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런 선배 전우 : 유재흥 장군
칠성은

자랑스런 선배 전우 : 유재흥 장군

칠성관리자 2 18,030 2007.03.07 09:28
● 한문 : 劉載興
● 생몰연대 : 1921.8.3 -
● 출신지역 : 일본 나고야
● 최종계급 : 육군 중장
● 상훈내용 : 태극무공훈장, 수교훈장 2회
● 참고문헌 :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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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1921. 8 일본 나고야 출생
*1946. 1 군사영어학교 졸업 및 육군정위(대위) 임관
*1948. 10 제 4여단장
*1949. 4 제주도지구전투사령관
*1949. 5 제 6사단장 및 육군 준장
*1950. 1 제 2사단장 및 태백산지구전투사령관
*1950. 6 제 7사단장
*1950. 7 제 2군단장
*1950. 9 육군 소장
*1951. 1 육군참모차장 겸 제 3군단장
*1952. 1 휴전회담 한국대표
*1952. 5 육군 중장
*1952. 7 제 2군단장
*1954. 7 교육총본부 총장
*1959. 2 제 1군사령관
*1960. 7 예편

1. 생애

1921년 8월 3일 일본 나고야에서 출생한 유재흥(劉載興) 장군은 다섯 살이 되던 해 조국으로 돌아와 서울 등 여러 지역을 돌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광복 후 군사영어학교에 관계하고 있던 이응준의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가 장교가 되고, 군의 간성이 되라”는 권고에 따라 유재흥 장군은 1946년 1월 15일 졸업과 동시에 육군 정위(대위, 군번 10003)로 임명되어 국방경비대 보급관이 되었다. 이후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군수국장과 문산을 포함한 서부전선의 방위를 담당했던 제1여단 참모장을 거쳐 1948년 10월 청주에 주둔하고 있던 제4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다음해 1월 육군사관학교 부교장으로 임명되어 근무하던 중 제주도지구전투사령관으로 발령을 받아 2개월간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치고 1949년 5월 육사로 복귀하였으나, 5월 12일 제6여騈?제6사단으로 승격되면서 곧바로 사단장에 임명되었다. 사단장으로 부임한 그는 최우선적으로 진지구축작업을 실시하였으며, 1949년 8월 6일 적 1개 대대가 신남지역의 양 고지를 공격해 온 신남지역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1950년 1월 대전에 주둔하고 있던 제2사단장으로 임명된 그는 태백산지구전투사령관을 겸하게 되었다. 그는 공비토벌작전에서 소부대 단위로 수색을 강화하여 일단 공비를 발견하면 그들이 발붙일 수 없도록 추격전을 감행하여 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그는 1950년 6월 10일 38선에 배치된 사단장의 전원 교체 방침에 따라 제7사단장에 임명되어 의정부 전선의 방어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제7사단은 적의 신예 전차부대가 철원쪽에 집결 중에 있다는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고 있으면서도 대전차 방어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적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인식한 유재흥 사단장은 사단이 자체적으로 취할 수 있는 방책을 강구하고 진지구축 강화와 57㎜ 대전차포 및 2.36인치 로켓포 훈련을 집중적으로 실시하였다.
개전 초기부터 지휘관으로서의 모든 역량을 경주한 그는 휴전이 성립된 직후 미 육군참모학교에 파견되었다. 약 1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교육총본부 총장과 연합참모본부 총장 그리고 제1군사령관 등 주요직책을 역임하고 1960년 7월 27일 육군중장으로 예편하였다.
예편 직후 태국주재 대사를 시작으로 스웨덴, 이태리 등 서구 우방국의 대사로 활동한 그는 1970년 대통령안보담당특별보좌관으로 국가안보에 이바지한 후 마침내 1971년 8월 국방부장관으로 발탁되었으며, 장관 재임기간 동안 방위산업 육성, 한국군 병력조정문제 및 주월 한국군 문제 등 국익과 안보에 관련된 현안을 해결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전시에는 군인으로, 평시에는 외교 및 국방의 일익을 담당하여 국가에 헌신한 유재흥 장군은 은성태극무공훈장을 비롯한 각종 무공훈장 5회, 수교훈장 2회 등 수많은 훈.포장을 국내외로부터 수여받을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지닌 지휘관이자 6.25전쟁의 영웅이었다.

2. 공적

1950년 7월 20일 제2군단장으로 부임한 유재흥 준장은 1950년 9월 2일부터 12일까지 낙동강전선에서 북한군의 9월 공세가 개시되어 보현산 방어선이 붕괴되고, 이어서 기룡산 저지선마저 돌파되어 북한군이 영천까지 침공하였을 때, 예하 제7사단과 제8사단을 지휘하여 북한군 제15사단의 공격을 격퇴하고 영천을 탈환하였다.
