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런 선배 전우 : 민기식 대장
칠성은

자랑스런 선배 전우 : 민기식 대장

칠성관리자 0 14,142 2007.05.01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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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문 : 閔機植
● 생몰연대 : 1921.5.20-1998.10.11
● 출신지역 : 충북 청원
● 최종계급 : 육군 대장
● 상훈내용 : 태극무공훈장
● 참고문헌 :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약력

*1921. 5 충북 청원 출생
*1946. 1 군사영어학교 졸업 및 육군참위(소위) 임관
*1949. 11 육군보병학교장
*1950. 7 제 7사단장
*1950. 9 대구방위사령관
*1950. 9 경인지구계엄사령관
*1950. 10 제 5사단장
*1950. 10 육군준장
*1952. 1 육군대학 부총장
*1953. 2 제 21사단장
*1953. 5 육군소장
*1956. 7 육군본부 행정참모부장
*1960. 9 제 2군단장
*1961. 1 육군중장
*1962. 5 제 1군사령관
*1963. 6 육군참모총장
*1965. 3 예편(육군대장)
*1998. 10 타계

1. 생애(1921-1998)

민기식(閔機植) 육군 대장은 6.25전쟁 초기 민부대를 편성하여 북한군의 서남부지역 돌파를 저지하고, 제5사단장으로 수도 서울을 재점령하려는 적의 기도를 분쇄하는 등 전선 도처에서 뛰어난 전과를 수립한 공로로 인해 1953년 8월 27일 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 제122호)을 수여받은 전쟁영웅이다.
1921 년 5월 20일 충청북도 청원군 북면에서 출생한 그는 1943년 만주 신경 에 위치한 건국대학을 졸업한 후 조국의 해방을 맞아 귀국하였다. 그는 1945년 9월 김종오(金鍾五)와 함께 고향인 청주에서 일본군으로부터 인수한 무기로 무장한 100여 명의 청년들을 규합해 무장자위대를 조직하였다. 또한 해방된 조국에서 자신의 웅지를 펼치기 위해 학병 출신들이 결성한 ‘학병동맹’에 가입하였으나 이 단체가 좌경화되자 최영희(崔榮喜) 등과 함께 바로 탈퇴하고 국군 창설의 초석이 된 ‘학병단’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가 개교하자 입교하여 다음해 1월 졸업과 동시에 육군 참위(소위, 군번 10018)로 임관한 그는 A중대장 대리로 제7연대 창설임무를 부여받았다. 자신의 고향인 충청북도에서 A중대를 창설하라는 명령을 받은 그는 합스 소위 및 미군 하사관 2명과 더불어 창설 작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함으로써 일시 해산했던 무장자위대를 주축으로 우선 가까운 친구 가운데 일본군 경력이 있는 하사관 출신을 불러모아 이들을 기간(基幹)으로 각 지방에서 모병을 전개, A중대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문용채(文容彩) 부위(중위)가 총사령부로부터 정식 A중대장으로 발령을 받고 현지에 부임함으로써 지휘권에 대한 혼선이 야기되었으나, 문 부위가 민기식 참위의 헌신적인 중대창설 노력을 살리기 위해 양보하고 다른 보직을 맡음으로써 해결되었다. 고군분투하며 A중대를 창설한 그는 1947년 1월 15일 마침내 연대편성을 완료하고 초대 연대장에 취임하였으며, 동년 5월 21일에는 후임 이병주(李丙?) 소령에게 연대장직을 인계하고 총사령부로 전출하였다. 1949년 8월 1일에는 육군 대령으로 진급한 뒤 육군보병학교 부교장으로 보임되었고, 3개월 후에는 교장으로 임명되어 육군참모학교에 교육파견 중 6.25전쟁을 맞게 되었다.
휴전 후 제21사단장 겸 제1군단장 대리로 발령을 받은 그는 1954년 6월 5일에 미 참모학교 파견을 위해 육군본부로 전속되었다. 교육을 마치고 원대복귀한 뒤에는 육본 작전교육국장에 이어 연합참모본부 제1부장, 육본 행정참모부장을 두루 경험하였다. 1957년 8월 제3군관구사령관과 제2군관구사령관, 제1군 부사령관을 역임하고 1960년 9월 제2군단장에 부임하였다. 1962년 5월 7일 제1군사령관에 전보된 그는 다음해 6월 육군의 수장인 참모총장에 임명되어 1965년 3월 31일까지 재임하고 육군 대장으로 예비역에 편입되었다. 예편 직후 충주비료 사장을 역임하고 1967년 정계에 입문하여 제7, 8, 9대 국회에 청원지구 공화당 소속으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어 국회 국방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반공정신이 투철하고, 단결.화합.융화를 강조하여 부대운영을 안정되게 이끌었던 민기식 육군대장은 1998년 10월 11일 78세를 일기로 타계하여 현재는 대전국립현충원 장군묘역 1-4에 안장되어 있다.
자 기 주장이 강하고 모든 일을 확신에 의해 처리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의 단면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그가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참위로 임관되어 제7연대 창설에 임하고 있을 때, 문용채 부위가 A중대장으로 부임하자 “나의 고향에 와서 연대의 창설자로서 보람을 느끼고 일을 해왔습니다. 우선 A중대의 창설이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중대장을 양보해 주시면 그 후에는 대대장으로 받들겠습니다”고 호소할 정도로 자신에 찬 인물이었다.
또한 주한 미 군사고문단 참모장 짐 하우스만의 회고록에 의하면, 민기식 부대장은 “미군 고문관이 한국인을 아프리카인만도 못하게 취급한다”는 불평과 함께 미군 고문관을 구타하였다. 조사 결과, 고문관의 잘못이 인정되어 고문관은 전출되고 민 장군은 현직을 유지하였다. 어찌되었든 구타를 가장 수치스런 일로 생각했던 미군으로서는 흔치 않은 조치였지만, 민 장군의 군인정신에 대한 일면을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이처럼 그는 전장에서는 솔선수범의 지휘철학으로 장병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일상에서는 자신에 찬 행동으로 부하들을 안심시키는 명 지휘관이었다.


