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청천강지구 전투
칠성은

제1차 청천강지구 전투

칠성관리자 0 14,134 2007.05.01 11:29
● 전투시기 : 1950.11.3-11.5
● 전투지역 : 청천강 일대
● 주요지휘관 : 월튼 워커(Walton H. Walker) 중장, 프랜크 밀번(Frank W. Milburn) 소장
● 참고문헌 : 한국전쟁사(국방부), 한국전쟁사(전쟁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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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차 청천강지구 전투의 개요

11월 초의 1차 청천강지구 전투는 진격하던 아군이 중공군과 조우하여 격전을 벌인 전투로 수적 열세 속에서 격전을 치른 아군은 인해전술로 침공하는 중공군에 맞서 급박한 상황 속에서 전투를 벌였다. 수적 열세로 인해 후방의 부대를 급거 전방으로 이동 시키는 필사적인 전투를 벌여 적을 격퇴하고 진격하였으나 이후, 철수를 거듭할 수밖에 없게 된다.

2. 1차 청천강지구 전투의 주요 지휘관

*아군
미 제8군 사령관 중장 월튼 워커(Walton H. Walker)
제 1군단장 소장 프랜크 밀번(Frank W. Milburn)
제 24사단장 소장 존 처치(John H. Church)
제 5연대장 대령 존 트록모튼(John L. Throckmorton)
제 19연대장 대령 네드 무어(Ned D. Moore)
제 21연대장 대령 리처드 스테픈스(Richard W. Stephens)
제 1기갑사단장 소장 호버트 게이(Hobart R. Gay)
제 5기갑연대장 대령 마르셀 크롬퀘즈(Marcel B. Cromqez)
제 7기갑연대장 대령 윌리엄 해리스(William A. Harris)
제 8기갑연대장 대령 레이몬드 팔머(Raymond D. Palmer)
영 제 27여단장 준장 바질 코드(Basil A. Coad)
Middlesex대대장 중령 에이 맨(A. M. Man)
Argyll대대장 중령 지 넬슨(G. L. Neilson)
호주군 대대장 중령 아이 퍼거슨(I. B. Ferguson)
제 1사단장 준장 백선엽
제 11연대장 대령 김동빈
제 12연대장 대령 김점곤
제 15연대장 대령 조재미
병력 : 약 45,000명

*적군
중국 제 13병단장 이천우
제 38군장 송상근
제 112사단장 강옹휘
제 113사단장 당청산
제 114사단장 적중유
제 39군장 오신천
제 115사단장 장갈성
제 116사단장 왕 양
제 117사단장
제 40군장 한선초
제 118사단장 등 악
제 119사단장 남센웬
제 120사단장 서국부
제 50군장 증택생
제 148사단장 조학정
제 149사단장 용 약
제 150사단장 왕가선
제 66군장 소신괴
제 196사단장 성소보
제 197사단
제 198사단
병력 : 약150,000명


3. 1차 청천강지구 전투의 진행과정

가. 전투 전의 개황

10월 24일 맥아더(MacArthur) 라인의 철폐선언에 따라 만포진-신의주의 한만국경선을 목표로 무제한진격을 개시한 미 제 8군은, 25일에 제 6사단(사단장 준장 김종오)의 제 2연대(연대장 대령 함병선)와 미 제 1군단의 우익인 제 1사단(사단장 준장 백선엽)이 각각 온정-운산선에서 중공군 대부대와 접전하여 격전을 벌임으로써 새로운 양상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제 6사단 7연대(연대장 대령 박부택)는 초산까지 진격하였다가 명령에 따라 반격을 시작하여 두만강변에서 또 다시 중공군의 급습으로 분산된 데에 이어 제 2연대(연대장 대령 함병선 대령)를 증원한 제 6사단 19연대(연대장 대령 김익렬)와 제 8사단 10연대(연대장 대령 고근홍)가 온정리 부근에서 중공군의 공세로 큰 타격을 받았다. 한편 운산으로 진격한 제 1사단이 완강한 중공군의 저항으로 진격이 계속 지연되자 미 제 8군 사령관 워커(Walton H. Walker) 중장은 미 제 1군단(군단장 소장 프랭크 밀번(Frank W. Milburn))예비로써 평양-진남포 경비 임무를 담당 중이던 미 제 1기갑사단(사단장 소장 호버트 게이(Hobart R. Gay))을 운산으로 진출시켜 제 1사단을 초월하는 즉시로 한만국경선을 목표로 진격토록 하였다. 이와 동시에 평양을 탈환한 다음 미 제 1군단의 작전 통제 하에 주력을 후속 중이던 제 7사단(사단장 준장 신상철)을 제 2군단(군단장 소장 유재흥)에 복귀시켜 전열을 가다듬게 하였으며, 후방지역의 패잔병을 격멸 중이던 미 제 9군단(미 제 2, 제 25사단)의 급거북상을 명령 하였다.