전투 결과 북한군 제15사단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전선에서 물러서게 되었으며, 국군 제2군단은 적 4,000여 명을 사살하고 300여 명을 생포하는 한편 전차 5대를 파괴하고 상당량의 각종 차량 및 화기를 노획하는 대전과를 수립함으로써 반격작전으로 이행할 수 있는 발판을 굳히게 되었다. 전투를 승리로 이끈 군단장 유재흥 준장에게 정부는 1951년 7월 26일 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 제101호)을 수여하였다.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유재흥 사단장은 비상소집을 실시하는 한편 제1연대와 제9연대를 적 접근로 상의 주진지에 배치하여 적의 전진을 저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강력하게 밀고 내려오는 적의 보.전 협동부대로 인해 덕정-의정부-창동으로 축차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6월 26일 저녁 의정부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된 직후 진영을 정비하고 후방으로부터 도착한 부대를 창동을 중심으로 배치한 뒤 현 전선의 방어에 나섰다. 그러나 전황이 여의치 못해 한강 이남으로 철수한 제7사단은 한강방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편성된 시흥지구전투사령부에 편입되어 노량진 방면의 적의 도하를 저지하였다.
한강방어선이 돌파되어 철수하던 7월 5일 육군본부는 수도사단과 제1사단 그리고 제2사단을 기간으로 하여 제1군단을 창설하고 군단장에 김홍일 소장을, 부군단장에 유재흥 대령을 육군준장으로 진급시켜 임명하였다. 이후 7월 20일 함창에서 제2군단이 창설되어 군단장에 오를 때까지 진천, 음성 동락리전투 등에 참여하였다.
제2군단장으로 부임한 이래 최초의 군단급 작전을 함창에서 전개하였다. 7월 20일 김무정이 이끄는 적 제2군단은 국군 제1군단과 제2군단이 낙동강을 넘기 전에 격파하는 동시에 함창-상주-김천 축선으로 진격하여 서부전선의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한 뒤 아군 진영을 동서로 양분시킬 의도에서 제6사단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김종오 사단장으로부터 전황을 보고받은 군단장은 항공지원을 요청하여 적을 격퇴하는 한편 미 제25사단으로부터 전차와 포지원을 받아 적의 돌파구를 봉쇄하고 제1사단을 군단에 편입하여 2주 동안 방어전을 전개하였다.
이 전투로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획득한 반면 적은 유엔군 증원부대가 도착함에 따라 결정적인 공격의 시기를 놓치고 이후의 작전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1950 년 7월 31일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으로부터 “전군은 8월 1일을 기해 현 선에서 낙동강으로 철수하여 방어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다. 8월 2일 낙동강 도하를 완료한 군단은 좌일선에 제1사단을, 그리고 우일선에 제6사단을 배치하였다. 다음날 제105전차사단으로 증강된 북한군 제2군단 예하 3개 사단은 제1사단이 배치된 대구 북방의 왜관과 다부동 일대에 대대적인 공세를 취해왔다. 제1사단은 유학산과 다부동 일대에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적과 25일간의 치열한 교전을 전개하여 적의 8월 공세를 저지함으로써 대구 북방의 방어선을 유지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제1사단은 진지를 미 제1기병사단에 인계하고 신녕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 전투로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작전으로 이행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다부동에서 낙동강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실패한 북한군은 9월 2일 제2군단 예하의 제15사단으로 하여금 국군 제8사단이 방어하고 있는 영천 북방을 공격해왔다. 이른바 ‘영천대회전(永川大會戰)’으로 불리는 이 전투는 낙동강방어선이 돌파되느냐 사수하느냐를 결정지을 만큼 전쟁의 전환점이 된 중요한 전투였으며, 특히 9월 5일과 6일 대구와 경주가 위협받고 있는 시점에서 영천이 돌파됨으로써 그 위기는 더욱 가중되었다. 북한군 제2군단은 5개 연대를 투입하여 영천을 점령하고 경주로 진출하려 하였으나 제2군단장 유재흥 준장은 이곳에 신편된 제7사단의 3개 연대는 물론 제1사단과 제6사단의 1개 연대를 각각 투입하여 방어조치를 취하는 등 적절한 지휘조치로 위기를 극복하고 낙동강방어선을 사수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당시의 전황은 적 제15사단이 다부동 정면에서 의성을 거쳐 영천 동북방 입암리로 이동하여 부대정비와 아울러 병력 및 장비를 증강
하고 최후의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반면에 영천 북방의 국군 제8사단은 제21연대를 좌일선으로 노고재-보현산에, 그리고 제16연대를 우일선으로 입암 남쪽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도로교차점이자 횡적 도로망이 잘 발달되어 있는 영천은 대구와 34㎞, 경주와 28㎞의 거리에 있는 철도의 분기점으로서 이곳이 돌파될 경우 대구와 경주 방면이 위협을 받게 됨은 물론 국군 제1군단과 제2군단이 분리되고 또한 동서간의 보급로가 차단될 수 있는 낙동강전선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8월말부터 전초전을 수행하고 있던 국군 제8사단은 9월 2일 야간에 북한군 제15사단의 공격을 받아 우일선의 제16연대 방어진지가 무너지자 영천 북방의 기룡산 일대로 철수하여 좌일선에 제21연대, 중앙일선에 제16연대와 제3연대 1대대, 우일선에 배속된 제7사단 5연대를 배치하였다.
