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침시간은 새벽4시가 아닌 3시경... 포격으로 시작
칠성은

남침시간은 새벽4시가 아닌 3시경... 포격으로 시작

민경철(88.11충북) 1 8,948 2011.06.27 23:58
중앙일보
 

[6·25 61주년 기획]
1950.6.25~28 가장 길고 처절했던 역사의 나흘

6·25 개전 초기의 진실 -
당시 정보국 북한반 선임장교 JP 회고 ①

24일 오전 10시 “38선 위급하다”
중위 김종필 긴급 보고 … 육본 참모들 “설마”

27일 오전 “서울 오늘 뚫린다”
채병덕, 담배 권하는 손이 덜덜 떨렸다

htm_2011062501194130003010-001.JPG김종필 전 총리(왼쪽)가 자택에서 본사 박보균 편집인에게 6·25 당시를 설명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치밀한 준비의 북한과 대비하지 않은 무기력한 대한민국-. 전쟁 의지를 과시했던 군 리더십과 무방비의 유약한 리더십-. 1950년 6·25 한국전쟁은 그런 구도 속에서 벌어졌다.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북한반 선임 장교였던 김종필(JP) 전 국무총리-. 본사 박보균 편집인이 지난 20일 JP를 서울 신당동 자택에서 만나 대담을 나눴다. 그는 정확한 기억과 자료로 개전 당시의 전황, 지휘부 동향의 진실을 회고했다.

북한의 남침(南侵) 준비는 한 해 전부터 극비로 진행됐다. 하지만 징후는 드러났다.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에서 그것을 탐지했다. 전투정보과는 49년 12월 ‘연말 종합 적정(敵情:적의 정세) 판단서’를 만들어 상신했다. 그 보고서는 ‘남침 임박’이었다. 육본 지휘부는 이를 무시했다. 전투정보과는 적의 동향을 다루는 가장 민감한 신경조직. 과장은 유양수 소령, 핵심 멤버는 상황실장 격인 문관 박정희(좌익 숙군사건으로 무기징역·소령파면 뒤 구제), 북한반 선임장교 김종필 중위, 남한반의 이영근 중위였다. 6·25 때 남침의 성격과 전체 윤곽을 육본에서 제대로, 최초로 파악한 곳이 전투정보과다.

htm_2011062501194130003010-002.JPG6·25전쟁 초기 김종필 중위(괘도 지시봉 든 이)가 육군본부 상황실에서 적정 상황에 대한 종합적인 브리핑을 하고 있다. [김종필 전 총리 제공]

 -적정 판단서의 남침 예보는 정확합니다. 그리고 6월 중순부터 38선 근방 북한군의 동향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24일 토요일 자청해서 전선이 위급하다는 상황보고를 하셨는데요.

 “아무래도 불길했지…. 오전 10시에 정보참모 장도영 대령에게 ‘적의 공격이 임박해 보인다’면서 브리핑을 하겠다고 요청했지요. 30분 뒤에 상황실에서 육본 핵심 참모였던 장도영 정보국장, 강영훈 인사국장, 장창국 작전교육국장, 양국진 군수국장, 고급부관 황헌친 대령 등 수뇌부들이 모였어요. 내가 그들 앞에서 적의 공격 징후가 농후하며, 따라서 전군에 비상태세를 걸어야 한다는 내용의 브리핑을 했습니다. 적의 주공(主攻)인 동두천과 조공(助攻)인 개성에 정찰조를 침투시키자고도 했어요. 그리고 작전과 정보가 합동근무 체제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했지요. 그러나 참모들은 다른 데를 쳐다보는 듯 시큰둥했어요. 나중에 장도영 대령만 남았는데, 쓴웃음을 지으면서 ‘우리 할 일만 하자’고 말합디다. 참모들이 내 상황 판단에 동의하지 않은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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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럼에도 브리핑 직후 정보국 차원에서 비상 작전에 들어갔다고 돼 있습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어요. 오전 근무가 끝나서 육본이 한적하기만 했는데, 바로 폭풍전야의 고요와 같다는 느낌이 왔지요. 아무래도 38선 상황이 긴박해 보여서 북한반 책임장교인 내가 퇴근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당직인 남한반 이영근 중위를 쉬게 하고 대신 당직 근무를 하기로 했습니다.”

 -24일 육본 정보국 당직근무자로서 전쟁의 발발 과정을 운명적으로 지켜보시는데요.

 “나는 상황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고 판단해서 청단과 백천, 용현 등 10곳의 정보국 파견대(OP)에 1시간 간격으로 상황을 보고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동두천 동쪽에 있는 양문리 파견대로부터 25일 새벽 1시쯤에 ‘북한의 전차부대가 기동을 시작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어요. 이어 개성 정면에서도 ‘적군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해요. 2시 지나면서는 모든 파견대로부터 ‘북한군 움직임이 활발하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3시 지나면서는 드디어 동두천 등에서 ‘적의 포탄이 떨어진다’는 얘기가 들어와요. ‘듣지도 보지도 못한 대구경의 포탄이 마구 떨어진다’며 난리였어요. 전선이 끓고 있었던 겁니다. ‘큰일이 벌어졌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쟁이 터진 거지요.”

