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사단장 : 이준식 중장
칠성은

초대 사단장 : 이준식 중장

칠성관리자 0 18,901 2007.05.01 11:51
● 한문 : 李俊植
● 생몰연대 : 1901.2.18-1966.4.5
● 출신지역 : 평남 순천
● 최종계급 : 육군 중장
● 상훈내용 : 태극무공훈장
● 참고문헌 :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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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1901. 2 평남 순천 출생
*1949. 1 육군대령 임관
*1949. 5 수도사단장
*1949. 5 육군준장
*1949. 6 제 7사단장
*1950. 6 육군사관학교장
*1950. 7 제 3사단장
*1950. 10 제 1군단 부군단장
*1951. 4 육군본부 전방지휘소장
*1951. 6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1952. 5 육군소장
*1952. 9 국방부 제 1국장
*1954. 4 교육총감
*1954. 7 제 1훈련소장
*1956. 2 제 5관구사령관
*1959. 5 육군중장
*1959. 5 예편
*1966. 4 타계

1. 생애

조국이 해방될 무렵 20년간의 중국군 생활을 통해 소장(少將)의 계급에까지 올랐던 이준식(李俊植) 장군은 1901년 2월 18일 평안남도 순천에서 출생한 후 서울의 휘문중학을 졸업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운남군관학교(강무당)를 졸업하였다. 1922년 9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의 창설을 선언할 때 총사령 이청천 장군 휘하의 참모로 참여하였으며, 또한 임시정부 산하 군무부 제1지대장 겸 제1징모분처 주임으로 임명되어 산서성 대동을 근거지로 산서성과 하남성 일대에서 광복군 모병활동에 주력하였던 애국지사이기도 하였다.
광복군 대좌로 항일투쟁에 전념하다 조국의 광복과 함께 귀국, 육군사관학교 제8기 특별반에 입교하여 일주간의 교육을 마치고 1949년 1월 1일 군번 12445의 육군대령으로 임관된 이준식 장군은 서울 용산에서 제1연대와 제9연대 그리고 제17연대와 제19연대를 기간으로 하여 창설된 제7여단의 초대 여단장으로 부임, 석주암 중령을 참모장으로 하여 부대를 편성하였다. 이후 1949년 2월 1일 총사령부 명에 의해 제7여단이 수도여단으로 개칭됨에 따라 수도여단장으로 보직이 변경되었고, 동년 5월 12일에는 여단이 사단으로 승격되자 수도사단장에 보임되는 한편 육군준장으로 진급하였다. 이어 육군본부 잠정 포병사령부를 포병연대로 개칭하여 사단에 예속시킨 다음 1949년 6월 20일 육본명령에 의해 수도사단이 제7사단으로 개칭됨에 따라 초대 사단장에 취임하였다.
제17연대를 예속 해제하여 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을 변경시킨 그는 1949년 9월 4일 제9연대와 제19연대로부터 각각 1개 대대씩을 차출하여 1950년 1월 3일까지 지리산지구공비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공비토벌임무를 완수한 제7사단장은 육본명령에 의거 예하 제1연대를 동두천 북방에, 제9연대를 포천 북방에, 제19연대를 예비로 사단사령부인 의정부에 위치시켜 38도선 경비임무를 수행하였다.
이 장군은 6.25전쟁 발발 보름전인 1950년 6월 10일 육일명 제47호에 의거 유재흥 준장에게 사단지휘권을 넘겨준 다음 육군사관학교 교장에 임명되었다. 그가 육군사관학교장으로 발탁된 배경에는 광복군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또한 국군장병에게 ‘광복군의 후예’라는 자긍심을 불어넣기 위해 장교육성기관인 육군사관학교장에 광복군 출신을 기용하기로 한 정부의 의도가 깔려 있었다. 이에 따라 이 장군은 최덕신, 김홍일 장군에 이어 제8대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개전 초기에는 혼성제3사단장과 경인지구계엄사령관, 제1군단 부사령관 등으로 전장을 누볐고 전선이 교착된 후에는 육본 전방지휘소장, 작전참모부장과 행정참모부장, 국방부 제1국장 등 정책분야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휴 전협정이 체결된 후 육본 행정참모부장, 교육총감, 제1훈련소장, 제5관구사령관 등을 역임한 이준식 소장은 1959년 5월 14일 육군 중장으로 진급과 동시에 예비역으로 편입되었으며, 1966년 4월 5일 67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정부는 전쟁기간 중에 장군이 수립한 탁월한 전공을 길이 빛내기 위해 1954년 7월 6일 군인에게는 최고의 영예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였다. 현재 장군의 유해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4에 안장되어 있다.
국가의 주권을 상실한 시기에는 국가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광복군으로, 국가의 주권이 위협을 받는 난국에서는 적의 도발을 격퇴하기 위한 간성으로 우뚝 섰던 장군은 진정한 애국자이자 전쟁영웅이었다.


