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런 선배 전우 : 최창언 중장
칠성은

자랑스런 선배 전우 : 최창언 중장

칠성관리자 0 15,429 2007.05.01 12:07
● 한문 : 崔昌彦
● 생몰연대 : 1921.12.3 -1988.4.4
● 출신지역 : 함북 경성
● 최종계급 : 육군 중장
● 상훈내용 : 태극무공훈장
● 참고문헌 :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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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1921. 12 함북 경성 출생
*1946. 5 군사영어학교 졸업 및 육군참위(소위) 임관
*1949. 6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
*1949. 8 제 2사단 참모장
*1950. 8 제 7사단 5연대장
*1950. 9 제 2훈련소장
*1951. 7 제 6사단 부사단장
*1952. 6 제 1훈련소 부소장
*1953. 5 수도사단장
*1955. 1 육군소장
*1956. 7 육군본부 수송감
*1957. 5 제 2관구사령관
*1958. 1 국방부 정훈국장 대리
*1960. 7 육군 보병학교장
*1961. 5 제 3군단장
*1961. 8 육군중장
*1963. 2 국방대학원장
*1966. 2 예편
*1982. 4 타계


1. 생애(1921-1988)

1921년 12월 3일 함경북도 경성에서 출생한 최창언(崔昌彦) 육군 중장은 1942년 일본 육사를 졸업한 후 조국의 광복을 맞아 귀국하여 1946년 5월 1일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참위(소위, 군번10095)로 임관하였다. 그는 충청북도 청주에서 창설된 제7연대 A중대의 소대장으로 초임 발령되어 연대편성을 완료하는데 주력하였다. 2월 7일 민기식 참위(소위)의 주도하에 창설되었던 제7연대 A중대는 불순분자가 포함되어 연대의 완성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국방경비사관학교 제1기생과 제2기생 출신의 장교를 보충받은 뒤 모병을 실시하여 1947년 1월 연대편성을 완료하였다.
1947년 7월 국방경비사관학교로 전출된 그는 총사령부로 발령을 받은 이듬해 10월까지 재임하였으며, 1948년 육군 공병감에 이어 1949년 6월 20일 제2연대와 제17연대 그리고 기갑연대를 기간으로 수도경비사령부가 창설되자 초대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이어 제2사단 참모장으로 부임하여 근무하던 중 6.25전쟁을 맞게 되었다.
이후 금성 서남지구전투를 마지막으로 휴전에 돌입하게 된 최창언 준장은 수도사단장으로 재임하는 기간동안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였고, 1956년 7월 24일에는 육군본부로 전속되어 수송감(輸送監)에 보임되었다. 1957년 5월 장군은 제2군관구사령관에 취임하여 관하의 부대에 대한 작전.군수.행정상의 여러 지원업무를 관장하기도 하였다.
그 후 국방부 정훈국장, 육군보병학교장을 역임하고 1961년 5월 ‘5.16군사정변’이 발생한 직후 제3군단장으로 부임하여 활동하던 중 국방대학원장에 임명되는 한편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였다. 3년 후인 1966년 2월 12일 육군 중장으로 20년간의 군 생활을 마감하고 예비역에 편입된 그는 1966년부터 1973년까지 충주비료 부사장을 역임하고 1988년 4월 4일 68세를 일기로 타계하였으며, 그의 유해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장군묘역 [1-126]에 안장되었다.
그는 군문에 첫 발을 디딘 1946년부터 국군의 창설과 발전에 직접 참여하는가 하면, 1950년 6월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국가의 존망이 경각에 달했던 시기에는 전장을 누비며 뛰어난 전공을 수립함으로써 적의 침략을 분쇄하는데 주력하였다. 정부는 장군의 이러한 공로를 인정하여 1954년 7월 28일 군 최고의 영예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였으며, 이외에도 을지.충무.화랑 등 각종 무공훈장과 유엔종군기장을 비롯한 수많은 훈.포장을 수여받았다.


