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휘 예비역대장

민경철(88.11충북) 0 14,278 2011.12.18 23:56
5연대에서 소,중대장을 보낸 기억을 국민일보 연재물에서 발췌하여 옮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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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철휘 (12) 7사단 신참 소대장 ‘호랑이 대대장’ 사랑 독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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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고대하던 실무부대 생활이 시작됐다. 7사단 소대장으로 첫 부임을 했다. 나는 사실 소대장을 마치고 서울에 있는 학군단 교관으로 오고 싶었다. 당시 대대장께서도 “너는 장기복무자로 선발됐으니 학군단 교관으로 갈 수 있는 우선권이 있다. 교관으로 가서 대학원 공부를 마저 하고 결혼도 하고 고등군사반(OAC)을 갔다 온 다음에 전방에 다시 와서 중대장을 하라”고 권유하셨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답변하고 휴가 때 학군단 교관 지원서를 제출하리라 마음먹었다.

내가 학군단 교관으로 가고 싶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소대장 생활 1년간 민통선 이북에서 근무하느라 민간인 구경을 한 번도 못해서 사람 냄새가 무척이나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마침 대대장께서는 나를 좋게 보셔서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셨다. 그 대대장님은 소대장들이 잘못을 하면 소대원들이 보는 앞에서도 부끄러울 정도로 불호령을 내리시는 열정적인 분이었지만 나는 그분에게 한 번도 꾸지람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대대장님이 나를 좋게 보시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소대장들이 소대원들을 데리고 어떤 교육을 하면 그 과목 하나만 하기 때문에 일정 수준에 오른 병사들은 추가적으로 더 할 일이 없었다. 가령 사격훈련을 하게 되면 사격장에서 소대원 전체가 동시에 사격을 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여덟 명 정도가 사격을 하면 나머지 인원들은 대기를 해야 한다. 그 가운데 몇몇 병사들이 소대장이나 선임 하사관(지금의 부사관)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흐트러진 행동을 할 수도 있다. 그럴 때 갑자기 대대장님이 교육 현장에 나타나서 야단을 치곤 하셨다.

어느 날 나는 소대원을 데리고 나가서 사격 훈련을 하게 되었는데 실사격을 하기 위해 대기 중인 병사들에게는 조준 및 격발 연습 등 PRI를 시켰다. 또 사격을 마친 병사들을 놀게 할 수 없어 추가로 수기 훈련을 시켰다. 수기 훈련이란 전시에 무선이나 유선이 다 두절이 되었을 경우에 깃발을 이용하여 서로 신호를 보내서 의사를 전달하는 훈련이다. 한창 교육이 진행되고 있을 때 갑자기 대대장님께서 나타나셨다. 처음에는 사격훈련 시간에 엉뚱한 짓을 한다고 야단을 맞을 각오를 하고 담담한 마음으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랬더니 대대장님 표정이 밝아지면서 얼싸안을 정도로 등을 두드려 주시고 악수를 깊게 해 주셨다. 수동적이지 않고 창의적으로 훈련을 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대대에서 회의를 할 때도 몇 번이나 “1중대 3소대장 이 소위는 이렇게 교육훈련을 잘하고 있더라”고 칭찬을 해주셨다. 또한 나에게는 만날 때마다 너무나 친절하고 자상하게 대해 주셨다. 지금 회상해 보면 “너희에게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습 3:20)던 말씀이 나에게 처음으로 이루어진 시절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분이셨지만 나에게는 언제나 따뜻하게 대해주셨다. 이처럼 나는 대대장님의 신임을 한 몸에 받으며 소대장을 잘 마치고 학군단 교관으로 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독립중대에 근무하느라 주일도 지키지 못했던 나에게 하나님이 큰 상을 주시는 것 같아 송구스러웠지만 좀 더 자유롭고 편한 군 생활을 기대했다. 그런데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학군단 교관으로 가라는 전속명령은 내려오지 않는 것이었다. 조바심이 났지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기도했다. 모든 것을 맡길 때 내가 짧게 드리는 기도다.

[역경의 열매] 이철휘 (13) 어긋난 ‘학군단 교관’ 꿈… 그러나 주님은 새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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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으로부터 신임을 얻고 미래가 보장된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어서 빨리 학군단 교관으로 갈 날이 오기만 기다렸다. 그런데 소식이 없었다. 이미 보름 전부터 다른 부대에 근무하는 동기생 중에는 학군단으로 차출돼 가는 사람이 있다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다시 대대장님께 휴가를 받아 육군본부에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러 갔다. 지금 생각해봐도 소대장 시절 모셨던 대대장님은 상하관계를 떠나 큰 형님처럼 자애로운 분이셨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불호령을 내리고 무서운 분이셨지만 나에게는 언제나 따뜻하게 대해주시고 진심어린 충고를 해주셨다.

