겨도 총살'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9일 동안 고지 점령을 위해 밤낮으로 전투가 이어졌다. 양측 소총수들은 서로 유효 사거리 범위 안까지 접근해야 했다. 피차 500m 이상 벗어나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공격 출발선에 올라서자 적군의 집중사격이 시작됐다. 총알이 바위나 돌에 맞으면서 '윙윙' 튀었고 발부리 밑 땅속에도 박혔다.


인민군 영천시내 진입 소식에 부대원 죽음의 공포 느껴
쏟아지는 총알 뚫고 적 참호 40m 앞 접근 수류탄 투척
335m 고지 탈환하고 보니 北 소년병 발목 기관총에 묶여
적 3799명 사살…불리한 전세 뒤집고 총공세 발판 마련



일진일퇴가 반복되던 13일. 영천전투의 마지막이 된 이날 처음으로 수류탄을 던졌다. 엎드려서 직사 탄환만 피한 채 적진의 개인 참호 40m 안팎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이 거리쯤 되면 수류탄을 던질 수 있었다. 적 참호 주변에 다다르자 '돌격 앞으로' '수류탄 투척'이라는 선임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류탄 뇌관을 뽑아서 적진으로 던졌다. 적진에선 인민군이 방망이 수류탄으로 맞대응했다. 수류탄이 난무해 도망갈 틈이 없었다.

보현산 전투에서 김점철이 속한 6중대 (3개 소총 소대로 구성)는 상당수가 전사하거나 부상당해 후송됐다. 결국 1개 소대로 재편해 마지막 13일 돌격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돌격전 때 소대 병력과 함께 적 1개 분대 병력을 잡았다.

#3. 황금들녘 위의 총탄

당시 영천전투는 북안·화북면 등 주로 남북지역에서 벌어졌다. 8사단 16연대 1대대 1소대 소속으로 영천시가지 남쪽 전투에 참전한 한동수 영천대첩참전전우회장은 "당시 북한군 15사단을 막지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부대 지휘관의 훈시에 오로지 내가 죽기 전에 적군을 먼저 죽여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한동수는 적들이 점령한 시내 인근 한 야산 335m 고지를 재탈환하기 위해 논두렁과 누렇게 익어가고 있는 볏단을 은폐·엄폐물로 삼아 전진했다. 수확기를 앞둔 벼는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지만 총알은 인정사정없이 황금 들녘에 날아들었다. 창공을 자유롭게 비행하던 고추잠자리마저 숨죽여 날았다.

서너 차례 후퇴와 전진을 반복하다 고지를 탈환한 그와 소대원은 깜짝 놀랐다. 대략 5㎡(1.5평) 정도 되는 적 참호에 동서남북으로 기관총 4문이 설치돼 있었고 그 옆에 쇠사슬이 놓여 있었던 것. 당시 이 광경을 목격한 소대원들은 모두가 전쟁의 비참함에 빠졌다.

"북한군은 17~18세 정도 돼 보였지. 가장 나이 많은 병사가 나중에 알고 보니 20세였는데, 발목과 기관총이 쇠사슬로 묶여 있었던 거야.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었던 거다."

#4. 팬티 속의 무공훈장

2003년부터 영천에서는 제8사단 장병과 당시 영천전투 참전용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영천전투에 참전한 무명 영웅을 기리기 위해서다. 8사단은 영천전투를 '영천대첩'이라 부른다. 현직 제8사단장도 종종 참석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무명의 영웅은 세월에 밀려 점점 사라지고 있다. 영천전투에 참전한 영천 유일의 생존자 허만봉옹(93·영천시 임고면)도 병마와 싸우고 있다. 1951년 북한까지 올라가 전선을 누빈 후 돌아온 그는 상사로 진급했다. 전쟁 중 북한포위망을 뚫고 나온 그는 오로지 8사단에서 48개월의 군 생활을 마무리 한 영천전투의 수많은 영웅 가운데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다. 영천전투로 당시 전장에서 4등 무공훈장 수여증을 받은 김옹은 팬티 안에 비상용 호주머니를 하나 만들어 그것을 보관했다.

"6·25전쟁이 끝날 때까지 팬티 속에 보관했던 훈장 수여증을 집까지 가지고 왔지. 이것은 버릴 수가 없지. 어떻게 탄 훈장(수여증)인데…."

영천=유시용기자 ysy@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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