 - 적정 판단서도 무시되고, 24일 아침 보고도 외면당했습니다. 그런 실망과 허탈 속에 적의 전면 남침을 보고 어떤 심경이 들었습니까.

htm_2011062501194130003010-004.JPG채병덕(1914~1950)(左), 신성모 (1891~1960)(右)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실망과 허탈감도 없지 않았지만, 너무 큰일이 벌어졌다는 생각에 가능하면 침착하게 전선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파악하려고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어요. 함께 적정 판단서를 만들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28일 후퇴하던 수원에서 나를 보더니 ‘아우님, 우리 예감이 맞긴 맞았는데, 불행한 일이야’라고 하더군요.”

 -전쟁 직전 우리는 일선 사단장을 대거 교체했고, 비상경계를 풀어 6월 23일에는 장병의 3분의 1을 외출과 외박으로 내보냈습니다. 전쟁 발발 하루 전에는 육본에서 술과 댄스파티가 있었습니다. 이런 인사 난맥, 적정 혼선, 지휘부 무기력에는 북한의 공작과 간첩 침투 때문이라는 의심이 있습니다.

 “군사적인 분야에서 그런 정황은 없다고 봐요. 가장 큰 원인은 인민군이 쳐들어올 리가 없다는 맹신이었습니다. 49년 연말에 작성한 정보국의 전쟁 발발 가능성 경고도 그래서 무시했습니다. 저들이 쳐들어올 리 없다는 전제 하에 지휘관을 교체하고, 비상경계도 풀면서 사실상 전선을 공백 상태로 만든 겁니다. 24일 밤 사단장급 지휘관들은 대부분 새로 만든 장교 구락부에 가서 파티에 빠져 있었습니다.”

 - 파국(破局)이 너무 쉽게 다가왔습니다. 군 지휘부에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

 “육본 총참모장에 오른 채병덕 소장(병기 장교 출신)은 전선 경험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6월 10일에 교체된 사단장들은 현장에도 잘 있지 않았어요. 자신이 새로 부임한 부대의 현황도 파악하지 못한 채 전쟁을 맞았다고 보면 됩니다. 유양수 과장도 6사단 참모로 전근명령을 받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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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이 벌어지자 군 리더십이 우왕좌왕한 모습이 많이 눈에 띕니다.

 “어떤 참모는 전날 열렸던 장교 구락부 파티에 참가한 뒤 계속 술자리를 즐기다가 늦게 귀가한 모양입니다. 집에 전화도 놓지 않은 상태여서 연락이 한동안 두절됐어요. 헌병이 지프를 몰고 그 집 근처에 가서 가두방송을 해 겨우 찾아내기도 했습니다. 핵심 참모가 북한군이 개성을 점령한 오전 10시 넘어서 자리에 복귀한 겁니다. 전방부대 사단장들과 다른 참모들도 대부분 전날 파티로 소속부대를 떠나 비상령 하달과 방송을 듣고 10시 전후 육군본부나 소속 부대에 도착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육본 요원들은 오후 2시 넘어서야 집합을 완료할 정도였습니다.”

 - 군 지휘부가 속수무책이었지요. 패주와 후퇴, 혼돈과 지리멸렬, 집단 불안과 공황(恐慌)에 빠져 있던 것으로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육본 당직사령에게 내가 가서 급히 ‘전군에 비상을 걸어라’고 했더니 ‘내가 무슨 권한으로 그런 걸 해’라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총참모장에게 보고했으니 비상 걸어야 한다’고 재촉했습니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파티에 참석했다가 새벽 2시에 귀가해 잠을 자다가 5시에 당직사령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상황을 알았답니다. 채 총참모장이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를 않아 장관 숙소로 찾아가 상황을 보고했대요. 육본으로 돌아온 채 총참모장은 아침 7시에야 전군에 비상을 내렸습니다.”

 -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은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신성모 장관은 오전 10시에 경무대(현 청와대)를 찾아갔으나, 이 대통령은 경복궁 경회루인가, 아니면 창덕궁인가에를 가서 낚시를 즐기고 있었어요. 30분 후에 집무실로 돌아온 대통령에게 신 장관이 보고를 하자 침통한 표정을 짓던 이 대통령은 ‘탱크를 막을 수는 없을 텐데, 그놈들 장난치다가 그만 두겠지’라고 했답니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이어 오후 2시에 열린 각의에서 ‘전면 공격은 아닌 것 같다. 후방 사단을 동원했으니 적을 격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허황된 보고를 했대요.”

 - 개전 초기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길고 처절했던 나흘이었지요. 우리 지도부가 드러냈던 가장 허약한 모습은 무엇이었습니까.

 “전쟁 발발 사흘째인 27일 채 총참모장이 나더러 의정부 7사단에 가서 유재흥 사단장을 만나 편지를 전한 뒤 전황을 파악해 오라고 하더군요. 돌아와서 ‘오늘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온다’고 보고했습니다. 채 총참모장이 ‘알았네’라면서 주머니에서 미국제 럭키스트라이크 담배를 꺼내 내게 건네는데 그 손이 마구 떨려 담배가 한 개비씩 그냥 밀려 나오더라고요. 마구 떨리던 손이 지금까지도 가장 뚜렷하게 기억납니다.”


김종필 중위가 본 27일 창동 전선

htm_2011062501194130003010-006.JPG1950년 6월 27일 정보국 북한반 선임장교였던 김종필 전 총리가 창동 전선으로 향하고 있다.
서울에 남느냐, 수도를 버리느냐. 6·25전쟁이 터지면서 북한군이 거침없이 밀고 내려오자 정부와 군 수뇌부는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26일 오전 3시30분쯤, 국방장관은 같은 날 오후 2시에 각각 서울을 떠났다. 남은 것은 군 수뇌부였다.

