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런 선배 전우 : 이성가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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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선배 전우 : 이성가 장군

칠성관리자 0 17,778 2007.05.01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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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문 : 李成佳
● 생몰연대 : 1922.10.9-1975.3.15
● 출신지역 : 만주 퉁화(원적지 평북 자성)
● 최종계급 : 육군 소장
● 상훈내용 : 태극무공훈장, 멕시코일등수교훈장
● 참고문헌 :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약력

*1922. 10 만주 퉁화 출생
*1946. 6 군사영어학교 졸업 및 육군부위(중위) 임관
*1948. 11 제 20연대장
*1949. 10 태박산지구 전투사령관
*1950. 6 제 8사단장
*1950. 8 육군준장
*1951. 3 제 9사단장
*1951. 9 제 7사단장
*1952. 8 육군소장
*1955. 11 제 5관구 사령관
*1956. 9 제 3군단장
*1957. 7 제 5군단장
*1960. 6 육본 정보참모부장
*1960. 10 육군대학 총장
*1962. 3 예편
*1975. 3 타계


1. 생애(1922-1975)

원적지가 평안북도 자성군 삼풍면 인풍동으로 1922년 10월 9일 만주 퉁화에서 출생한 이성가(李成佳) 육군 소장은 신흥무관학교 칠도구분교장(七道溝分校長)으로 독립군 양성에 크게 공헌하고, 만주통화성 임강현 독립군 총감및 상해임시정부 참의원을 지낸 부친 이관석(李寬錫) 장군의 영향을 크게 받아 1943년 3월 중국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였다. 해방 당시, 중국 남의사 북경책임자 진영륜 소장의 권유로 그의 밑에서 정보기관원으로 활동한 그는 조국해방을 기해 고국으로 돌아와 1946년 6월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였다. 군번 10037의 육군 부위(중위)로 임관한 그는 제1연대 창설 등 창군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10월 제4Т育揚막關?'10.19 여.순사건'을 진압한 그는 1949년 10월 태백산지구전투사령관으로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태백산지구의 공비를 토벌하는데 큰 전공을 세웠다.
제7사단장으로 부임한 그는 중공군과 혈전을 벌인 끝에 전술적 요충지인 백석산과 크리스마스고지를 성공적으로 확보하고 휴전을 맞았다. 휴전 이후 그는 제3군단장과 제5군단장, 육본 정보참모부장을 거쳐 육군대학 총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1962년 3월에 육군 소장으로 예비역에 편입되었다. 예편 후인 1962년부터 1971년까지 약 10년 동안 멕시코, 터키, 오스트리아 주재대사로서 외교 일선에서 국가를 위해 봉직한 그는 1973년 제9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활동하던 1975년 3월 15일 향년 53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6.25전쟁 기간에는 호국의 선봉으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군문을 떠나서는 외교 발전에 헌신했던 그는 국난극복과 국가발전의 공로로 1953년 5월 20일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은 것을 비롯해 을지, 충무, 화랑, 미 은성훈장 등 무공훈장과 멕시코 일등수교훈장, 오스트리아 일등수교훈장 등 수많은 훈장을 수여받았다.