한편 육군본부는 9월 4일 영천지구전투 지휘권 일원화 조치를 실시, 제2군단장 유재흥 준장으로 하여금 영천전투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제2군단장은 제8사단 진지가 돌파되어 영천이 피탈될 위기에 처하자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군단 작전회의를 소집하고 예하의 제1사단과 제6사단에서 각각 1개 연대씩을 차출하여 영천을 고수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제1사단과 제6사단도 적의 위협에 놓인 상황이어서 이러한 결단을 내리기가 매우 어려웠으나, 군단장은 적이 영천돌파에 주력하고 있다고 확신함으로써 과감하게 결정을 내렸으며, 결과적으로 승전의 주요 요인이 되었다. 군단장은 또한 전차부대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인식하고 미 제1기병사단과 제8군사령부를 방문하여 전차지원을 요청하였다.
이날 자정 무렵 북한군 제15사단은 각종 포의 지원하에 전차 5대를 선두로 입암-영천 도로를 따라 남진, 3개 방면에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제8사단은 중앙의 제16연대와 제3연대 1대대가 적의 주공을 맞아 분전하였으나 수 시간만에 돌파됨으로써 위기상황에 놓였다. 또한 좌우측의 제21연대와 제5연대도 영천 북방 선천동과 상리동 선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날 밤 계속된 전투에서 중앙의 제16연대가 적의 진출을 저지하지 못하고 영천 외곽으로 밀리자 사단장 이성가 준장은 대전차공격대대와 제7사단 8연대에게 즉각적인 역습을 지시, 5시간만에 적을 조교동으로 격퇴시키고 적의 돌파구 확대를 저지하였다.
9 월 5일 야간에 적의 주력은 조교동 부근에서 병력을 증원받아 전차를 선두로 영천읍내에 진입을 시도하였다. 제16연대와 제8연대는 적의 기습공격을 저지하는데 실패, 영천 남쪽으로 철수하였고 영천을 점령한 적은 곧바로 경주 방면으로 진격을 계속하였다.
이성가 사단장은 오수동에서 철수부대의 재편을 명령하는 한편 군단에 증원을 요청하였다. 이 때 양측방의 제21연대와 제5연대는 통신 두절로 영천의 전황을 알지 못한 상황에서 교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오후들어 좌전방의 제21연대를 공격하던 북한군 제45연대는 임무를 다른 부대에 인계하고 영천 방면으로 남하하여 영천의 돌파구 확대를 기도하였다.
군단장이 요청한 미 전차 1개 소대의 지원을 받으며 영천 읍내로 돌입한 공병대대는 소수의 적을 물리치고 영천을 탈환하고 완산동으로 진출하였으나, 저녁 무렵 조교동에 위치한 적의 역습에 대비해 다시 물러났다.
이 날 오후 제2군단의 증원부대가 도착함에 따라 제8사단은 영천 동북방에 제21연대와 제19연대를, 영천에 사단 공병대대와 제5연대 일부를, 영천 남쪽에는 제11연대를 배치하여 대구 방면으로의 돌파저지선을 형성하였다. 이 무렵 적은 영천 북동에서 대돌파구를 형성하고 국군 전선을 절단하기 위해 임포동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한편 신녕지구에서는 제6사단 2연대가 북한군 제8사단의 공격을 유엔공군의 지원아래 궤멸시킴으로써 영천을 우회공격하려는 적의 기도를 분쇄하였다. 9월 7일로 접어들어 영천 일대에서 제8사단의 승전보가 이어졌다. 제21연대가 적 제103연대의 계속된 공격을 격퇴하는가 하면, 제19연대는 남하하는 적의 보급지원부대에 대한 기습에 성공하였으며, 공병대대도 영천 남동 8㎞ 지점의 도로를 차단한 적을 공격하여 격퇴하였다.
