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명신 장군 : 프롤로그
칠성은

채명신 장군 : 프롤로그

칠성관리자 0 45,962 2007.06.11 15:06


역사를 넘어 시대를 넘어-1-프롤로그

‘남기고 싶은 그때 그 이야기’를 쓰기로 결정하기까지는 여러모로 고심이 있었다. 무엇을 쓸 것이며 어떻게 쓸 것인가를 자문하며 여러 날을 생각했다. 결국 지난 군 체험을 정리함으로써 후세들에게, 그리고 국방 의무에 충실하는 군 후배들에게 조국을 지키고 자유민주주의를 신장하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더 이상의 보람이 없겠다는 마음을 갖게 됐다.

흔히 인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한다. 전쟁 그 자체는 잔인성과 잔혹성 면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간 활동이다. 전쟁이란 사람을 죽이고 모든 것을 파괴하는 과정을 수행한다. 정신뿐만 아니라 문화재·산업 시설 등 인간이 이룬 문화·문명을 처참히 파괴하고 말살한다. 인류가 생긴 이후부터 인간은 전쟁은 막아야 한다고 말해 왔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은 계속되고 그 피폐상은 심화됐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고도로 발달한 전쟁무기로 미증유의 파괴·살상이 자행됐다. 그래서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고 전쟁수단 이 외의 평화적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자고 각국이 참여해 국제연맹을 창설했다. 그러나 20년 후 또다시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미증유의 인류 비극이 초래됐다. 그것은 제1차 세계대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살상·파괴가 상상을 초월했다.

중립국이 단 6개국밖에 되지 않아 전 세계가 이 대전에 관여한 셈이 됐으며, 이로 인해 1억 명 이상의 군이 참전해 3000만 명이 전사했다. 무기를 지니지 않은 민간인 피해 범위는 통계조차 잡히지 않을 정도로 막대해 군인 희생자보다 몇 배는 될 것이라고만 짐작할 뿐이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가공할 핵폭탄이 투하돼 일본의 히로시마·나가사키 주민 수십만 명이 희생된 피해를 살펴봐도 알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지구상에서 140여 회의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났다. 이데올로기 전쟁·종교 전쟁·민족 분쟁의 전쟁·경제적 이해 관계에 의한 전쟁 등 전쟁 양상은 더 다양하고 광범위해졌다. 나는 전쟁을 죄악시하고 혐오한다. 그러나 전쟁의 본질을 알려고도 않고 평화를 부르짖는 것 또한 대단히 우려한다. 평화주의가 오히려 전쟁을 부추기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봐 왔으며 그래서 내가 쓰고자 하는 이야기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후세에 나의 전쟁 체험을 통해 전쟁의 본질을 알리고, 전쟁을 어떻게 회피하며, 불가피하게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다면 어떻게 해서 이겨야 하는가를 말하고자 한다. 육군소위로 임관해 장군이 될 때까지, 다시 말하면 광복 직후의 공산당 척결에서부터 6·25전쟁·베트남전쟁에 참전하면서 숱한 파괴와 희생의 참상, 광기·배신·음모의 그늘을 적나라하게 지켜본 사람이다. 아마도 생존한 한국군 중 내가 전쟁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전쟁과 인연 깊은 사람으로 볼지 모르지만 처참한 전쟁을 해 봤기에 단연코 이 땅에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고 호소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평화주의자보다 전쟁을 혐오하고 저지하는 데 앞장설 것이다.

지구상에는 200여 개 국가가 있다. 이 나라들은 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이웃나라와 대립하고 분쟁을 일으키면서 전쟁을 벌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기 땅을 지키고 자기 종족을 보호하기 위한 명분이라지만 힘과 야심이 생기면 끊임없이 이웃 나라를 위협하고 침략하는 것이다. 세상이 달라져 침략의 방법도 지능화됐다. 북한 핵도 그 일환이다. 다양하고 지능화됐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후손을 위해 결코 이 땅에서는 두 번 다시 전쟁이 일어나선 안 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 경이 제2차 세계대전을 마치고 한 말을 두고두고 새기고 싶다.

“제2차 세계대전은 우리가 전쟁을 빨리 결심하고, 히틀러에게 정확하게 이것을 전달했던들 사전에 막을 수 있는 전쟁이었다. 그것을 하지 못한 것은 유럽의 무책임한 환상적 평화주의자들 때문이었다.”