2. 공적

민기식 대령은 전쟁발발 직후인 7월 7일 의정부지구전투와 한강.시흥지구방어전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해편된 제7사단장에 보임되어 전주에서 학도병 500명을 보충받고 제3연대와 제9연대를 기간으로 사단을 재편하였다. 7월 14일 재편된 제7사단을 민부대로 개칭하여 용안.전주.임실.남원.운봉.함양 등지로 철수하면서 북한군 제6사단의 호남 우회진출을 지연시킴으로써 아군의 낙동강 서남부의 방어태세 구축에 크게 공헌하였다.
8 월 15일 민기식 대령은 부대를 이끌고 포항지구전투에 참가, 터널고지에서 북한군 제5사단의 진출을 저지한 후 작전지역을 제3사단 23연대에 인계하고, 낙동강 북부의 의흥지구로 이동하여 방어전을 전개한 후 제1군단에 배속되었다.
8월 29일 대구의 제11사단장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전시특명검열부 보좌관, 대구방위사령관 등에 보임되었으며, 아군의 반격이 진행되던 9월 26일에는 경인지구계엄사령부 부사령관으로서 적의 남침으로 민심이 동요되고 사회질서가 극도로 혼란한 국면을 진정시키고 국민의 안녕과 치안업무 수행에 만전을 기하였다.
10월 8일 제5사단장에 전보되고, 사단장 부임 10여일 만에 육군준장으로 진급한 그는 10월부터 11월 중순까지 제3군단에 배속된 사단을 지휘하여 포항.지리산.김천.영주 등지에서 공비소탕작전을 실시하고, 11월 22일 육본으로 배속이 변경되어 서울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북진을 거듭하던 아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철수작전을 개시할 무렵 사단은 가평, 청평, 춘천지구 경비임무를 부여받고 적과 일대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에 밀려 퇴로를 차단당한 지방공비와 북한군 패잔병은 산악지대로 잠복하였고, 이들 부대의 대병력은 철원, 연천, 화천, 양구 일대에 집결하여 제2군단을 편성하였다. 급편된 제2군단은 중공군의 남진에 맞춰 국군 제2사단 저지선을 돌파하고 수도 서울을 재점령하기 위해 청평까지 침입하였다.
제5사단은 사단장 민기식 준장의 지휘 하에 서울 북방 40리까지 침입한 적에게 반격을 감행하였다. 의정부 방면으로 우회하여 일대 반격을 개시한 사단은 11월 24일 사단지휘소를 청평으로 이동하였으며, 28일에 제27연대와 제36연대가 가평 부근에 침입한 적 게릴라부대를 격퇴하고 치안을 유지하였다. 또한 12월 2일 제27연대와 제31연대는 사단장의 용감한 진두지휘와 탁월한 전투지휘로 적의 강력한 화력을 격파하고 춘천을 탈환하였으며, 계속 38선까지 적을 추격.격퇴하여 수도 서울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하지만 1951년 중공군의 신정공세에 밀려 춘천-홍천-원주로 철수, 1월 3일 미 제10군단으로 배속 변경된 제5사단은 충주-영주로 철수하여 2주에 걸쳐 부대정비를 실시한 후 영주-횡성으로 이동, 전선에 복귀하였다. 2월 5일부터 실시된 ‘라운드업’ 작전의 우일선 사단으로 홍천을 공격하였으나 중공군의 2월 공세에 밀려 횡성 우측방 포동리에서 새말-주천으로 철수하였다.
제5사단은 단양에서 부대정비를 실시한 후 3월 6일 안흥-태기산의 아이다호선까지 진격하고 4월 5일 소양강을 도하하여 인제를 경유 원통리에 이르는 캔사스선에 다다랐다. 그러나 4월 22일 중공군의 제1차 춘계공세로 인해 원통리에서 아야리로 철수하였다. 5월로 접어들어 소양강 남안 음양리-어론리선으로 진격한 사단은 중공군의 제2차 춘계공세로 인해 어론리에서 풍암리선으로 철수하여 부대를 재편성하였다. 이어 풍암리에서 원통리로 재진출하여 미 제2사단 작전지역을 인수한 후 원통리-서화리 진격작전을 전개하였다.