2, 공적

제3사단장 이준식 준장은 1950년 7월 16일부터 동해안 영덕지역에서 포항으로의 진출을 기도하던 북한군 제5사단의 침공을 2주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저지하고 국군과 유엔군의 낙동강방어선 형성을 용이하게 하는 전공을 세워 1954년 7월 6일 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 제187호)을 수여받았다.
6.25 전쟁이 발발, 국군이 한강 이남으로 철수한 상황에서 7월 1일 혼성제3사단장에 임명된 그는 제22연대와 제25연대, 육사 생도대대를 이끌고 금곡리-수원 축선상에 저지선을 형성하고 북한군 제3사단 8연대의 진격을 저지.지연함으로써 적이 전략적으로 차질을 빚는데 공헌하였다.
이후 국군 제1군단과 제2군단이 중부전선의 소백산맥 일대에서 지연전을 전개하고 있을 무렵, 이준식 준장이 지휘하는 제3사단은 동해안의 영덕지역에서 이주일간의 치열한 혈전 끝에 북한군 제5사단의 침공을 저지하는데 성공함으로써 포항-경주선을 신속히 점령하여 적 제2군단의 기동을 지원하고 궁극적으로 부산으로 진출하려던 적의 기도를 좌절시키는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1950년 7월 10일 제3사단장에 임명된 이준식 준장은 육본으로부터 제23연대와 독립 제1대대로 영해-영덕간을 방어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당시 제23연대는 평해에서 철수하여 영해에서 재편중에 있었고, 사단은 적을 축차 지연한다는 작전 방침을 세우고 12일까지 영해 남방의 목골재-가마실재에서 진지 편성에 주력하였다.
반면 적 제5사단은 유엔 해.공군의 폭격과 병참선의 신장으로 기동 속도가 현저히 둔화되어 뒤늦게 영해에 진입한 후 영덕을 목표로 제11연대와 제12연대를 해안도로로, 제10연대를 진보-청송 방향으로 우회시켜 영해 남쪽 진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으며, 또한 태백산으로 진입한 적 제766부대는 이미 청송 방향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제23연대와 독립 제1대대는 병력과 화력의 열세로 인하여 방어진지가 돌파되기 시작하자 명령에 따라 축차진지로 철수하기 시작하였고, 계속된 적의 공격을 받아 16일 자정 무렵에는 진지가 돌파될 위기에 처했다. 다음날 오전 사단장은 현 전선의 유지가 곤란하다고 판단하고 일단 제23연대를 영덕 남쪽 181고지와 207고지에, 독립 제1대대를 208고지로 철수시키면서 적의 주력이 영덕으로 진입하면 즉시 해.공군의 화력지원을 받아 영덕을 탈환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16일 저녁 적이 영덕으로 진입하자 다음날 미명부터 사단장의 요청으로 출동한 전투비행대대와 유엔 함대가 영덕 시가지 및 주변 일대를 강타함에 따라 많은 손실을 입은 적이 영덕 북방으로 퇴각함으로써 영덕을 탈환하였으나, 다음날 적의 공격으로 다시 상실하였다.
영덕의 상실로 동해안 방면에 위기 상황이 재연됨에 따라 사단장은 해.공군의 화력지원을 요청하고 21일부터 영덕탈환을 위한 작전을 전개하였다. 유엔 해.공군 및 포병의 지원화력이 집중됨에 따라 적은 많은 손실을 입었음에도 23일 저녁부터 영덕 이남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였다. 제23연대는 적의 압력이 가중됨에 따라 혈전을 거듭하였고, 특히 중요 요충인 181고지에 대한 공방은 치열하였다. 181고지를 둘러싸고 주간에는 국군이 유엔 해.공군의 지원을 받아 공격하면 야간에는 북한군이 공격하는 근접전이 수일간 계속되었으며, 하루에도 수 차례씩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24일 대구에서 재편을 마친 제22연대와 포항경비부의 육전대가 강구에 도착하여 제3사단의 작전을 지원, 사단의 전투력은 크게 증강되었다. 사단장은 제22연대를 영덕탈환전에 투입할 예정이었으나 181고지와 207고지가 적에 피탈되어 이를 탈환하는데 투입하기로 작전 방침을 수정하였다.