☆ 채명신 장군 약력
▲1926년 황해도 곡산군 출생(본적 평남 중화군)
▲48년 육사5기 졸업과 동시 소위 임관
▲57년 육군대, 64년 미 육군지휘참모대 졸업
▲49년 38선 송악산 전투·태백산 게릴라 토벌전 참가
▲50년 영천지구 방어전·반격 북진(대대장)
▲51년 게릴라부대 결사 11연대 편성 연대장 자원(중령)
▲53년 3사단 참모장·20사단 60연대장
▲58년 1군사령부 작전참모(준장)
▲59년 38사단장
▲63년 육본 작전참모부 차장(소장)
▲64년 3관구 사령관
▲65년 수도사단장(맹호부대) 겸 주월 한국군사령관(중장)
▲69년 2군사령관
▲72년 중장 예편 이후 주 스웨덴·그리스·브라질 대사
▲2000년~현재 베트남참전 유공전우회 총재, 6·25전쟁 참전 유공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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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넘어 시대를 넘어-2-김일성과 나

1945년 8·15 광복 직후 우리 나이로 20세 때 나는 평안남도 진남포 교외 덕해국민학교(후에 인민학교로 개편)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평남 용강군 오신면 덕해국민학교인데 진남포 시내에서는 8㎞쯤 떨어진 곳이어서 흔히 진남포 교외로 알려져 있다. 평양에서는 40㎞ 정도 떨어진 곳이다.

내가 국민학교 교사가 된 것은 일본이 패망하면서 일본인 교사들이 모조리 본국으로 철수해 아이들을 가르칠 교사들이 학교마다 적게는 한두 명, 많게는 네댓 명씩 결원이 생기면서부터다. 부랴부랴 평남교육청이 교사를 채용했는데 나는 좋은 성적으로 합격해 첫 발령지를 덕해국민학교로 받았다. 덕해리는 고향은 아니지만 어머니가 그 고을 덕해교회에서 권사로 목회 활동을 하고 있던 곳이다.

합격자에게는 사범학교 졸업자와 동등한 2급 교원자격증을 줬다. 성경공부하는 틈틈이 독학으로 실력을 쌓은 결과 무난히 합격한 것인데 그간의 독서량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항일 민족 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아버지는 그동안 집에 동서양의 교양·철학·사상 서적들을 많이 비치해 두고 있었으며 지적 갈증이 많았던 나는 이 책들을 하나씩 독파해 나갔었다.

내가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것은 독립투사 자식에 대한 일제의 검속과 가장 노릇을 하면서 서대문 감옥에 수감 중인 아버지 옥바라지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평양경찰서의 야마키 고등계 형사가 집에 상주하다시피 하며 가족을 감시하는 사이 몰래 빠져 나와 아버지를 면회하러 가는 일은 발 빠른 내가 수행해야 할 몫이었다. 자식이라곤 외아들인 나뿐이어서 당연히 그 일을 해야 했다.

광복이 되자마자 38선 이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해 공산정권을 세우는 데 온 힘을 쏟고 있었으나 사람들은 물정을 모른 채 우왕좌왕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라를 찾았으니 들뜬 가운데 모든 것이 잘 될 것으로만 생각했다. 준비는 없어도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부친은 광복의 감격과 함께 석방됐지만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석방 석달여 만인 12월 초 끝내 눈을 감으셨다. 그토록 갈망하던 조국의 광복을 보고 가시기는 했으나 흘린 피에 비해 아쉽게도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감옥 살던 아버지의 육신을 보고 나는 눈물을 쏟은 적이 있다. 아버지의 바싹 마른 몸을 살피다가 족쇄에 묶였던 한 쪽 발목이 온통 시커멓게 멍든 채 썩어 있는 것을 본 것이다. 대나무 침으로 손톱과 살 사이를 찌르는 고문을 당할 때 대개는 두세 번째 손가락에서 기절을 하고 마는데 아버지는 네 번째 손가락까지 찔러야 기절했다고 한다. 이런 고문 뒤끝이라 석방됐어도 몸이 온전할 리 없었다.

