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장군 김홍일 중장
칠성은

오성장군 김홍일 중장

칠성관리자 0 13,839 2007.05.01 11:32
● 한문 : 金弘壹
● 생몰연대 : 1898.9.23-1980.8.8
● 출신지역 : 평북 용천
● 최종계급 : 육군 중장
● 상훈내용 : 태극무공훈장
● 참고문헌 :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0011.jpg

※약력

*1898. 9 평북 용천 출생
*1920. 1 중국 귀주강무학교 졸업 및 소위임관
*1945. 4 한국광복군사령부 참모장
*1945. 11 중국군 소장
*1948. 12 국군 입대 및 육군준장 임관
*1949. 1 육군사관학교 교장
*1949. 3 육군소장
*1950. 6 육군참모학교 교장
*1950. 6 시흥지구 전투사령관
*1950. 7 제 1군단장
*1951. 3 육군중장
*1951. 3 예편
*1980. 8 타계


1. 생애

1898년 9월 23일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오송동에서 출생한 김홍일(金弘壹)은 구한말 일제의 탄압 속에서 오산중학교를 졸업하고 조국의 독립투쟁을 위한 웅지를 품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한 그는 1919년 중국 귀주성에 있는 육군강무학교를, 다음해에는 중국 귀주 육군학교 포병과를 졸업한 후 1921년 독립군 의용군 단대장이 되었으며, 1923년에는 한국의용군사령관을 지냈다. 1926년 중국국민혁명군 동로군 참모, 1937년 중국 19집단군사 참모처장, 1944년 중국청년군사대리참모장을 지낸 후 1945년 4월에는 한국광복군 참모장이 되어 항일전투의 선봉장으로 일본군을 소탕하고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지원하는 등 독립군으로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조국의 광복을 맞아 귀국한 그는 실전경험에 바탕을 둔 탁월한 지휘력을 인정받아 1948년 12월 12329의 군번과 함께 육군 준장으로 임관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시흥지구전투사령관이라는 중책을 맡은 그는 노량진, 영등포, 한강 남안을 연하는 선에서 북한군 제1군단과 6일간 전투를 전개하여 한강방어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이는 국군이 전략적으로 후퇴하고 미 지상군이 참전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했던 전략전술적으로 매우 의미있었던 전과였다.
이와 같이 부여된 임무를 훌륭히 수행한 김홍일 장군은 육군종합학교 총장으로 취임하여 전시에 급격히 소요가 증대되는 육군 간부의 양성에 전념하다가 1951년 3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예편 후 중화민국 대사로 임명되어 반공외교 강화에 진력하였으며, '5.16 군사정변' 후인 1961년 5월에는 외무부장관에 임명되었다. 외교활동에 주력한 그는 1964년부터 북조선해방통일촉진회장과 조국수호국민협의회 대표위원, 성우회장 등을 역임하고 1967년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하였다.
1971년부터 신민당 대표최고위원을 지낸 그는 광복회 회장, 국정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다 1980년 8월 8일 83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격동기에 태어나 조국광복 투쟁과 6.25전쟁을 통해 민족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구국의 일선에서 민족사에 찬연히 빛날 공적을 남긴 그는 이러한 공로로 태극무공훈장을 비롯하여 건국공로훈장, 중국대수경성훈장 등 수많은 훈장을 수상했으며, 그의 유해는 현재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평소에 학문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국방개론, 군대정신교육, 대륙의 분노 등 많은 연구서를 발간하기도 했으며, 특히 '국방개론'은 대한민국 국군의 정신적 모체로 작용하였다.
“부하를 사랑하라. 평소에 고락을 함께 하지 않은 부하는 전장에서 생사를 같이 할 수 없다. 청렴결백하라. 재물을 탐하면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잃을 것이다.” 이 말은 그가 사관생도에게 항상 강조하던 군인의 자세에 관한 일언이다.