2. 공적

1953년 5월 20일 이성가(李成佳) 육군 소장에게 수여된 훈기번호 제112호의 태극무공훈장 공적서의 공적내용은 '1950년 6월 25일 제8사단장으로서 북한군을 남침을 강릉, 주문진지구에서 저지 지연시키는가 하면 , 9월 10일 영천전투에서는 적 제15사단의 주력을 궤멸하고 이어진 반격작전에서 파죽지세로 의성, 영천을 탈환하였으며, 예천과 풍기에서 퇴각하는 적을 섬멸하였다. 뿐만 아니라 1951년 1월에는 제7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양구지구 산악전투에서 901고지와 883고지 등을 완전 점령, 아군의 진격을 유리하게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성가 대령이 지휘하는 제8사단은 2개 연대로 편성되어 동해안 지역 방어를 책임지고 있었는데 제10연대는 38도선에 그리고 제21연대를 예비로 삼척에 배치하였다. 사단의 방어지역은 진흑동~기사문리의 26㎞로서 적이 남침하면 강릉 고수를 위해 제21연대를 좌일선에 투입하여 2개 연대로 38선에서 저지.격멸하며, 이를 위해 38도선 남쪽의 고지군에 경계진지를 편성하고 광원리-오대산-연곡천에 주저항선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6월 중순에 사단은 공비토벌을 위해 각 연대에서 1개 대대씩 2개 대대를 오대산과 계방산 일대에 투입함으로써 적의 남침시 실제 가용병력은 4개 대대 규모에 불과하였다.
반면 북한군 제5사단은 양양-강릉의 해안도로 축선에 주력을 투입하여 북쪽에서 제10연대를 정면공격하고 제766 유격부대와 제549 육전대를 정동진과 임원진으로 상륙시켜 제21연대의 증원을 차단함으로써 2개 연대를 각개 격파하고 강릉을 남북으로 협공하려 하였다.
이러한 계획하에 적 제5사단이 6월 25일 04시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한 후 주문진으로 진격하자, 38도선을 경계하던 제10연대의 전방부대들은 적의 포병화력에 압도되어 분계선 남쪽의 저지진지로 철수하였으나 저지진지도 점령하지 못하고 제2대대는 주문진으로 그리고 제1대대는 광원리 부근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한편 강릉 남쪽 정동진리 등명동에 상륙한 1개 연대 규모의 적의 육전대는 삼척-강릉간 도로를 차단하기 위해 밤재를 점령한 후 1개 대대는 강릉을 향해 북상하고, 또 다른 1개 대대는 옥계 방향으로 남하하였다. 또한 07시경에는 임원진에 제766유격부대가 상륙하여 1개 부대는 태백산맥으로 침투하고 1개 부대는 삼척 방향으로 북상하였다.
강릉비행장에 본부를 둔 제8사단 이성가 대령은 상황보고를 접하고 제10연대로 하여금 적을 최대한 저지하게 하고, 삼척의 제21연대를 강릉으로 이동시켜 주저항선인 연곡천-사천선에서 적을 격퇴하기로 하였다.
육 군본부에 대한 증원요청이 좌절되자 이성가 사단장은 전쟁의 장기전을 예견하고 6월 25일 10시를 기해 작전지역 내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군수품의 소산과 군경 가족의 피난, 공공기관의 소개 등 대책을 강구하는 한편 민간 차량의 징발을 통해 기동력을 확보하였다.
제10연대장 고근홍 중령은 적의 후방상륙에 대처하기 위해 57㎜대전차포중대와 제4중대를 강릉 남쪽의 안목-안인진 일대로 급파, 안인진 해변에 접안을 시도하던 적의 선단을 격퇴하였으며, 제4중대는 안인진 서쪽 대포동의 방어진지에서 북상중이던 1개 중대 규모의 적을 격멸함으로써 위급한 국면을 타개하였다. 그러나 사단장 이성가 대령은 남쪽에서 협공하는 적에 대비하기 위해 강릉 남쪽 군선강에 방어진지의 급편을 결정하고 제10연대장에게 그 임무를 지시하였다.
한편 삼척의 제21연대장은 북평의 제1대대 수색대와 제1중대가 옥계 부근에서 남하하는 적 1개 중대를 기습공격하여 궤멸적 피해를 가함으로써 적의 상륙과 또한 적의 주력이 밤재를 차단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릉으로 이동명령을 받은 제21연대장은 이로 인해 북평-백봉령-삽당령-구산리로 우회 이동, 주력은 26일 10시 30분경 군선강 방어진지를 인수하였고 제3대대는 강릉으로 행군 본대와 합류하였다.