안방 아랫목에 누워 있는 아버지는 음식을 제대로 드시지 못했다. 먹은 대로 토하거나 설사를 했다. 그것도 이유가 있었다. 일제는 수감 중인 독립투사들에게 밥에 유리 가루를 넣어 배식했다. 내놓고 죽일 수는 없으니까 이렇게 실험 삼아 서서히 죽이는 것이다. 유리 가루를 먹으면 그것들이 밖으로 배출되지 않고 위벽에 달라붙거나 위장 밑에 깔린다고 한다. 그래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먹어도 토하거나 설사를 하고 만다는 것이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은 집안을 어둡게 내리 눌렀으나 그나마 교사로 발령받은 나로 인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이때 마을에 이상한 풍문이 돌았다. 마을로부터 멀지 않은 진남포 교외에 ‘소화전공주식회사’라는 큰 공장이 있었는데 소련군이 접수해 군 간부·당 간부를 양성하는 평양학원을 세운다는 것이다. 일본이 무기 등 군수품을 생산하기 위해 지은 공장으로 거의 완공단계에 있었는데 패망과 함께 그대로 두고 철수한 시설이었다. 평양학원 원장은 그 유명한 김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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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넘어 시대를 넘어-3-김일성과 나

김책은 소련 극동군사령부 88여단 소속 소령으로 1945년 9월 초 김일성 대위와 함께 북한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그런 김책이 학원장으로 오니 평양학원의 위상과 비중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었다. 이 학원에서 인근 지역 교사들을 초청했다. 물론 나도 초청됐다.

평양학원이 인근 지역 일선 교사들을 초청한 것은 개원 전 지역 지도층에 선전 선무 활동과 친화력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북한 전역에 소련군이 들어와 있지만 누가 실권을 장악했는지 모호해 앞일이 궁금했다. 불확실성과 불예측성이 도처에 산재해 있었다. 사람들은 소련이 우리나라 지도자를 옹립해 좋은 나라를 건설해 줄 것이라고만 믿었다. 자체 힘이 없으니 그렇게 외세를 따르는 입장이었다. 그래도 일본보다 나으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평양학원은 소련군 장교와 소련군 병사들로 북적거렸다. 급조된 조직원들이 붉은 완장을 팔에 두르고 일본군도를 허리에 찬 채 부지런히 움직였다. 한복 같은 제복에 일본 군도를 찬 모습이 어설퍼 보였지만 당시로서는 일본도를 차는 것만으로도 으스댈 만큼 힘과 권위가 있었다. 우리 교사 일행은 강당으로 안내됐다.

김책 소령이 장교단이 도열한 맨 앞에서 우리를 맞았다. 강당에 착석하자 그는 “우리나라는 빛나는 사회주의 국가 건설로 총매진할 것”이라며 희망찬 청사진을 내보였다. 뒤이어 질문과 답변 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비롯, ‘변증법적 유물론’을 들먹이며 어떤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할 것이냐고 질문했다. 그러자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식민지 시절 일제는 일본제국주의에 반대한다 하여 공산주의·사회주의를 철저히 배척했기 때문에 이런 류의 독서를 하는 것만으로도 구속·고문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동무, 어떻게 마르크시즘에 그렇게 해박하오?”

김책 원장이 평안도 사투리도 아니고 함경도 사투리도 아닌 목소리로 반갑게 물었다. 그는 러시아에서 주로 살았기 때문인지 우리말이 서툴렀다.

붉은 완장을 차고 다닌 사람들도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상황인데 평범한 교사가 그것을 알고 있으니 놀랄만도 한 일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광복과 더불어 석방돼 나온 지 석달 만에 고문 독으로 작고했으며 그동안 아버지가 몰래 탐독하던 책을 골방에서 찾아 읽었던 것 중 ‘자본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을 읽게 된 내력을 설명했다.

“부친은 영웅이시오.”

김책 원장은 감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정규(전 성균관대 총장. 4·19 때 교수단 시위주도), 유림(독립노동당위원장) 선생 등과 감옥에서 의형제를 맺으며 항일민족운동을 펼쳐 온 아버지는 당시 근동에서 알려진 지사였다. 아버지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자 김책의 눈이 빛나면서 나를 응시했다.

“부친의 애국적 행동을 기억하겠소. 동무가 자랑스럽소.”