2. 공적

1951년 7월 26일 훈기번호 제6호로 김홍일 육군 중장에게 수여된 태극무공훈장 공적내용에는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5일까지의 기간동안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서 분산하여 남하하는 아군병력을 규합하여 혼성수도사단과 혼성 제7사단을 편성하고 악전분투를 통해 우군의 후퇴를 엄호하였으며, 7월 5일 제1군단장에 취임해서는 화령장 일대에서 적의 정예 제15사단을 격파하여 청사에 빛날 대전과를 거두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1950년 6월 28일 새벽 미아리 방어선이 무너지자 국군은 극도의 혼란 속에서 철수를 시작, 28일과 29일 사이 한강 남안에서 철수병력의 집결을 완료할 수 있었다. 서울을 상실한 국군에게 한강은 방어에 가장 양호한 지형이었으며, 이제 한강선은 국군이 적을 어떻게 방어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존망이 결정될 만큼 중요하게 되었다.
서울이 실함되기 직전 채병덕(蔡秉德) 총참모장은 한강을 연한 방어선에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기로 결심하고 육군참모학교장 김홍일 소장을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 한강선 방어임무를 부여하였다. 시흥에 사령부를 설치한 김홍일 소장은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을 혼성제7사단장, 수도사단장 이종찬 대령을 혼성수도사단장, 제2사단장 임선하 대령을 혼성제2사단장에 임명하고 안양천에서 광진교에 이르는 한강 남안 24㎞ 정면의 방어편성에 임하였다.
6월 29일 오후 혼성제7사단은 7개 대대 병력으로 노량진-영등포간 강변지역과 동작동-노량진간 고지대 확보에 주력하였고, 혼성수도사단도 3개 대대 병력과 1개 장갑대대, 57㎜ 대전차포 2개 소대로 김포 방면과 영등포 방면에 각각 배치하였다. 또한 혼성제2사단은 신사리-말죽거리 일대의 방어준비에 주력하였고, 김포 방면에는 혼성병력 2,000여 명으로 구성된 김포지구전투사령부가 배치되었으며, 혼성제3사단과 제5사단은 수원에서 낙오병을 수습하였다. 한강방어선 부대에 대한 모든 지휘책임을 갖고 있던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통신망의 미비로 주로 혼성제7사단과 혼성수도사단만을 지휘하여 노량진-영등포의 방어에만 치중하였다.
29 일 밤부터 북한군 제3사단과 제4사단은 전차포와 화포의 집중적인 지원하에 여의도와 흑석동, 신사리 일대에서 탐색전을 전개하고, 밤섬 등에 도하 발판을 마련하였다. 북한군 제4사단은 30일 미명부터 여의도비행장으로 진출을 기도하였으나 혼성수도사단의 끈질긴 저항에 직면하여 무산되었다. 또한 적 제3사단도 흑석동 일대와 신사리 방면으로 본격적인 도하를 개시하였으나 혼성제7사단 제9연대의 결사적인 저지와 미 공군의 지원으로 도하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기갑연대 제2기병대대가 방어하고 있던 신사리는 포병의 지원을 받는 적 제3사단의 일부 병력에 의해 돌파됨으로써 지원부대인 제3연대마저 위태롭게 되자 혼성제2사단장은 재편중인 제5연대와 제16연대를 제3연대와 함께 남태령-우면산-95고지를 잇는 방어선에 배치하여 적을 저지하였다.
이렇듯 도하 첫날 북한군의 작전기도는 노량진 부근의 고지군을 장악하면 그 엄호아래 경인 상행선 철교를 이용, 전차를 도하시켜 한강선을 돌파하려 하였으나 국군의 저지작전에 의해 좌절되었다.
도하 이틀째인 7월 1일 미명 영등포 대안의 적 제4사단은 경부선 철교를 확보할 목적으로 편의대 1개 소대를 노량진 방면으로 침투시켜 아군을 교란하면서 제5연대를 필두로 대규모 도하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제8연대는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 소화기와 수류탄으로 적의 돌파를 분쇄하였다. 여의도 정면으로의 도하작전이 여의치 않자 적은 전차의 지원없이는 도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경부선 철교복구작업을 은밀히 실시하였다.
한편, 말죽거리 일대에서는 혼성제2사단 주력이 95고지 및 남태령 일대의 진지를 방어하는 데 주력하였고 제25연대는 판교 방향으로 침투한 적의 저지에 나섰다. 그리고 적의 주공을 방어하고 있는 혼성수도사단 및 혼성제7사단의 후퇴에 필요한 말죽거리-수원선 확보 를 위해 혼성제3사단 22연대가 판교 남쪽 금곡리 일대에서 제2저지진지를 편성하였다.
7월 2일 노량진 대안의 적 제3사단은 대체로 소강상태에 있었으며, 여의도 대안의 적 제4사단은 여의도비행장을 점령하고 혼성수도사단 제8연대 진지의 돌파를 기도하였으나 실패함으로써 여의도 방면의 전황도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말죽거리 정면의 상황은 신사리로 도하한 적 제3사단 8연대가 제5연대의 저지선을 돌파하여 95고지까지 진출함으로써 위기에 처했으나 미 공군기의 폭격으로 적의 진출은 정지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혼성제2사단이 주력 병력이 철수할 1번 국도의 엄호임무를 부여받아 말죽거리지역에서 철수하자 판교 금곡리에 배치된 혼성제3사단이 말죽거리-판교 축선의 방어를 담당하게 되었다.