7월 19일 작전지역을 제8사단에 인계하고 군단예비가 되어 현리로 이동한 제5사단은 8월부터 피의 능선에서 혈전을 전개하였다. 8월 18일부터 개시된 983고지(일명 피의 능선)전투에서 제5사단은 북한군 제2군단 27사단과 983고지, 773고지, 940고지 점령전을 전개하였다. 당시 적 제27사단은 수백 개의 엄체호와 유개교통호를 구축하며 난공불락의 요새라 호언장담하고 있었다.
8월 18일 공격준비사격에 이어 06시 30분 제36연대 3대대가 938고지를, 제2대대가 940고지 및 773고지를 공격하였다. 적진에 가까이 접근하자 지뢰지대와 엄체호로부터의 사격으로 인해 아군의 공격은 많은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포병의 지원사격으로 적의 경계진지와 지뢰지대를 파괴한 후 적진에 접근하였으나 후사면의 적으로 인해 아군의 공격은 940-773고지 점령으로 선회하였다.
이날 밤 제5중대 특공대는 773고지 후사면으로 접근하여 수류탄을 투척하며 돌격전을 감행, 20일 02시에 773고지를 점령하였다. 이어 21일 저녁 제2대대장은 5개 중대를 3개 방향으로 투입하여 940고지를 공격하였으며, 20시경 고지를 확보하였다. 제3대대 11중대는 21일 밤 940고지 쪽으로 우회 기동하여 은밀히 983고지 후사면으로 접근한 후 치열한 전투 끝에 다음날 11시 30분 마침내 983고지를 점령하였다.
피의 능선전투를 마친 제5사단장 민기식 준장은 제8사단으로부터 원대복귀한 제27연대를 공격제대로 하여 가칠봉전투를 전개하고 작전지역을 제3사단에 인계한 다음 양양으로 이동하였다.
제5사단이 양양으로 이동하여 부대정비 및 교육훈련을 실시하던 11월 17일 사단장 민기식 준장은 육군본부로 전출명령을 받아 육군대학 부총장과 교무부장직을 겸임하였다. 그후 1953년 1월에 제63연대와 제65연대, 제66연대를 기간으로 강원 양양에 제2교육여단이 창설되자 제2교육여단장으로 부임하였으며, 2월 9일 제2교육여단이 제21사단으로 승격됨으로써 초대 사단장에 취임하였다. 5월 육군소장으로 진급한 그는 동부전선 제11사단의 건봉산지구 방어임무를 인수하여 수행하던 중 휴전을 맞게 되었다.


* 참고문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2003
국방부, 자유민에게 전해다오 제1집, 1955
육군본부, 한국의 전쟁영웅들, 1992
이원복, 호국용사100선, 명성출판사, 1976
국방부, 호국의 별 제3집, 1979
포병학교, 포병의 발자취, 1963
병학사, 내 젊음 조국에, 1987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38도선 초기전투: 중동부전선 편, 1982
국방일보,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2002. 11. 9
국방부, 한국전쟁사 제8집, 1975
공군본부, 공군사 제1집
육탄 10용사 현충회, 육탄 10용사, 도서출판 法政, 1986
국방부, 호국의 별, 제6집, 국방부 정훈국, 1982
국방일보, 한국의 전쟁영웅들 (1) 육탄 10용사, 1992. 6. 4
국방부, 호국전몰용사공훈록 제3집,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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