사회주의에 대한 나의 지식은 사실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았다. 주민 수준이나 소련군 병사들도 공산주의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마르크스의 책 이름만 대도 대단한 지식층으로 평가되던 시기다. 여기에 한마디 덧붙인다면 20세의 나는 다른 교사들보다 젊고 훤칠한 키(180㎝)에 호남형이라는 평을 듣고 있었다. 당시 남자들 평균 키라야 160㎝가 될까 말까 한 시대였다. 여기에 사회주의 이론에 해박한 것처럼 비쳐졌으니 그들이 나에게 호감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내년(1946년) 2월 평양학원 개원식 때 채동지를 꼭 초청하겠소. 소련군 장성들과 공산당 간부들이 모두 참석할 것이오.”김책 원장은 나의 손을 굳게 잡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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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넘어 시대를 넘어-4-김일성과 나

1946년 2월 8일. 평남 진남포 교외 평양학원 운동장.

소련 군가가 스피커를 타고 우렁차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치즈샤코프 소련 주둔군사령관을 비롯, 소련 장교단과 북조선 공산당 간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본행사가 시작되기 전 운동장에서 소련군 병사들의 분열이 있었는데 손을 좌우로 느릿하게 제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폼이 흡사 춤을 추는 듯이 보였다. 90도 각도로 절도 있게 무릎을 세워 앞으로 나가는 일본군 행진에 익숙해진 나에게는 신기한 모습이었지만 율동처럼 아름다웠다.

평양학원 개원식은 북한에는 대단히 비중있는 행사였다. 장교 양성을 통해 인민군 모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으며 공산당 간부를 교육하면서 북한 정권의 기틀을 마련하는 주요한 교육기관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단상 세 번째 줄에 앉았다. 맨 앞줄에는 치즈샤코프 사령관과 소련군 장성들, 김책·김두봉·김일성·이용범·강양욱 등 북한의 대표적 인사들이 앉아 있었다. 그 다음 줄에도 쟁쟁한 인사들이 착석했으며 나는 세 번째 줄 중앙에 자리를 배치받았다. 상당히 우대받은 자리였다.

평양 군중대회에 출현했다는 김일성 장군은 불과 나와 3∼4m 거리에 있었다. 김일성은 1945년 9월 소련군이 청진 원산에 상륙했을 때 소련군 극동사령부 특수부대 88여단 소속 대위로 함께 들어왔다. 김일성은 10월 17일 평양군중대회에 처음 모습을 나타냈는데 군중들은 그가 전설적인 항일 유격대장으로 알고 열렬히 환영했다. 그러나 정작 30대의 새파란 젊은이어서 군중들은 긴가민가 혼란스러워했다. 신출귀몰하는 김일성 장군이라면 1900년대 초 만주벌판을 누빈 활약상으로 보아 연령대가 50대 후반으로 보았으나 30대의 청년이니 뭔가 잘못 본 게 아닌가 반신반의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정보가 빈약한 데다 민중의 수준이 낮고 신생조국에 조그만 계기만 있어도 곧 감격하고 신화를 만들어가는 풍조여서 그것은 대수롭지 않게 묻혀 가고 군중대회는 큰 성황을 이루었다. 나 역시 구름 떼처럼 모인 사람들 틈에 끼여 먼 발치에서 김일성을 보았으나 의심이라곤 해 보지 않았다.

치즈샤코프 사령관이 기념사를 했다. 통역은 한국계 소련군 장교가 맡았다.“내년 기념식 때 탱크부대와 포병부대·전투기가 분열에 참가할 것입니다.”

소련군이 진주하자마자 재빠르게 군대를 편성하고, 당시로는 상상할 수 없는 탱크부대가 들어오고 포병부대가 창설된다니 놀랄 일이었다. 식이 끝나고 곧이어 천막 친 곳에서 연회가 열렸다. 소련제 사이다와 보드카가 나오고 먹음직스러운 식빵이 기다란 송판 탁자에 놓여 있었다. 처음 본 음식들이었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에 사이다와 빵을 먹었다.

연회장을 돌던 김책 원장이 귀빈들과 함께 내게로 다가왔다. 그 옆에는 단상 앞줄에 앉아 있던 김일성도 끼여 있었다.김일성 동지, 이 젊은이가 내가 말했던 채명신 동지입니다. 자, 악수들 하시오.”