7월 3일 적 제4사단은 복구된 경부철교를 통해 4대의 전차를 도하시킨 데 이어 후속병력을 영등포 방면으로 우회하는 등 노량진과 영등포 일대를 침공하기 시작하였다. 적 제3사단은 노량진 방면으로 도하하여 일부 병력이 영등포의 배후를 위협하고, 적 제6사단 14연대 일부 병력은 오류동을 돌파하여 영등포로 진출하였으며, 여의도 정면의 적 제4사단도 도하에 성공하여 영등포 방향으로 진출하였다. 이렇듯 영등포 실함이 눈앞에 다가오자 시흥지구전투사령관 김홍일 소장은 계획된 철수명령을 하달하면서 국군 주력을 부대별로 안양과 과천으로 후퇴시켰다.
한편, 한강방어선전투는 전쟁초기의 전국(戰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비록 적의 전차부대에 밀려 철수는 하였지만,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혼성부대로 1주일간이나 한강방어선을 지탱함으로써 수원 이북에서 국군의 주력을 섬멸하려던 북한군의 작전계획에 일대 차질을 주었다. 또한 시간적인 여유를 획득함으로써 미 지상군의 전개를 보장함은 물론 국군과 미군이 연합전선을 펼쳐 지연작전을 전개할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하는 등 아군의 차후작전에 새로운 전기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도 혼성병력의 운용에 관한 문제점을 노출하였는데, 당시의 상황하에서 불가피한 현상이었지만 부대의 건제와 병과를 무시한 혼성병력으로서는 효율적인 전투력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 전투를 통해 확인되었다.
한강방어선이 붕괴된 후 국군과 유엔군은 금강과 소백산맥 일대에 새로운 저지선을 시도하였다. 육군본부 개편계획에 의거 7월 5일 제1군단장에 오른 김홍일 장군은 예하의 제2사단 16연대 및 제25연대와 독립 제17연대를 지휘하여 진천 남쪽 봉화산-문안산 일대에서 전차와 포병으로 증강된 북한군 제2사단의 남침을 5일 동안 방어.저지하였으나, 전투력이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제1군단은 배후에서 위협을 받고 청주지역으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대전지역으로 진출하려던 북한군 제2사단은 당초의 계획이 5일이나 지연됨으로써 작전상의 차질을 초래하였고, 국군은 소백산맥을 연하는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확보할 수 있었다.
1950 년 7월 15일 제1군단 예하 독립 제17연대는 북한군 제15사단이 속리산으로 남하하여 상주 정면으로 침공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화령장 북쪽 금곡리와 동비령 일대에서 매복, 적의 선두부대인 제48연대를 기습하여 궤멸시켰다.
이후 제17연대와 임무를 교대한 제1사단은 화령장 북쪽에서 북한군의 진출을 3일간 저지한 후 함창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로 인해 문경지역에서 후퇴하고 있던 제2군단은 안전한 철수로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국군이 낙동강전선으로 철수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한편 제1군단 예하의 제8사단은 안동 북쪽의 천등산과 연곡동 일대에서 북한군 제12사단의 침공을 저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북한군 제8사단 소속 연대규모 병력이 서측방 풍산지역으로 침공하자 수도사단 제1연대를 지원받아 이들의 침공을 저지하였으나, 동측방에서 북한군 유격대가 배후로 침투하자 특수임무부대를 급파하여 저지하는 등 융통성 있는 대처로 4일 동안 방어전을 전개하였다.
이 전투로 북한군은 안동지역 진출이 지연되었고, 동해안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766부대를 안동지역으로 전용함으로써 작전의 차질을 초래하였다.
의성으로 철수한 수도사단 제11연대와 제8사단은 북한군 제8사단과 제12사단의 침공을 1950년 8월 3일부터 13일까지 11일에 걸쳐 저지하였다. 제8사단은 의성 북쪽 향로봉 일대에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북한군 제8사단의 침공을 저지하던 중 향로봉 진지가 돌파되자 수도사단 제18연대의 증원을 받아 탈환전을 전개하였으나 북한군 제12사단의 배후 위협으로 어쩔 수 없이 보현산으로 철수하였다.
이 전투로 북한군은 동부전선으로의 진출이 지연되었고, 왜관 북쪽에 있던 제15사단을 이동시켜 전투력을 보강함으로써 국군이 보현산과 기계지역 정면에 새로운 주저항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을 획득하게 하였다.
낙동강전선으로 철수, 방어에 돌입한 제1군단 예하 수도사단과 제3사단은 기계-안강-영덕-포항 일대에서 766유격대로 증강된 북한군 제5사단과 제12사단의 침공을 받았다. 제1군단은 북한군 제12사단이 청송-죽장-기계-안강 축선으로 침공하여 포항을 점령하자 동해안의 기지와 월포에 위치한 제3사단을 해상으로 철수시키는 한편 수도사단과 독립 제17연대 및 미 브래들리 특수임무부대를 투입, 역습포위작전을 전개한 끝에 적을 비학산 방면으로 격퇴하였다.
이 전투로 북한군 2개 사단은 낙동강전선의 동부지역 돌파작전에 실패하였고, 제1군단은 기계와 포항지역 북방으로 후퇴한 북한군을 추격하여 다음 단계의 반격작전으로 이행하게 되었다.