 채병덕 육본 총참모장은 27일 오전 9시 “정보국에서 똑똑한 사람 하나 데려오라”면서 김종필 정보국 중위를 사무실로 불렀다. 밀봉한 봉투를 건네면서 “창동 전선을 방어하고 있는 유재흥 7사단장에게 편지를 전하고 회답을 받아오라”고 지시했다. 봉투에 든 편지의 내용은 지금의 서울 도봉구 창동 전선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는가였다. “정부는 남하할지라도 군은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다짐했던 군이었지만 역시 서울에서 떠날 생각을 품었던 것.

 김 중위는 지프를 타고 포탄이 떨어지는 수유리를 지나 창동으로 갔으나 7사단은 이미 지리멸렬한 뒤였다. 적진에서 날아오는 포탄으로 논의 진흙이 이리저리 튀어 김 중위의 옷에 달라붙었다. 겁도 났지만 김 중위는 “차라리 적과 싸우다 죽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더 전진했다. 그러나 유재흥 사단장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적군에 밀려 쫓겨오는 국군 장병들은 차라리 몽유병(夢遊病) 환자와 같았다고 했다. 이들의 후퇴를 막기 위해 헌병 독전대(督戰隊)가 총을 들이댔지만 국군들은 그 총구를 손으로 밀면서 그저 내빼기에 바빴다. 헌병 저지선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군대 밥차가 있었지만, 후퇴하는 장병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도망치고 있었다.

 김 중위는 7사단장 부관을 만나 편지를 건넸다. 돌아오는 길에 김종갑 7사단 참모장을 만나 상황을 물었다. 그는 “오늘 밤도 지탱하기 어렵다”고 했다. 정릉 쪽에서는 새로 수도 방위 임무를 맡은 이용문 대령을 만났다. 그가 가리키는 북쪽 산허리에는 이미 인민군들이 넘어오고 있었다. 김 중위는 돌아와 이런 상황을 채 총참모장에게 보고했다. 그는 당황하기만 했다. 담배를 꺼내는 손도 떨었다.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했던 육군본부는 27일 오후 1시30분 서울을 떠났다.

정리=유광종 선임기자

“김일성 남침, 새벽 4시 아닌 3시 … 포격으로 시작”

6·25 당시 정보국 선임장교 JP … 처절했던 개전 나흘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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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김일성 군대의 전격적인 남침으로 벌어진 6·25전쟁의 발발 시점은 당일 오전 3시라고 봐야한다”-.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북한반 선임장교로 전쟁 발발 하루 전인 24일 당직 근무를 맡아 전선 상황을 관리했던 김종필(JP·사진) 전 총리가 최근 본지 박보균 편집인과의 대담에서 증언한 내용이다.

 김 전 총리는 지난 20일 “알려진 것처럼 남침 시작 시점은 6월 25일 오전 4시가 아니다. 적군의 포탄은 오전 3시를 넘어서면서 우리 측 전방 부대에 쏟아졌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나는 육본에서 전선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며 “24일 예감이 안 좋아 당직을 자청해 전선에 나가 있는 정보국 파견대 10곳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파악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2시 들어 적군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고 증언했다.

 김 전 총리는 “3시 넘어서면서 동두천 방향의 국군 7사단 정보처로부터 ‘적의 포탄이 마구 쏟아지고 있다’는 등 아군의 피격을 알리는 보고가 쏟아졌다”며 “따라서 남침 시점을 지상군의 38선 침공 시간인 오전 4시로 잡았던 것을 고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유광종 선임기자


◆1950년 6월 25일과 JP=육군본부 전투정보과 북한반 선임장교로 6·25전쟁이 일어나던 순간을 육본에서 가장 처음 파악한 사람이 JP다. 같은 과의 상황실장 격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당시 문관)과 함께 49년 ‘연말 적정 종합판단서’를 통해 북한군 남침 시기와 공격로를 정확하게 예측했다.

[6·25 61주년 기획] 남침 시점·침공로 정확히 예상

육본 전투정보과의 ‘적정 보고서(1949년 12월)’는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에 속해 있던 박정희 정보실장(당시 강제 예편 후 문관 신분), 김종필 북한반 책임장교, 남한반 이영근 중위가 작성한 1949년 12월 ‘종합 적정 판단서’는 북한 김일성 군대의 남침을 매우 정확하게 예측한 보고서다. JP는 이 보고서 작성의 핵심 인물이었고, 그는 전쟁 발발 하루 전인 50년 6월 24일 이를 근거로 육본 참모들에게 ‘내일이라도 당장 전쟁이 벌어진다’고 브리핑했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이 보고서의 내용은 거의 모두 적중(的中)했다. 총 200개 항목에 걸친 보고서는 우선 김일성 군대의 전면 남침 시점을 50년 3월과 6월로 잡았다. 보고서는 남침 시점을 우선 3월로 예상하면서 ‘중국 동북지방의 조선계 중공군이 김일성 군대에 편입되는 과정이 늦춰질 경우 6월로 연기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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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중국은 조선계 출신 중공군 2개 사단을 김일성 군대에 넘겼으며, 그 과정이 일부 지연돼 최종 편성 작업이 5월에 마무리 지어지면서 김일성 군대의 남침이 6월로 연기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보고서는 아울러 북한군 지도부가 주력이 배치된 주공(主攻)을 동두천과 의정부, 그보다는 부차적인 공격로인 조공(助攻)을 개성과 춘천·원주로 향할 것으로 예측했다.