김일성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볼 살이 통통했으나 잘 생긴 편이었으며 호방해 보였다. 나는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것으로 한국군 출신 장성 중 아마도 내가 유일하게, 그리고 최초로 김일성과 악수한 사람이 아닌가 한다.

“반갑소 채동무. 말씀 많이 들었소. 사회주의 공부를 많이 했다지요?”김책 원장은 나를 그동안 사회주의에 해박한 사람으로 소개했던 모양이다.“관심있게 본 책들 중 하나입니다.”

“어려운 시기에 그것만으로도 됐소. 우리는 교사동무 같은 인재가 필요하오. 나와 함께 평양에 가지 않겠소?”김일성이 반갑게 내 어깨를 두드리며 제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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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을 때 드러나는 김일성의 치아가 대단히 불규칙해보였다. 윗니가 뻐드렁니인 데다 톱니처럼 고르지 못해 호쾌하게 웃을 때는 좀 혐오감을 주었다.

“김일성 동지를 따라가 신생 조국 건설에 힘을 보태시오.”

김책 원장도 거들었다. 이때 만약 내가 김일성을 따라갔더라면? 내 인생은 180도 달라졌을 것이다. 공산당 핵심 간부나 인민군대 고급 장교가 돼 6·25 남침 때는 별을 달고 남한을 공격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나는 김일성의 제의에 마음속으로 주저한 바가 있었다.

“어캐, 날 안따라가겠다는 건가?”

내가 주춤하자 김일성이 의아하게 물었다. 나보다 14세 연상이지만 그렇다고 나이 차가 크게 나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만큼 젊어보였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런 기회를 갖지 못해 안달인데 주저하다니. 김일성도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나를 망설이게 한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가족 부양이라는 것도 망설임의 이유였지만 공산주의가 허구라는 사실을 그들 소련군 장교로부터 직접 들었기 때문이다.

광복이 되자마자 소련군이 진남포 외곽 내가 살고 있는 용강군에도 예외없이 주둔했다. 교사들은 하루 아침에 세상이 달라졌으니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칠 것이냐로 고심했다. 일본어 교재는 무용지물이 됐고 무엇보다 일본말로 교육하던 언어 자체가 바뀌고, 그렇다고 우리말로 가르칠 책이라곤 없었다. 거기다 어느새 로스케(러시아) 세상이 된 것 아닌가.

그때 문화담당 소련군 장교가 학교를 찾아왔다. 그는 유창한 일본말로 “붉은 군대는 인류의 계급을 해방시키는 해방군이다. 계급 혁명의 종주국 소련이야말로 여러분을 지켜줄 것”이라며 아동 지도방법과 학습과정을 세세히 설명했다. 그는 유창한 일본말을 구사했으므로 통역이 필요없었다. 그런 것들이 신기해 나는 홀린 듯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봤다. 장교 얘기가 끝나자 나는 “어떻게 일본말을 그렇게 유창하게 구사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모스크바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했소. 전쟁이 나자 정치장교로 소집돼 일본어 통역장교 겸 문화장교로 활동하고 있소.”

그의 계급은 ‘총위’였다 대위와 소령 사이의 계급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소련군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데 특히 나는 일본말을 구사하고 지적인 그의 품성에 상당히 이끌려 들어갔다. 그 또한 인민의 교육·생활 등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나와 같은 청년 교사와 정보를 주고받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눴고 나중에 서로 만나기로 약속까지 했다. 그런 어느날 그가 나의 집을 찾아왔다.

“주둔지에서 자전거로 30분 거리누만요.”

그는 평안도 사투리로 반갑게 말했다. 우리말도 상당 수준 구사하고 있었다. 나는 닭을 잡고 생선을 굽는 등 그를 극진히 대접했다. 식사 후 나의 골방에서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눴다. 나는 소련의 정정과 붉은 군대에 관해 물었다.

“위대한 소비에트는 우리를 해방시켜 준 나라인데 소비에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별로 없어요. 어떤 군대조직인지 궁금합니다. 공산주의 이론도 좋아 보이는데 실제 이론대로 그러는지 제대로 알지 못해 답답합니다.”

그러자 그가 진지한 얼굴로 사나이로서 평생 지킬 약속을 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반할 정도였으므로 선뜻 지키겠다고 응답했다. 다시 한번 나를 똑바로 쳐다본 그가 알았다는 듯이 또박또박 일본어로 말했다.
“아나타와 교산도니 하이테와 이케나이(당신은 공산당에 들어가면 안 된다).”