2. 공적

수도사단장 최창언 육군 준장은 1953년 5월 1일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사단의 단결을 앙양하고 전 장병을 솔선하여 진두지휘해 오던 중 7월 13일 중동부전선의 오성산전투에서 부대원의 사기를 격려 고무시키는 한편 적의 배후를 기습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크게 공헌함으로써 1954년 7월 28일 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 제183호)을 수여받았다.
1950년 6월 26일 의정부지구전투사령부에 편성된 제2사단 5연대를 박기성 중령에 이어 지휘하게 된 최창언 중령은 창동-미아리지구전투에 참전, 북한군 제3사단과 제4사단의 남진을 저지하고 수도 서울을 사수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전차를 앞세운 적의 기세에 밀려 한강 이남으로 후퇴한 그는 6월 28일부터 7월 4일까지 전개된 한강-수원방어전에서 시흥지구전투사령부 예하 혼성제2사단 제5연대장으로 활동하다 부상을 당해 7월 3일부로 후임 박기성 중령에게 연대지휘권을 다시 인계하였다.
이어 제7사단 5연대장으로 부임한 최창언 대령은 8월 13일부터 9월 4일까지 전개된 보현산부근전투에서 북한군 유격부대인 제766부대와 제12사단의 일부 병력의 아군 방어진지 돌파기도를 22일간이나 억지한 후, 9월 5일부터 13일까지는 영천전투에서 북한군 제15사단의 공격을 격퇴하고 영천을 탈환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를 발판으로 아군이 총 반격에 나서자 최창언 대령도 제5연대를 이끌고 9월 17일부터 제2훈련소장으로 전보되는 날까지 경주-서울진격전에 임하였다. 9월 30일 제2훈련소장으로 부임하여 1953년 5월 1일 수도사단장으로 전선에 복귀할 때까지 제6사단 부사단장과 제1훈련소 부소장 등을 역임하였다.
수도사단장으로 부임한 최창언 준장은 1953년 7월 13일부터 15일까지 전개된 금성 서남지구전투, 일명 ‘수도사단의 미주리선 철수작전’을 지휘하였다. 휴전을 앞두고 주도권을 행사하기 위해 ‘7월 공세’를 개시한 중공군은 수도사단이 방어하고 있던 금성돌출부 좌견부를 공격하였다.
수도사단은 하소리(下所里)에서 회고개(灰古介)까지 주저항선에 제26연대와 제1기갑연대 3대대가 배속된 제1연대를 배치하고 제1기갑연대를 예비로 확보하였다. 반면 중공군 제68군 204사단과 제203
사단, 제54군 130사단은 7월 13일 21시에 제26연대를 비롯한 사단 전역에 포격을 가하면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적은 우익의 제1연대를 강타하면서 주공을 중치령과 회고개 방향으로 투입하는 한편 중대 및 대대 규모의 부대로 진지를 공격하면서 주력은 거점과 거점간의 공간 장애물지대로 지향하는 전술을 펼쳤다. 23시경 제1연대의 중앙과 좌익 일선 진지가 적에게 점령되었고, 자정이 넘어 회고개의 제2대대도 와해되었다.
한편 제26연대도 우익의 제1대대를 비롯한 3개 대대가 이날 밤 적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남대천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수도사단은 중공군의 공세 첫날인 13일 자정 무렵 전방대대 진지가 유린되고 다음날 03~04시경 전방대대의 OP가 적의 공격을 받음으로써 주저항선이 붕괴되었다.
제1연대 진지가 돌파될 무렵 전황보고를 통해 적의 주공이 직목동-이천동-간진현 방향으로 지향되고 있다고 판단한 사단장 최창언 준장은 제1기갑 연대장에게 역습을 실시토록 조치하였다. 그러나 이천동까지 진출했던 기갑연대는 중공군의 기습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고 겨우 부대를 수습하였다.
사단장은 04시경 통신이 두절된 제1연대의 상황이 심각함을 인식하고 예비대를 투입하였다. 예비인 제1대대는 117A 도로를 타고 06시경에 간진현에 도착하여 제1연대의 피습 상황을 파악하고 북정령 북쪽에 부대를 배치하여 철수부대를 엄호하였다.
신촌-간진현선에 제2저지선을 구축하여 적의 돌파를 저지하고 부대를 수습하기 위해 1개 연대의 지원을 군단장에게 요청한 사단장은 지원병력인 미 제15연대가 14일 12~17시에 117번 도로 남쪽 능선에 제2저지선을 형성하자 곧바로 117A 도로 북쪽 능선을 확보하기 위해 이때까지 수습된 제26연대와 제1연대로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 능선을 점령하여 새로운 주저항선을 구축하는 한편 미처 철수하지 못한 사단 병력을 구출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이 공격에서 제1연대는 북정령을 점령중인 기갑연대 제1대대로 이른 아침 117A번 도로 북쪽 능선의 우반부를 공격하였고, 제26연대는 야간에 그 좌반부를 공격하였으나 중공군의 반격으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이 공격으로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시켜 미 제15연대의 투입을 보장하고 철수부대도 일부 구출하였다.
수도사단장은 철수하지 못한 병력을 수습하기 위해 계획된 공격을 12시 30분에 개시하여 15시경 117A번 도로 북쪽 능선을 점령하였으나 중공군의 야간공격으로 점령한 능선을 포기하고 미 제3사단 후방으로 철수하였다.
7월 13일부터 16일까지 계속된 이 전투에서 수도사단장 최창언 준장을 비롯한 전 장병은 혼연일체가 되어 미 제9군단의 우익을 방어함은 물론 국군 제2군단의 좌익을 엄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단예비로 투입되어 적의 공세를 저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적 사살 2,027명과 추정살상 6,200명, 포로 10명을 획득하였고 따발총 24정과 체코식 경기 및 SMG 각 2정, 45㎜ 무반동총 1정, LMG 1정, 소총 1정 등을 노획하는 대전과를 수립하였다.


* 참고문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2003
국방부, 자유민에게 전해다오 제1집, 1955
육군본부, 한국의 전쟁영웅들, 1992
이원복, 호국용사100선, 명성출판사, 1976
국방부, 호국의 별 제3집, 1979
포병학교, 포병의 발자취, 1963
병학사, 내 젊음 조국에, 1987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38도선 초기전투: 중동부전선 편, 1982
국방일보,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2002. 11. 9
국방부, 한국전쟁사 제8집, 1975
공군본부, 공군사 제1집
육탄 10용사 현충회, 육탄 10용사, 도서출판 法政, 1986
국방부, 호국의 별, 제6집, 국방부 정훈국, 1982
국방일보, 한국의 전쟁영웅들 (1) 육탄 10용사, 1992. 6. 4
국방부, 호국전몰용사공훈록 제3집,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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