 눈에 띄는 것은, 보고서가 북한군이 당시 남한이 보유하고 있지 않던 전차(戰車)를 앞세워 공세를 펼칠 것으로 내다봤다는 점이다. 북한군이 남한 전역 석권을 위해 개전 초기 2~3개월 이내에 전 병력을 일제히 동원하며, 최초 단계에서는 병력 12만 명, 그 이후 서울 이남 지역 공략에서는 20만 명을 동원할 것으로 본 점도 눈에 띈다.

 당시의 육본 정보국 전투정보과는 소련과 중국의 움직임 등 국제적인 동향을 파악하는 것 외에 정보요원들을 38선 이북으로 침투시켜 이 같은 정보를 파악했다. 정보국은 38선 이북의 북한 정보 수집을 위해 서쪽 옹진으로부터 임진강 근처 고랑포, 동쪽으로는 주문진과 강릉에 모두 10개의 첩보단 거점을 만들어 정보망을 구축했다.

 당시 정보요원들은 38선 인근의 북한 지역 외에 압록강이나 두만강에까지 진출해 북한군 관련 첩보를 탐색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군의 남침이 임박했던 50년 6월에 접어들어서는 북에 침투한 정보요원들의 귀환길이 막히고, 새로 투입된 정보요원들도 38선을 넘자마자 행방불명되거나 침투를 단념하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고 김종필 전 총리는 회고했다. 김 전 총리는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서 정보국 내에서는 북한군 침공이 곧 닥칠 수 있다고 보면서 경계심을 부쩍 높였다고 덧붙였다.

6·25 61주년 기획
1950.6.25~28 가장 길고 처절했던 역사의 나흘

“육본 철수 때 좌익 전력 박정희가 안 보였다, 한강을 건넜을까 … 수원서 만난 뒤 이젠 아무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htm_2011062701122130003010-001.JPG1948년 10월 숙군 작업이 펼쳐지기 직전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모습이 담긴 희귀 사진이다. 그해 10월 전남 여수와 순천에서 벌어진 ‘여순 반란사건’ 진압을 위해 광주 토벌사령부에 내려간 박정희(왼쪽) 소령이 송호성 사령관(담배 문 이)과 협의를 하고 있다. 박 소령은 서울 복귀 뒤 남로당 군사책의 혐의로 숙군작업에 걸려들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극적으로 살아났다. 사진전문잡지 라이프에 실린 작품이다.

1950년 6월 25~28일. 리더십을 잃은 대한민국 군대는 계속 쫓겼다. 김일성 군대는 그런 국군을 집요하게 밀어붙였다.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장교였던 김종필(JP) 전 총리는 그때의 과정을 생생하게 지켜봤다. 한때 좌익 연루 혐의에 싸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도 그 대열에 있었다. 중앙일보 박보균 편집인과의 대담에서 JP는 박 전 대통령의 당시 행동, 한강 인도교가 끊어지는 장면 등을 회고했다.


htm_2011062701122130003010-002.JPG6·25전쟁 때의 김종필
-1949년 연말에 ‘종합 적정 판단서’ 작성을 주관한 박정희 전 대통령(전쟁 발발 당시 문관으로 정보국 작전 정보실장)과의 역사적 만남, 그리고 전쟁을 거치면서 두 분이 서로 알아가는 과정이 눈길을 끕니다. 박정희 실장은 전쟁이 터지는 순간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어머님 제사가 있다고 해서 50년 6월 21일 경북 구미에 내려갔지요. 떠나면서 제게 ‘상황이 이상하니 무슨 일이 터지면 바로 연락하라’고 했어요. 당시에는 전화 사정이 좋지 않아 경찰 지서를 통해 25일 전화를 걸어 찾아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알려드렸지요. 바로 상경했을 겁니다. 그러나 나는 전황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27일인가, 육본 상황실에서 만났지요.”

 -상황이 매우 급박한 때였습니다. 곧 서울을 떠나 후방으로 내려갈 시점 아니었습니까. 서울을 떠날 때 육본 지휘부는 우왕좌왕 균열 상태에서 서로 먼저 탈출했습니다.

 “나는 육본 상황실에서 정신없이 일하고 있었어요. 28일 새벽이 되자 뭔가 육본 분위기가 썰렁해졌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둘러보니 나와 상황장교, 그리고 사병 몇 명만 남고 육본이 텅텅 비어 있었던 겁니다. 채병덕 총참모장이나 국장들이 육본 철수를 결정하면서 제대로 얘기도 해주지 않고 자기들만 먼저 떠났어. 부하들에게 한마디도 없이 말이지. 박 실장(박 전 대통령)도 그때 함께 따라간 것으로 알고 있어요. 나는 부랴부랴 육본 병기감실 앞에 있던 미국제 GMC 트럭을 찾아와 산더미 같았던 지도와 상황자료들을 뜯어 말아서 전부 싣고 철수 길에 올랐어요.”

 -문관 박 실장은 채 총참모장 대열에 끼어 함께 후퇴합니다. 그때 박 실장에게 48년 숙군(肅軍) 사건에 연루된 ‘좌익 중죄(重罪)’의 이미지가 육본 장교들 사이에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그의 후퇴 행적의 종착지가 어딘지를 미심쩍어 했던 장교들도 있었다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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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공군기가 1950년 7월3일 한강 철교를 폭격하는 장면. 오른쪽이 그해 6월28일 육군본부가 폭파한 인도교.