관련 부서에 도착해 “이미 학군단 교관 발령 통보날짜가 보름이나 지났는데 왜 나는 아직도 명령이 안 나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담당자는 오히려 나에게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학군단 교관 발령이 날 때까지 보직을 변경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 않느냐. 근데 너는 이미 대대 인사장교로 명령이 나 있는 탓에 교관 선발에서 제외된 거다.”

학군단 교관으로 지원하고 명령을 기다리는 사이에 후임 소대장이 전입을 왔다. 나는 인수인계를 하고 부중대장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대대장님이 부르시더니 “어차피 학군단 교관으로 갈 것이니 그동안 대대 인사장교 대리근무를 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임시로 대대 인사장교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장교인사에 대한 명령권이 있는 연대본부에서 나를 대대 인사장교로 보직 명령을 내버린 것이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것만 같았지만 하는 수 없이 나는 대대 인사장교로서 전방에서 계속 생활을 하게 됐다. 그때는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 나의 보직을 가로막고 새로운 선물을 준비해주신 것이었다.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 37:24) 그러나 그때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을 알 까닭이 없었던 나의 마음은 너무나 후방에 오고 싶었다. 학군단 교관을 하면서 대학원 공부도 하고 결혼도 해 따뜻한 가정도 이루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학군단 교관의 꿈은 허무하게 날아가 버리고 대대 인사장교를 마친 후에는 연대 인사장교로 계속 근무해야 했다.

그러나 이왕 이렇게 된 것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고 중대장은 물론 전방 위주로 야전생활을 해서 나중에 장군까지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됐다. 그런데 전방 중대장을 하고 있는 선배들의 현실을 보면서 마음이 흔들렸다. 야전부대 중대장의 일상은 너무나 힘들고 초라하게 보였다. 보통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업무를 하고 그 이후에는 관사나 독신장교숙소(BOQ)로 퇴근해 개인 여가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병영에서의 정상적인 장교생활이다. 그러나 전방 중대장들의 일과는 시작되는 시간도 끝나는 시간도 없이 계속 부대 내에 머물면서 밀려 있는 일들을 처리해야만 했다. 휴가는 거의 갈 수 없을 정도로 바빴다. 얼굴은 새까맣게 타고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그런 중대장들의 모습을 보니 야전에서의 군 생활이 별로 매력이 없어졌다. 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역경의 열매] 이철휘 (14) 중대원 두명, 크레모아 폭약을 버터로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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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민 끝에 전방 위주로 전투경험을 쌓는 야전형 군인이 되기보다는 다시 교관을 하거나 위탁교육을 받아 학문을 하는 군인이 돼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시 성균관대학교에 전자정보처리시스템(EDPS)이라는 석사과정이 있었다. 군이 전산화를 도입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매우 전망이 밝은 코스였다. 나는 이 과정을 밟기로 마음먹고 육군본부에 지원해 입학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마저도 야전군의 소대장들이 너무 많이 지원해 공석이 많이 생기자 모두 취소되는 일이 벌어졌다. 나는 서울로 가는 꿈이 더 이상 나의 길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때 하나님께서 왜 나의 소망을 방해하셨을까?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이 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논 베르크 수녀원의 한 기둥에 씌어 있다는 “하나님은 한쪽 문을 닫으실 때 다른 한쪽 문을 열어두신다”는 사실을 그때 체험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또 다른 축복이었다. 왜냐하면 그때 그곳에서 친척집에 놀러왔던 아내를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설렌다. 그 후로 함께 교제하면서 사랑을 키워갔고 지금의 가정을 이뤘다. 결혼하고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경계초소(GOP)에서 중대장을 시작했다. GOP 중대장은 너무나 힘들고 어려웠다. 24시간 내내 부대에 있어야 한다. 민간인은 구경도 못하고 한 달에 고작 2박3일 동안 외박을 나갈 뿐이다. 그래서 딸아이는 낯선 나를 보기만 하면 울었다. 정상적인 가정생활 자체가 안 됐다. 계속해서 산 속에만 있다 보니 다시 후방으로 나가고 싶었다.

그러던 중 이제까지 육군에 전례가 없던 대형 사고가 터졌다. 우리 중대가 사단장님을 모시고 야간 각개전투 시범을 보이는 임무를 받았다. 예행연습 과정에서 ‘크레모아’의 위력이 예상보다 강하게 느껴졌다. 자칫하다간 대항군 역할을 하는 병사들이 다칠 우려가 있었다. 중대 간부들이 모여 토의한 결과 폭약의 양을 적게 하기로 하고 폭약을 조금씩 잘라내어 시범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런데 잘라낸 폭약을 처음 본 병사 두 명이 버터로 착각해 야외훈련 중 밥에 비벼 먹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처음 두 명의 병사가 똑같은 증상으로 내 앞에서 쓰러지자 나는 식중독일 것이라 생각했다. “둘이 같이 밥을 먹었는가?” 물었더니 선임하사가 “둘이 밥에 버터를 비벼 같이 먹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식중독이라 확신한 나는 대대 상황실에 앰뷸런스를 요청한 후 대대장님에게도 지휘보고를 했다.