* 참고문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2003
국방부, 자유민에게 전해다오 제1집, 1955
육군본부, 한국의 전쟁영웅들, 1992
이원복, 호국용사100선, 명성출판사, 1976
국방부, 호국의 별 제3집, 1979
포병학교, 포병의 발자취, 1963
병학사, 내 젊음 조국에, 1987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38도선 초기전투: 중동부전선 편, 1982
국방일보,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2002. 11. 9
국방부, 한국전쟁사 제8집, 1975
공군본부, 공군사 제1집
육탄 10용사 현충회, 육탄 10용사, 도서출판 法政, 1986
국방부, 호국의 별, 제6집, 국방부 정훈국, 1982
국방일보, 한국의 전쟁영웅들 (1) 육탄 10용사, 1992. 6. 4
국방부, 호국전몰용사공훈록 제3집, 1997

******
중국군에서 활약할때 이미 소장이었고 한국에서 중장을 달았기 때문에 "오성장군"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습니다.

Comments

번호 포토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게시물이 없습니다.
Category
State
  • 현재 접속자 103 명
  • 오늘 방문자 1,110 명
  • 어제 방문자 1,232 명
  • 최대 방문자 6,359 명
  • 전체 방문자 1,947,461 명
  • 전체 게시물 36,668 개
  • 전체 댓글수 58,438 개
  • 전체 회원수 2,995 명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
광고 / ad
    Previous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