전투편성을 완료하고 제10연대에 배속되어 연곡천 주저항선 진지를 점령한 사단 공병대대는 전방대대인 제10연대 2대대의 철수를 효과적으로 엄호할 수 있었고, 제21연대의 군선강 배치완료 후 연狙?방어배치를 조정하면서 반격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제10연대 2대대가 6월 26일 밤 주저항선 전방의 감제고지인 천마봉을 공격 탈취하여 주문진 공격의 발판을 마련하자 사단은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러나 적이 27일 4시경 제8사단의 주문진 공격보다 1시간 앞서 공격준비사격을 천마봉에 집중하자 제2대대는 천마봉을 포기하고 분산철수 하였으며, 상황보고를 받지 못한 아군은 측방으로 접근하는 적을 아군으로 오인함으로써 주저항선이 돌파되고 말았다.
이때 증원된 제21연대 3대대가 사천선에 투입되어 분산 철수하는 병력을 수습하고 적을 저지함으로써 최고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또한 제18야전포병대대는 포 단위 사격을 계속하여 주저항선을 돌파한 적의 진출을 결정적으로 지연시켰으며, 이로 인해 철수병력이 사천선에 저지진지를 편성할 시간적 여유를 주었다.
한편 제8사단장 이성가 대령은 전 전선의 전황을 알 수가 없자 일단 대관령으로 물러나 상황 추이에 따라 반격을 가하기로 결심하였다. 27일 14시를 기해 사단은 철수를 개시하여 대관령을 넘었고, 사단사령부와 제10연대는 유천리에 그리고 제21연대는 횡계리에 집결하였다. 이리하여 적은 21시 50분경 강릉에 진입하게 되었다.
사단장은 2개 연대의 재편성 상태를 점검한 후 강릉탈환을 결심하고 공격명령을 하달, 28일 아침 제21연대가 공격을 개시하고 제10연대 1대대도 구산리 동측 칠봉산에서 공격제대를 측방 엄호하였으며, 포병은 대관령 동편 보광리 입구에서 화력지원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제6사단사령부로부터 “원주로 철수하라”는 육본의 명령을 받은 제8사단은 공격을 중지하고 대관령으로 철수, 29일 원주로 향했으나 횡성 피탈 사실을 피난민으로부터 확인한 사단장은 목표를 제천으로 변경하였다.
제8사단장은 강릉에서 철수한 후 남한강 남안에 2개 연대를 배치하여 북한군 제8사단의 남진을 저지하였다. 아군은 적 사단의 전방지휘소는 물론이고 도하를 시도하는 적에게 공격을 가해 막대한 타격을 주었으나 적으로부터 배후의 위협을 받고 죽령으로 철수하여 저지진지를 점령한 채 방어에 돌입하였다.
제8사단은 이 지역에서 6일 동안이나 방어선을 유지함으로써 충주 방면의 북한군 제12사단이 단양 점령을 위해 전환투입되게 하여 전력운용의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고, 반면에 아군은 서부전선에서 저지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획득하였다.


* 참고문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2003
국방부, 자유민에게 전해다오 제1집, 1955
육군본부, 한국의 전쟁영웅들, 1992
이원복, 호국용사100선, 명성출판사, 1976
국방부, 호국의 별 제3집, 1979
포병학교, 포병의 발자취, 1963
병학사, 내 젊음 조국에, 1987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38도선 초기전투: 중동부전선 편, 1982
국방일보,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2002. 11. 9
국방부, 한국전쟁사 제8집, 1975
공군본부, 공군사 제1집
육탄 10용사 현충회, 육탄 10용사, 도서출판 法政, 1986
국방부, 호국의 별, 제6집, 국방부 정훈국, 1982
국방일보, 한국의 전쟁영웅들 (1) 육탄 10용사, 1992. 6. 4
국방부, 호국전몰용사공훈록 제3집,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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