“아니, 왜 공산당에 들어가면 안 됩니까?”
“소시데 아나타와 시니마스. 아나타노 쿠니와 호로이마스(그러면 당신은 죽는다. 당신 나라도 망하게 된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붉은군대 장교의 입에서 저런 반동의 말이 나올 수 있는가.

“믿어지지 않습니다. 약소민족 피압박 민족을 해방시켜 준 위대한 소련의 붉은군대가 나라를 망하게 하다니요.”

그러자 그가 정색을 하고 다시 말했다.

“나의 이런 말이 소련군에 새 나가면 나는 즉시 총살이오. 내 아내는 끌려가 고문당하고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가오. 나는 아들딸이 하나씩 있는데 그들은 가족과 분리시켜 국가에서 따로 철두철미 공산주의 교육을 시킬 것이오. 그리고 간첩으로 양성할 것이며, 그런 사상에 젖으면 부모형제도 눈에 안 보이게 될 것이오.”

그가 이렇게 말하고 자기 부대로 한 번 오라고 하고는 돌아갔다.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이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요즈음식으로 보면 그는 반체제인사였던 셈이다. 오늘날에 와서 그의 말을 돌이켜보면 백번천번 옳은 말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실로 충격적인 발언이어서 나는 이가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1945년 11월 하순. 나는 그의 연락을 받고 소련 주둔군 부대를 찾아갔다. 부대는 진남포 백화점을 접수해 사무실로 쓰고 있었다. 그중 문화부는 2층에서도 가장 전망이 좋고 깨끗한 홀을 쓰고 있었다. 그만큼 비중 있는 부서였다. 그는 나를 반갑게 맞으며 사무실 이곳저곳을 안내했다. 그러나 점심때가 됐는데도 식당으로 가려고 하지 않았다. 오후 2시가 넘어서야 장교식당으로 나를 안내했다.

식탁에는 빵·버터가 바구니에 담겨 있고 처음 보는 치즈와 야채수프, 커다란 캔에서 꺼낸 주먹만한 고깃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식당에는 늦은 점심이었기 때문에 그와 나 단 둘뿐이었다. 나는 조밥만 먹고 자란 처지라서 쌀밥 한 번 구경하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쌀밥보다 더 귀한 서양식 식사를 대하고 보니 가슴 설??다. 그가 주위를 한번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4급 식사를 하고 있소. 5급은 하사관이 먹는 거고 6급은 병사들이 먹는 식사요. 내 위의 3급은 영관급이 먹는 것으로 포도주가 나오고 좋은 부위의 쇠고기가 제공되오. 장성급이 먹는 2급 식사는 세계에서 돈많은 자본가나 왕족이 먹는 수준이오. 캐비아에 상어지느러미 고기가 제공되오. 1급은 상상도 못하오.”

자랑으로 말하는 건지 어떤지 몰라서 나는 그가 하는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소비에트는 계급없는 사회라고 했지만 먹는 것까지 이렇소.”

그때 내 머리를 둔기로 한대 때린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랬구나. 그가 많은 사람이 모이는 식사 시간을 피해 일부러 오후 2시에 텅 빈 홀에서 식사하며 소비에트의 실상을 말한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1944년 19세 때 제2국민병으로 일본제국주의의 동원훈련을 받은 적이 있다. 부대 식당은 장교와 하사관이 먹는 식당과 병사들이 먹는 식당 두군데로 나뉘어 있었다. 그런데 붉은군대는 5등급으로 나뉘어 있다니.

“채동무, 계급이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오.” 소련군 장교는 냉소적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의 표정에 비감이 어린 흔적이 역력했다.

김일성은 나의 단념이 아쉬운 듯 “채동무와 같은 청년이 조국건설에 이바지해야 하는데 아쉽소”하며 “생각이 바뀌거든 언제든지 김책동지를 찾든지 나를 찾아오시오”하고 떠났다. 반세기가 넘은 이 시간도 김일성과 악수를 한 감회가 남아 있다. 내가 소련군 장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김책·김일성의 권유를 좋아라 하고 따랐을 것이다.