25일 저녁, 유엔 해.공군의 화력지원을 요청하고 제22연대에 탈환명령을 하달하였다. 자정부터 1시간에 걸친 함포사격이 시작되자 적의 주력은 퇴각하였고, 제22연대 3대대는 181고지를, 제2대대는 207고지를 탈환하는 한편 이어진 적의 반격을 격퇴하였다.
목표고지를 확보한 사단장은 이어서 영덕탈환을 결심하고 유엔 해.공군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27일 미 제7함대와 비행대대 및 제159야포대대 1개 중대가 영덕 주변을 집중 강타함과 동시에 제23연대가 제22연대를 초월,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적이 모든 화력을 동원하여 완강히 저항함으로써 치열한 접전이 전개되었다. 유엔 공군기의 폭격과 유엔 순양함의 함포사격, 구축함의 후방차단사격 등 국군 제3사단의 영덕탈환을 위한 3면 합동작전이 수 일간 계속되자 적은 영덕 북방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로써 제3사단은 8월 2일 18시 영덕을 재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처럼 국군과 유엔군이 영덕지구전투에 초미에 관심을 경주한 것은 전술적으로 중요한 포항항구와 영일비행장의 확보를 위해서는 더 이상 후퇴해서는 안되기 때문이었다.
적시에 가해진 유엔 해.공군의 화력지원, 예하부대의 철수와 투입시기에 대한 예리한 판단 등 사단장의 탁월한 지휘력이 돋보였던 이 전투로 북한군은 포항 진출이 2주일 이상 지연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의 낙동강방어선 형성이 용이하게 진행되어 결과적으로 반격으로 이전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그 후 국군 및 유엔군의 총반격으로 인천 및 서울지역이 수복되자 9월 25일부로 경인지구계엄사령관에 부임한 이준식 준장은 수복지구의 패잔병 소탕과 치안 확보에 전력하고 10월 16일 제1군단 부군단장으로 전보되었다.
1951 년 3월, 중공군의 2월 공세로 인하여 원주 이남까지 후퇴했던 제1군단은 현리-양양을 연하는 카이로선으로의 진격작전을 전개하였다. 부군단장으로 이 작전에 참여한 장군은 3월 26일 제9사단 전선을 시찰하고 군단지휘소로 복귀하던 군단장 김백일 소장이 항공기사고로 전사하자 임시로 군단을 지휘, 동해안의 전술적 요충인 양양을 확보하였다.
양양진격작전이 종료되고 1951년 4월 27일 육군본부로 전출명령을 받은 장군은 전방지휘소장, 참모차장 대리, 작전참모부장을 거쳐 1952년 5월 19일 육군소장으로 진급하였으며, 국방부 제1국장으로 재임하던 중 휴전을 맞게 되었다.


* 참고문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2003
국방부, 자유민에게 전해다오 제1집, 1955
육군본부, 한국의 전쟁영웅들, 1992
이원복, 호국용사100선, 명성출판사, 1976
국방부, 호국의 별 제3집, 1979
포병학교, 포병의 발자취, 1963
병학사, 내 젊음 조국에, 1987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38도선 초기전투: 중동부전선 편, 1982
국방일보,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2002. 11. 9
국방부, 한국전쟁사 제8집, 1975
공군본부, 공군사 제1집
육탄 10용사 현충회, 육탄 10용사, 도서출판 法政, 1986
국방부, 호국의 별, 제6집, 국방부 정훈국, 1982
국방일보, 한국의 전쟁영웅들 (1) 육탄 10용사, 1992. 6. 4
국방부, 호국전몰용사공훈록 제3집,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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