 “참, 그런 게 아직 남아 있었던 모양이에요. 우리도 그랬지요. 한강 다리가 폭파돼 간신히 배를 구해 건넌 뒤 우리가 시흥을 거쳐 임시 육군본부가 있던 수원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내려갈 때 제 일행이 몇 있었어요. 같은 정보국에서 근무하던 전재구 중위 등이었지요. 우리 일행의 화제가 무엇이었는지 알아요? 바로 박 실장 문제였어요. ‘박 실장이 그런 전력이 있는데, 과연 후방의 육본으로 가 있을까, 아니면 서울에 남을까’하는 문제 말이에요. 우리는 수원으로 이동하면서 그런 주제를 두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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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으로 이동하면서 장교들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요.

 “이런 저런 추측들이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박 전 대통령이 수원에 오지 않을 거라는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거란 사람도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그랬지요. ‘수원 가서 박 실장 있으면 쓸데 없는 생각들 말자. 그렇지 않으면 그런가 보다 하고 말자’고 했거든….”

 -박 실장의 선택과 거취는 우리 역사에서 흥미 있는 대목입니다.

 “시흥에서 수원까지는 줄곧 걸어서 움직였는데, 저 멀리 수원초등학교가 보이고 이어 장도영 정보국장이 정문 앞에서 우리를 맞이했습니다. 그 옆에 박 실장이 함께 서 있었죠. 우리 일행이 다가서서 정보국장에게 인사한 뒤 박 실장에게 ‘오셨구만요’라고 인사를 건네자 박 전 대통령이 쓴웃음을 짓더군. 28일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는 상황에서 보이지 않아 의심을 했던 것도 사실이에요. 그러나 수원초등학교 정문 앞에 서 계신 모습을 보니 정말 반갑습디다. 그 이후로는 박 전 대통령이 좌익이다 아니다라는 의심은 일절 사라졌지….”

 -처음 두 분이 만나시는 장면도 궁금합니다. 48년 숙군 작업에서 우여곡절 끝에 살아난 박 전 대통령과 육사 8기로 임관해 처음 정보국에 발을 들여 놓은 김 전 총리의 만남은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대목인데요.


htm_2011062701122130003010-005.JPG해리 트루먼
(미 33대 대통령·1884~1972)

 “육사 8기는 인원이 1300여 명으로 아주 많았어요. 내가 6등인가의 성적으로 졸업을 했는데, 당시 인원 보충이 필요했던 정보국에서 유양수 전투정보과장 등을 보내 100등 이내의 졸업생들을 정보국 요원으로 선발했어요. 그렇게 정보국에 뽑혀 전투정보과를 찾아갔더니 박 전 대통령이 계시더군요. 유양수 과장이 ‘이분에게도 인사를 드리라’고 해서 인사를 하려는데, 박 전 대통령이 ‘나 박정희요. 귀관들에게 신고 받을 신분이 아니니, 그냥 거기 앉으시라’고 말하더군요. 또 ‘육사를 우수하게 졸업한 장교들이라고 들었습니다. 환영합니다. 같이 노력하자’라고만 짧게 말했습니다. 얼굴이 새카맣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검은색 민간인 복장이어서 그랬는지 얼굴이 유난히 새카맣게 보였지요. 웃음이 잘 나오지 않는데도 억지로 웃는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28일 새벽 한강 인도교의 조기 폭파 논란은 우리 군의 혼란과 불안을 상징합니다. 수도 서울을 적에게 넘겨준 뒤 채병덕 총참모장의 육본 지휘부는 허겁지겁 한강을 넘어 후퇴했습니다. 이어진 채 총장의 폭파 명령은 불안, 강박관념, 명령체계 혼선 속에서 급속히 내려진 겁니다. 조기 폭파로 인한 실책 때문에 과도한 인명 손실을 낳았다는 비판과 논란이 있습니다.

 “참혹했어요. 모두 떠나간 육본을 마지막으로 나와 트럭을 탄 채 한강 인도교에 도착하니 밀려든 사람들로 길이 꽉 막혀 있었어요. 중지도 끄트머리에 도착하니 인민군 편의대(便衣隊: 사복으로 위장한 부대)로 보이는 사람들이 피란 대열에 끼어들어 ‘이제 다 끝났다’라면서 선동을 하고 다녀요. 대열에서 잠시 기다리는데 철교 저쪽에서 작은 섬광이 일더니 ‘꽝-꽝-꽝’하면서 뭔가 터져요. 다리 폭파였어요. 땅이 출렁이는가 싶더니 폭음과 함께 한강교 아치와 교각이 하늘로 치솟고 차량과 사람들이 튕겨 올라가요. 그러더니 사람들이 입고 있던 옷가지와 살점들이 후두둑하면서 떨어졌어요. 자동차와 싣고 있던 자료 모두 버리고 동빙고 방향으로 움직였어요.”

 -아주 긴박한 상황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결국 어떻게 강을 건너셨습니까.