그리고 김책이 숙청(교통사고사로 돼 있지만 숙청으로 알고 있다)당한 것과 같은 코스로 나도 비참한 말로를 밟았을지 모른다. 김일성이 실권을 장악하면서 조만식 선생을 필두로 맨 먼저 기독교 세력을 제거해 나갔기 때문에 나도 필시 한 묶음이 돼 숙청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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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1월 말께 공산당원들이 덕해교회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어머니와 나를 불러 세우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우리는 용강군당에서 나왔소. 교회를 접수하겠소. 내일부로 교회 문을 닫으시오.”

나는 이들의 명령을 듣고 있다가 잘라 말했다.“안 됩니다. 교회 문을 우리 마음대로 닫고 열고 할 재량권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장로님 네 분이 교회를 운영하고 권사님인 제 어머니가 실무를 맡고 있소. 장로님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문을 닫을 수 없습니다.”

“문 닫으라면 닫으시오. 당의 명령이오!”너무도 어이없는 지시였다.“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신들의 하나님이 뭐요? 하나님을 직접 보았소? 천당 천당 하는데 천당 갔다 와 봤소? 그따위 수작 그만하시오. 인민 착취자들이 만들어 놓은 허상일 뿐이오!”

“눈에 안 보인다고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내 질문 하나 하겠는데 공기가 눈에 보이오 안 보이오? 안 보이죠? 그런데도 공기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말이 궁하면 내놓는 엄포가 있다.“동무는 말이 많소! 말이 많으면 반동이오. 반동은 인민의 적이오. 인민의 적은 이 땅에서 살 수 없소!”

너무도 명쾌한 논고였다. 그들이 듣기 싫은 소리는 모두 인민의 적이었다. 인민의 적은 소리 소문없이 사라지는 것이 이 무렵의 일이었다. 간밤에 누군가에게 불려 나간 사람은 그길로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나날이 공포 분위기였고, 특히 기독교인들은 신상을 옥죄어 오는 불안감에 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버티자 그들은 “반동이 어떤 대가를 받는가를 똑똑히 보여 주겠소!”하고는 돌아갔다. 덕해교회는 인근 4∼5개 마을에서 참여한 신도가 150명쯤 되는 비교적 큰 교회였다. 나는 청년면려회장직을 맡아 청소년 선교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런 것들도 그들의 비위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당원들이 돌아간 뒤 소식을 들은 장로와 신도들이 교회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붙들려 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하니 어서 몸을 피하라”고 했다.“왜 떠나야 합니까. 저는 죄가 없습니다.”

“이 사람아, 반동 말을 들으면 그것으로 끝장일세. 잘못한 게 없어도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진다니까. 목숨부터 부지해야지. 보안서원(북한경찰)들은 고등계 형사보다 더 악질이라네. 어머니는 우리가 보살필테니 어서 피하게.”

고등계 형사라면 왜정시대, 사상범이나 항일투사들을 다루는 악질적인 경찰관을 말한다. 교인들은 철야 기도에 들어갔다. 북쪽의 겨울은 살이 에이도록 춥다. 장로들이 나를 위해 철야 기도를 해 주는데 이대로 계속 나가면 교인 모두 다칠 것은 뻔한 일이었다. 나 하나 끌려간다고 교회가 달라질 것이 없는데도 저토록 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교인들을 나는 외면할 수 없었다. 어머니도 눈물로 기도하며 나에게 권했다.

“얘야, 자식이라곤 너 하나뿐인데 내 품에서 떠나보내고 싶겠느냐. 너를 살리는 길이 그 길뿐이라니 어서 떠나거라. 너를 살리고 교인들도 살리기 위해서는 네가 떠나야 된다.”

나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아들 하나 살리려는 모습이 너무나 애절했다. 내가 태어나기 전 형을 얻었지만 그 형이 돌이 되기도 전에 병을 얻어 죽고, 그리고 한참 후 나를 얻었지만 나 역시 어머니와 함께 살지 못할 운명이 되고 만 것이다. 나는 밤중을 택해 기약없이 도망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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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명신 장군의 이야기를 좀 짧게 편집했습니다. 원 내용은 http://kookbang.dema.mil.kr/kdd/ColumnTypeView.jsp?writeDate=20070611&writeDateChk=20070122&menuCd=2001&menuSeq=16&kindSeq=1&menuCnt=30917 에 가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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