대대 군의관이 훈련장에 와서 환자들을 태우고 떠나자마자 이번엔 대대장님 지프차가 나타났다. “한겨울에 식중독이라는 것이 좀 이상하다. 먹다 남은 버터를 가져와 봐라.” 그런데 선임하사가 들고 온 것은 버터가 아니었다. 신문지에 둘둘 말려져 있는 것은 지난 시범 때 잘라내어 감춰뒀던 폭약이었다. 나는 그제야 상황파악이 됐다.

“대대장님! 큰일 났습니다. 이제 보니 병사들이 먹은 건 버터가 아니라 폭약 덩어리입니다.” 내 얘기를 듣는 대대장님의 낯빛이 점점 하얗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대대장님은 신속히 무전으로 헬기지원을 요청하셨다. 나는 그 길로 연대장님에게 불려갔다. “자네는 육군 역사에 없는 사고를 저질렀으니 나를 원망하지 말고 새 길을 찾기 바라네.” 그러더니 중대장 보직해임 명령서에 내가 보라는 듯이 아주 천천히 서명을 하셨다
[역경의 열매] 이철휘 (15) ‘폭약 버터’ 사건… 그건 시련 아닌 예비된 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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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대장실로 돌아와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나 생각을 하면 할수록 기도를 드리는 것도 잊어버릴 만큼 머리가 텅 비어 있었다. 그저 앞으로의 일들이 막막하기만 했다. 그런데 헬기로 수도통합 병원까지 후송됐던 병사들이 위세척을 빨리 하는 덕분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소식이 왔다. 아까운 젊은이 둘을 어처구니없는 일로 잃을 뻔했는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 덕분에 나의 보직해임은 없던 일로 용서가 됐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그간 분망한 군 생활을 핑계로 잠시 소홀했던 하나님을 생각하며 두 손을 모았다. 마음속에서 나지막이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시 32:8)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이번 일로 뼈저린 교훈을 몇 가지 얻었다. 사고는 예상치 못한 일로 시작된다는 것이다. 폭약 덩어리를 버터로 생각하고 밥에 비벼 먹을 거란 상상을 누가 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그 발단이 된 편법적인 일을 하지 말아야 했다. 원형의 탄약에서 폭약을 잘라낸 것이 잘못이었고 시범 후에는 그것을 즉시 반납해야 했다. 또한 어떤 문제가 생기면 보고에만 의존하지 말고 현장이나 현품을 직접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대대장님이 먹다 남은 버터 덩어리를 가져와 보라고 할 때까지 몇 시간 동안 선임하사의 보고만 믿고 현품을 확인해 볼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만일 내가 버터의 실체를 빨리 확인해 헬기 요청시간을 앞당겼더라면 병사들의 생명은 더 안전했을 것이다.

나는 군 생활 동안 이 교훈을 적용하려 노력했다. 결심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어느 방안이 원칙에 가까운가에 기준을 두었다. 한 가지 일이 끝나면 반드시 결과보고를 받았다. 현장에 자주 가보고 지휘관들이 보고하면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래? 어디 한번 보자!”고 하였다. 그래서 나의 현장방문 시간은 항상 계획보다 오래 걸렸다. 어떤 때는 부하를 믿지 못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곤 했지만 내가 그렇게 함으로써 현장이 확인되고 행동으로 실천되는 풍토가 조성되는 거라 믿었다.

드디어 1980년 2월 기다리던 고등군사반(OAC) 입교 명령이 났다. 첫 부임지인 7사단에서 60여 개월을 보낸 후 처음으로 오전 8시에 출근해 오후 5시면 퇴근이 보장되는 보병학교에서의 군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교회도 매주 빠짐없이 나갔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도 늘었다. 마치 천국처럼 느껴졌다. 나는 교육을 받으며 여기저기 어떻게 하면 보병학교 교관으로 남을 수 있는가 물어보았다. 첫째는 전방에서 중대장을 마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이 조건은 충족됐다. 둘째는 교육성적이 상위 30% 안에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를 위해 매일 밤샘을 하며 죽어라 공부에 매달렸다. 교육과정의 3분의 2 가량을 지나면서는 상위 10% 안에 들게 됐다. 나는 교관으로 남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고 마음 편히 교육수료를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후반기 군인력운영계획이 변경되면서 우리 기수에서는 교관을 한 사람만 뽑게 됐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전방으로 가는 신세가 됐다. 이처럼 나의 군 생활은 이상할 정도로 나의 희망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는 말씀처럼 그것은 나를 위한 또 다른 축복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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