 “육사 동기생 하나는 ‘후퇴하느니 여기서 차라리 죽겠다’면서 권총으로 자살했어요. 아주 참담한 심경이었지…. 서빙고에서 간신히 배를 찾았는데, 미국으로 떠나려는 미 군사고문단 가족들이 보여요. 그래서 그 사람들을 먼저 건너게 했지. 그들이 다 건너고 오전 11시쯤 되니까 남산 쪽에 이미 인민군들이 올라가 박격포를 쏘아대고 있었어요. 먼저 건넜던 동기생 하나가 ‘지금 못 건너면 죽는다’면서 고함을 치더구만요. 노인들 몇 분이 배를 저어 건너도록 도와줬는데 우리보고 그래요. ‘젊은 군인들이니까 빨리 건너 가. 하지만 다시 꼭 돌아와야 해’라고 해. 고맙지요. 그래서 서울 탈환 뒤에 그분들을 찾아 나섰어요. 그러나 보이지 않았어요. 아주 섭섭했어….”

 -해리 트루먼 당시 미 대통령의 참전 결정이 무기력한 리더십의 대한민국에 결정적인 도움을 줬습니다. 트루먼의 고향 인디펜던스에 가봤더니 그의 박물관 안의 모형 백악관 집무실 책상 위에 ‘책임은 여기서 멈춘다(The buck stops here)’고 쓴 팻말이 보이더군요. 참전 결정 때 트루먼이 보인 결단력과 신념을 읽었습니다.

 “그래요. 소련이 계획적으로 한반도를 석권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보고 즉각 참전 결정을 했어요. 아주 훌륭한 결정이었다고 봐요. 62년인가, 내가 미국을 들렀을 때 인디펜던스에 도착해 트루먼 전 대통령을 만난 일이 있어요. 트루먼이 ‘그때 내 결정이 무뎠습니다. 3차 세계대전이 난다고 영국이 강력한 행동을 취하는 것에 반대해 더 강하게 나서지 못했습니다’라고 회고하더군…. 그러면서 ‘더 과감한 결정을 했다면 한국의 입장이 더 좋아졌을 것…’이라고 후회를 합디다. ‘여기 있는 사람들(JP 일행), 참 안됐어’라고 그러면서 말이에요.” 입력 2011.06.28 00:21 / 수정 2011.06.28 01:23
 

왜 서울서 사흘 체류했나 … 김일성 군대의 미스터리

6·25 61주년 기획

1950.6.25~28 가장 길고 처절했던 역사의 나흘
“남한 내 전국적 좌익 봉기” 오판

htm_2011062801234230003010-001.JPG김일성(1912~94)(左), 박헌영(1900~55)(右)
김일성 군대의 남침은 초반의 거센 공세로 매우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초반의 공세가 물 흐르듯이 이어지지는 못했다. 김일성 군대의 전반적인 남침 전략에 문제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져 일종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대목이다.

 우선 서울을 점령한 김일성 군대는 사흘 정도 체류했다. 초반의 강력한 공세가 한강 이북에만 국한되면서 준비 없이 전쟁을 맞았던 한국군 지도부가 한강을 사이에 두고 지연전(遲延戰)을 펼칠 시간상의 여유를 찾도록 만들었다. 아울러 도쿄의 미 극동군사령부에서 급파한 미군이 수원과 오산으로 진격했고, 다시 사단급의 부대를 투입할 시간도 허용하고 말았다.

 김일성 군대의 미심쩍은 서울 체류와 국군과 유엔군에 의해 마침내 북으로 밀려난 원인-. JP는 이와 관련해 의미 있는 이야기들을 전했다. 그는 10월 1일 북진하는 국군과 유엔군에 밀려 김일성 등 북한 수뇌부가 강계(지금의 자강도)에 임시 사령부를 두고 회의를 열었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북한군이 침공 뒤에 밀려난 이유로 우선 ‘상상할 수도 없이 빨리 참전한 미군과 유엔군’을 들었다고 했다. 실제 해리 트루먼 당시 미 대통령과 더글러스 맥아더 미 극동군총사령관의 전격적인 미군 투입과 신속한 유엔 참전 결의로 북한군은 낙동강 교두보로부터 밀려났다. JP는 또 “김일성 등 북한 지도부는 개전 초 계속 우세를 이어가며 남하하지 못한 채 서울 등 지역에서 지체하며 공세 속도를 10일 정도 늦춘 것을 그 다음 원인으로 꼽았다”고 했다. 이에 따라 예상치 못하게 보급선이 길어지면서 장비와 물자를 제 때 실어 나르지 못한 점이 북한이 꼽는 셋째 후퇴 요인이라는 설명이다.

 그다음이 가장 중요하다. 남한 좌익 활동을 주재했던 남로당 박헌영의 문제다. 그는 전쟁 전 “(북한군) 침공을 받으면 남한 내 모든 좌익이 봉기해 자연스레 붕괴될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를 김일성에게 했다. 김일성은 이 보고를 믿었고, 개전 초반 서울 점령 뒤 김일성은 남한 내 좌익 봉기를 기다리면서 공세를 늦췄다는 분석이다.