나. 작전계획

미 제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중국 제 38, 제 40군의 공세가 제 2군단 정면으로 집중하여청천강 남안의 요충인 개천-군우리 부근의 전황이 긴박하여지자 미 제 1기갑사단을 청천강 남안으로 철수시켜 군우리 정면의 전황에 대응한 반격부대로 배치하는 한편, 미 제 2사단의 선견부대인 제 9연대와 미 제 1군단의 일부병력을 제 7사단에 증원케 하고 제 2군단 주력(제 6, 제 8사단)으로써 덕천-백탑산선에 대한 반격을 감행토록 배치하였다. 이와 동시에 미 제 1군단은 일부병력으로 박천 부근의 대령강과 안주북방에 교두보를 확보케 하여 우선 청천강 북안에서 적의 침공을 저지케 하는 일방 군단주력은 청천강 남안에서 재편성토록 하였는데 이는 제 2군단 주력의 덕천-백탑산선 반격으로 군우리-개천정면의 위협을 배제하고 전선을 정리하는 대로 총반격으로 이행하여 일거에 한만국경선까지 진격하고자 하는 것이 그 작전방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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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1차 청천강의 전투

11월 3일
이날 군단은 미 제1기갑사단을 고성리(안주 동북쪽 3km)로 철수시켜 군우리 정면의 위기에 대응케 하는 한편, 미 제 24사단 19연대(연대장 대령 네드 무어(Ned D. Moore))를 청천강 북안에, 영 제 27여단(여단장 준장 바질 코드(Basil A. Coad))과 호주군 대대를 박천 부근의 대령강 양안에 각각 교두보진지를 확보케 함으로써 청천강 북안에서의 적의 예봉을 꺾을 태세를 갖추었으며 입석-영변선에서 중공군 3개 사단의 집중공격을 과감하게 저지 중이던 제 1사단은 신안주를 목표로 철퇴하기 시작하였다.
미 제 24사단(사단장 소장 존 처치(John H. Church))은 군단 작명에 따라 전날 영 제 27여단의 엄호 하에 이구동-정차동에서 반격을 시작하였는데 제 19, 제 5, 제 21연대순으로 대령강을 도하하여 사단 CP를 백석현(안주 동북쪽 5km)에 개설하고 제 21연대(연대장 대령 리처드 스테픈스(Richard W. Stephens))를 사단 예비로 백석현에 배치한 다음, 제 19연대를 청천강 북안에 배치하여 교두보진지를 점령케 하였고, 제 5연대(연대장 대령 존 트록모튼(John L. Throckmorton))를 군우리로 급진시켜 제 7사단을 증원토록 하였다.
영 제 27여단은 태천-정주에서 미 제 24사단의 반전을 엄호한 다음, 이날 박천으로 전진, 여단 CP를 서미력리 부근에 개설하고 Middle Sex 대대(대대장 중령 에이 맨(A. M. Man))를 박천-미력리 일대에 배치하여 대령강 동안을 연하여 침습하는 적을 저지케 하였고 Argyll 대대(대대장 중령 지 닐슨(G. L. Neilson))는 동문리일대에 배치하여 대령교와 도하점을 확보하는 한편 1번 작전로를 제압토록 하였다. 한편 여단을 직접지원중인 미 제 61포병대대는 대령교 동안에 진지를 점령하고 지원태세를 갖추었다.
호주 대대(대대장 중령 아이 퍼거슨(I. B. Ferguson))는 전날 정주에서 미 제 24사단의 철수를 엄호한 다음, 이날 박천으로 전진하여 대령강 서안의 옥녀봉(111고지)에 진지를 점령하고 대령교와 도하점을 확보하였다.
제 1사단은 10월 25일 이래로 운산과 입석 동북방에서 격전을 전개하며 중공군 3개 사단의 집중공격을 저지하고 미 제 1기갑사단의 철퇴를 엄호한 다음, 군단작명에 따라 영변을 거쳐 신안주를 목표로 철퇴 중에 있었다. 군단 우인접인 제 2군단 예하 제 7사단은 제 5연대(연대장 대령 박승일)를 우일선으로 하여 535고지(군우리 동쪽 8km)에, 제 3연대(연대장 대령 이기건)를 좌일선으로 하여 비호산(622고지)에 각각 배치하여 계속 침공하는 중공 제 38, 제 40군과 격전을 반복하고 있었으며 제 8연대(연대장 대령 김용주)는 용현리에 위치하여 사단후방경계를 담당하는 한편 덕천-군우리도를 확보하였다.