JP는 “이런 내용을 살피다가 김일성이 책상을 두드리면서 마구 화를 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입력 2011.06.28 00:20 / 수정 2011.06.28 10:25
 

6·25 개전 초기의 진실 -
당시 정보국 북한반 선임장교 JP 회고 ③ 끝

6·25 61주년 기획
1950.6.25~28 가장 길고 처절했던 역사의 나흘
“평양점령 … ” 국방장관·총참모장 큰소리에 국회의원은

htm_2011062801202830003010-001.JPG김일성 군대의 남침에 급박하게 부산으로 쫓겨온 대한민국 정부. 1950년 8월 15일 임시 막사에서 열린 임시국무회의 모습이다. 진용을 재정비한 국무회의의 분위기가 무겁게 느껴진다. [대한민국 정부기록 사진집]

htm_2011062801202830003010-002.JPG김종필 전 총리
htm_2011062801202830003010-003.JPG박보균
편집인
전쟁의 리더십. 사느냐 죽느냐를 가르는 전쟁에서 지도자의 확고한 리더십은 언어의 관리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61년 전 전쟁을 맞았던 대한민국 지도부는 그렇지 못했다. 그 반대였다. 육군본부 정보국 장교로서 김일성 군대가 전격 남침하면서 빚어진 1950년 6월 25~28일까지의 지도부 상황과 전황을 입체적으로, 가장 가까이 지켜본 김종필(JP) 전 총리. 본사 박보균 편집인이 JP와 전쟁의 리더십에 관해 대담했다.


-국가 위기 때 지도자의 말은 국민의 나라에 대한 충성을 고양시킵니다. 리더십의 언어는 대중에게 국난 극복의 용기를 주고, 재기의 상상력도 키워줍니다. 그런데 6·25 전후 정치 지도자, 국군 지휘부의 말은 허황되고 거짓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 말들이 국민을 분노, 좌절케 했으며 결국 리더십과 대중 사이의 신뢰를 파괴하고 말았습니다.

 “1949년 연말에 작성한 ‘종합 적정 판단서’의 경우도 그랬어. 우리가 적의 침공 시기와 공격로 등을 정확하게 예측한 보고서를 다 올렸어요. 신성모 국방장관이나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에게 말예요. 그래도 그 사람들 말이지, 입만 벌리면 ‘일주일이면 우리가 평양 점령한다’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다’고 그러는 거야. 군을 이끌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말을 자주 하고 다녔어요.”

 -종합 적정 판단서처럼 위기를 예측한 보고가 전달이 안 된 이유가 있을 법합니다. 지휘부의 인적 구성에서 문제가 있지 않았느냐는 의문이 듭니다.

 “신성모 장관이 자리에 올라왔을 때 ‘우리가 참 별 장관 다 모신다’고 했어요. 당시에 우리 해군에 뭐가 있었어? 그런데도 신 장관은 대통령에게 ‘동해안과 서해안으로 언제든지 작전을 펼쳐 평양을 공격할 수 있다’고 하거든. 국회와 정부 지도자 모두 그에 걸맞은 품격을 갖추지 못했어요. 허황함…, 그런 생각이 들었지.”

 -민간 상선 선장 마도로스 출신인 신성모 국방장관, 병기장교 출신인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의 기용 등이 남침에 제대로 대처 못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이니까 다 이야기할 수 있어요. 인사에서 실패한 거야. 국가의 안보를 책임지는 국방 쪽에서 전쟁이나 군사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올라온 거지. 이승만 대통령의 공과(功過)를 두고 ‘외교에는 귀신, 인사에는 등신’이라고 하잖소. 그런 말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이유가 다 있었던 게지. 배 타던 선장 출신 신성모씨를 국방부 장관으로 기용하고, 50년 들어서는 북한의 남침설이 난무하는데도 작전 경험이 전혀 없던 채병덕 소장을 육군 총참모장에 앉힌 게 다 그래요.”

htm_2011062801202830003010-004.JPG1950년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전차 T-34가 시가지를 행진하고 있다.


 -전쟁 의지가 평화를 보장한다고 합니다. 6·25를 맞을 때 우리는 그런 의지가 있었습니까. 개전 초반의 상황에서 나타난 한국 지휘부의 행동에는 그런 단호한 의지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그런 게 없었어요. 전쟁 터지기 하루 전인 24일 오후에도 다들 장교 구락부 파티에나 갈 생각에 빠져 있었지. 외부적인 요인도 있어요. 애치슨 미 국무장관이 50년 1월에 미국의 아시아 방어선에서 한국을 제외했잖아. 북한이 이를 어떻게 생각했겠어요. 트루먼 대통령도 한국이 책임질 상대가 아니라는 식의 판단을 했어요. 미국의 그런 태도도 전쟁을 불러들인 셈이지….”

 -전쟁에 대비하지 않은 모습은 한국군 지도부에서 확연하게 나타납니다. 대비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만에 따른 오판, 오판에 따른 자기 최면에 빠져 있던 것 아닙니까.

 “전쟁 직전과 직후에 그런 게 잘 드러났지요. 채병덕 총참모장은 전쟁이 터진 25일 오후 2시에 국무회의에 가서 ‘적의 전면공격이 아닌 것 같다. (50년 3월에 붙잡힌 간첩) 이주하와 김삼룡을 탈취하려는 책략’이라고 보고해요. 다음날 열린 군사원로회의에서는 신성모 국방장관이 ‘우리 군이 공격 중이니 전황은 우리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발언하지. 두 사람이 군을 이끄는 최고 지휘부였는데, 채 총참모장은 서울을 버리고 떠날 때까지 각의나 국회에 가서 ‘3개 후방 사단이 올라오면 3일 내로 평양을 점령해 보이겠다’ ‘곧 북진할 테니 안심하라’고 큰소리를 쳐요. 신성모 장관도 그런 소리를 계속 하고 다녔어요. 두 사람이 그런 허황한 소리를 하는데도 국회의원들은 박수갈채까지 보내고 있었으니, 다들 이상한 맹신(盲信)에 빠져 있었던 거지.”

htm_2011062801202830003010-005.JPG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런 전쟁 전후의 발언 내용들이 무의식적으로 머리에 입력됐고, 결국 전쟁이 벌어지면서 참혹한 결과를 빚어낸 것으로 보입니다.

 “국민을 속인 것이지. 호언장담(豪言壯談), 허황한 거짓말로 스스로를 위안했을지는 몰라도 아주 심각한 결과를 불렀어요. 김일성의 북한은 ‘곧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는 한국군 지도부의 발언을 핑계로 우리가 저들을 먼저 때렸다는 북침설(北侵說)을 만들었지. 미국이 한국군 지도부가 그런 발언을 하면 ‘한국군이 충분히 싸울 수 있는 모양이구나’라는 판단을 했을 거예요. 역시 다 우리에게는 좋지 않은 마이너스 효과를 불렀던 거야. 그런 거 다 우리 스스로 만들고 퍼뜨렸어.”

 -지도자의 발언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전쟁 전후에 그런 발언들이 속출했다면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넘어갔겠습니다.

 “전쟁이 터지고나서도 국회는 ‘수도 서울 사수(死守) 결의’까지 해놓고서 도망쳤지요. 대통령도 마찬가지였어요. 군 지휘부도 수도를 지키겠다고 해놓고서는 먼저 빠졌지. 시민들에게는 ‘혼란 일으키는 행동은 삼가라’ ‘인민군을 여기저기서 격퇴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그때 서울 시민 심리는 정부와 군을 신뢰했다기보다는 어쩔 줄을 몰랐다고 해야 옳지. 시민들은 멍하니 있다가 지도부가 모두 서울을 떠난 6월 28일을 맞았던 거요.”

 -전쟁에 대비하지 않으면 평화는 일순간에 무너진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에 비해 북한의 김일성은 치밀한 판단력, 강한 정치력으로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김일성이 능력을 갖췄던 것은 사실이에요. 소련이 그를 전폭적으로 뒷받침해주고, 절대 권력을 손에 쥐어서 가능했던 거지요. 결단력과 정치력을 김일성이 갖췄던 점은 인정해야 합니다. 김일성은 전쟁이 벌어지던 50년에만 10회에 걸쳐 무장공비 3400여 명을 남한에 침투시켰어. 먼저 점(點)을 차지해 선(線)으로 연결한 뒤 면(面)으로 확대한다는 생각이었지. 그만큼 전쟁을 철저하게 준비했던 거예요. 그럼에도 우리는 결국 전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못했어요. 북한군이 쳐들어 올 리 없다는 미국 수뇌부의 판단을 너무 쉽게 받아들였지. 우리 스스로 지키려고 노력한 것도 전혀 없어.”

 -잊혀진 전쟁을 기억하는 전쟁으로 바꿔야 합니다. 외국에서는 전쟁을 기념하기 위해 행진까지 합니다. 우리는 1990년까지 노병들의 6·25 거리 행진을 했다가 끊긴 뒤 지난해에야 다시 부활했습니다.

 “그런 거 없애는 게 다 무식한 짓이야. 노태우 정부가 북방외교 한다면서 다 없앴어. 북한은 사건 일으켜 놓고 저들 원하는 대로 끌고 가지. 천안함 사건이나 연평도 포격 때 북한을 규탄하려면 철저히 했어야 해요. 엄청난 짓 일으킨 것에 우리가 그 책임을 철저하게 물었어야 하는 거예요. 북한이 전쟁할 배짱 없는 거 다 알고 있어요. 우리는 지금 문이 10개라면 5개라도 꽉 쥐고 비밀을 관리해야 하는데, 오히려 사방에 구멍이 뚫려 있어요.”

 (마지막으로 지도자들의 준비 없는 태도, 허황한 리더십 등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JP는 손가락으로 천장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소이부답(笑而不答)’이라는 글이 액자에 담겨 걸려 있었다. 당나라 시인 이백이 사용한 말로, ‘말을 아끼고 내실을 꾀하라’는 권유를 담고 있다.)

정리=유광종 선임기자

사진 이름 소속기관 생년
s3114.jpg 김종필
(金鍾泌)
[現] 한나라당 명예고문
[現] 자민련 총재
1926년
s74004.jpg 박보균
(朴普均)
[現] 중앙일보 상무(제작총괄 겸 편집인)
[現]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회장(제18대)
1954년


 

 


 

Comments

이주석(82.02강원) 2011.06.28 08:42
전쟁은 무섭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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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무역협회 회장님. 댓글+1 민경철(88.11충북) 2011.02.14 7219
92 몰랐네요. 이분도... 댓글+1 민경철(88.11충북) 2011.02.08 7348
91 8일 남,북군사실무회담 개최 댓글+3 민경철(88.11충북) 2011.02.01 7029
90 국립대 총장 선배님도 계셨네요. 댓글+2 민경철(88.11충북) 2011.01.24 10129
89 침대 위의 호날두? 댓글+1 민경철(88.11충북) 2011.01.13 13093
88 해돋이 댓글+1 민경철(88.11충북) 2011.01.04 7601
87 우리 사단에도 전에 이런 사단장님이 계셨네요. 댓글+4 민경철(88.11충북) 2010.12.20 23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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