11월 4일
미 제 24사단은 이날 비호산-군우리정면에 대한 적의 공세와 때를 같이하여 구용강을 도하한 중공군의 측후방 공격으로 주진지전방 7km에 진지를 점령한 제 19연대의 제 1대대(대대장 중령 로버트 리(Robert L. Rhea))가 중과부적으로 청천강을 건너 안주로 철퇴하였고, 야간에는, 계속된 적의 침공으로 제 19연대의 주진지가 혼전상태에 빠지게 되자 사단장 처치 소장은 사단 예비인 제 21연대에 역습을 준비하도록 명령하였다.
한편 군우리 부근에서 제 7사단을 증원한 제 5연대는 적의 거센 공세를 격퇴하고 군우리를 계속 확보하였다. 즉 구룡강변의 약산현 일대에 진지를 점령한 제 19연대 1대대는 이날 새벽, 구룡강을 도하한 중공 제 39군 예하 2개 대대 규모의 적으로부터 측후방 공격을 받고 1시간에 걸쳐 격전을 전개하였으나 계속되는 적의 압박으로 차량과 중장비를 유기한 채로 청천강을 건너 안주로 향하였다. 연대장 무어 대령은 임석동-경각동일대에 배치중인 제 3대대를 즉각 제 1대대에 증원하도록 배치하였으나, 이 대대가 관동에 진출할 무렵, 매복 중이던 1개 대대 규모의 적의 기습으로 대대는 원진지로 다시 복귀하고 말았다.
한편 계속하여 구룡강을 도하한 사단 규모의 적은 오후에 이르러 검각산(223고지)과 저동 일대로 우회 침습하여 연대 주력을 위협하자, 연대는 사단 포병의 직접지휘 하에 격전을 전개하고 적의 침습을 과감하게 저지하였으나, 이날 밤에 서측배가 돌파됨으로써 밤새도록 혼전을 거듭하였다. 이에 사단장 처치 소장은 사단 예비인 제 21연대를 5일 미명을 기하여 적의 서측방을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영 제 27여단은 지난 3일 저녁, 박천 부근에 교두보진지를 점령하고 접적 없이 소진상태를 유지하던 중, 이날 새벽에 대대규모의 적의 남호동(박천 남쪽 2km)을 점령중인 미 제 61포병대대를 기습함으로써 불효전이 시작되었다. 대대는 포수를 제외한 탄약수 이하의 전병력으로 사주방어진지를 편성하고 격전을 반복하는 일방, 포는 영거리사격으로 응전하였으나 일파 우일파의 제파돌격으로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에 여단장 코드 준장은 대령강 서안을 고수중인 Argyll 대대로 급히 증원토록 하여 이 적을 구축하는데 성공하고 재편성을 서둘렀으며 Argyll 대대는 계속 제 61포병대대의 엄호임무를 담당하였다. 오후에 이르러 전술한 바 중공 제 40군(군단장 한선초) 예하 제 1개 사단 규모의 적이 박천 북쪽의 Middle Sex대대와 대령강 서안의 호주군 대대를 동시에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여단은 미 제 61포병대대의 치열한 근접지휘 하에 격전을 계속하다가 역부족하여 한때 서미력리 부근 진지의 실함까지 보았으나 대령강 동안으로 철수한 호주군 대대의 과감한 반격으로 마침내 진지를 회복하였다.
호주군 대대는 이날 오후에 중공군 1개 연대 규모의 포위공격을 받고 격전을 전개하던 중, 영 제 27여단장 코드 준장의 명령에 따라 대령강 동안으로 철수한 다음, 서미력리 부근 고지를 전통적인 총검돌격전으로 공격하여 여단이 실함하였던 진지를 회복하는데 성공하였으나 12명이 전사하고 64명이 사상하였다. 대대는 영 제 27여단의 철수에 따라 신안주 북안의 연봉리로 전진하여 이날 밤에 여단을 추격한 중공군의 야습을 과감한 공방전으로 격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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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차 청천강지구 전투의 결과

11월 5일 24:00를 기하여 일제히 전선을 이탈하기 시작한 중공군은 구장동-운산-태천선의 적유산맥 남록으로 후퇴하여 차기공세를 준비하는 한편 북한군으로 수용진지를 편성케 하여 방어태세를 가장함으로써 UN군으로 하여금 그들이 만주로 철수한 것으로 오판케 하여 진격의지를 재연하도록 유도하는 듯이 판단되었다.
미 제 1군단은 적의 이러한 퇴거에 따라 미 제 1기갑사단을 영변으로, 미 제 24사단을 용산동으로, 그리고 영 제 27여단은 박천을 거쳐 대령강 동안을 따라 각각 위력수색을 감행케 하였으며 제 1사단은 박천으로 진격하였다. 미 제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위력수색의 순조로운 진전과 맥아더 원수의 지도에 따라 11월 15일을 기하여 소위 크리스마스 작전을 단행하고자 계획하였다. 즉 공격개시선을 인처리-희천-온정-운산-태천-납청정으로 정하여 제 2군단은 희천에서 강계-만포진으로, 새로이 전선에 투입하게 될 미 제 9군단(군단장 소장 존 코울터(John B. Coulter))은 운산-온정을 거쳐 초산-벽동으로, 그리고 미 제 1군단은 압록강하류로 각각 진격하도록 규제하고 공격 개시선까지의 진격을 독려하였으나 병참물자의 확보와 미 제 9군단의 북상이 지연됨으로써 공격개시일을 24일로 연기하였고 19일에 이르러서는 공격 개시선을 현 접촉선으로 수정시달 함으로써 각 군단은 진격을 중지하고 부대를 재배치하면서 다시 공격준비를 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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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부대 전과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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