다음 날 제21연대는 북한군 제73독립연대의 공격을 강력한 화력을 집중하여 저지하였고, 제19연대는 14시경 영천을 재탈환한 후 야간에 조교동으로 남진하여 적 제15사단의 1개 연대를 역습으로 격퇴하였다. 또한 제3사단에 배속되었던 제10연대가 원복, 아화리에서 제8연대 및 제5연대와 협조하여 적의 남진을 차단하였다.
이에 따라 적의 돌파구를 봉쇄하기 위한 방어선이 북쪽의 선천 제21연대로부터 남쪽의 아화 제5연대까지 “L”자형으로 형성되었으며, 이는 적의 돌파구 저지는 물론 돌파구 첨단의 후방을 차단하고 반격으로써 적을 포위섬멸하기에 적절한 것이었다.
9월 10일 마침내 국군 제2군단은 영천 북쪽에서 제21연대와 제19연대로 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영천 남쪽에서는 제5연대를 선봉으로 5개 연대가 총반격을 개시하였다. 제5연대는 임포동에서 적을 격퇴하였고, 나머지 연대는 유상동과 유하동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또한 제16연대는 작산동으로 진출하여 무질서하게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였다.
각 공격부대는 9월 12일, 9월 공세 이전 제8사단의 주저항선을 회복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적 제15사단은 전투력을 완전 상실한 채 전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 전투로 제2군단은 반격작전으로 이행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1950년 12월 초 만포에서 각급 지휘관 및 당 간부를 상대로 한 전쟁 성패에 대한 평가에서 김일성은 “영천을 점령했을 때 우리는 승리할 수 있었으며, 이를 빼앗기면서 우리는 패배했다”고 자인할
정도로 영천전투의 승리는 6.25전쟁에 있어 일대 반전을 가져오는 쾌거였다.
제2군단장 유재흥 준장의 적의 기도에 대한 적확한 판단과 결코 안심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예하 사단으로부터 1개 연대씩을 차출하여 적의 주공 방면으로 전환한 과감한 결단력은 부대 운용에 대한 하나의 교훈이 되었다.
전투가 종료된 다음날 육군소장으로 진급한 유재흥 군단장은 새로 배속이 변경된 제6사단과 제8사단을 지휘, 조림산에서 적 1개 연대를 섬멸한 후 육군본부의 무제한 공격명령에 따라 함창-안동-충주로 진격하였다. 10월 4일 군단은 38선을 돌파하여 폭파 직전의 화천 구만리발전소를 점령한 후 북진을 계속하여 평강에 도달하였다. 이후 평양탈환작전에 군단의 일부 병력을 참여시킨 군단장은 10월 19일 압록강을 향해 군단의 주력을 북진토록 하였다. 제6사단은 초산을 그리고 제8사단은 중강진을 향해 북진을 계속하였다.
10월 24일 유재흥 소장은 육군참모부장(陸軍參謀副長)에 임명되어 육본으로 돌아왔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의 상황이 급박해지자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군단장으로 임명해주길 부탁하였다. 다시 제2군단장에 임명되어 개천의 군단사령부로 돌아온 유재흥 장군은 청천강에서 중공군과 두 차례의 전투를 전개한 후 38선으로 철수를 시작하였다.
1951년 1월 4일 육군참모부장으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월 9일 제3군단장에 임명되어 제9사단과 제7사단, 그리고 제3사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제3군단장은 북한군 제2군단과 길원팔 유격부대가 영월-춘양 사이의 남대리를 거쳐 영주-안동으로 진출하려는 기도를 봉쇄하기 위해 1월 14일 공격을 개시하였다. 같은 날 제3사단은 춘양에서 밀고 올라가는 군단포위작전을 전개하여 약 1,500명에 달하는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고, 23일에는 제7사단이 영월 사수를 위해 병력을 집결중인 적 제2군단 주력을 공격하여 1,000여 명의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는 등 적 제2군단을 궤멸시켰다.
이후 제3군단장 유재흥 소장은 5월 중순 중공군 제1군과 제27군, 북한군 제6사단, 제12사단, 제32사단 등의 대규모 공격을 받고 치열한 전투 끝에 하진부리로 철수했던 현리전투를 마치고 5월 26일 육군참모부장으로 복귀하였다.
휴전회담 한국측 대표로 발탁되어 활동하던 1952년 5월 19일 육군중장으로 진급한 그는 며칠 후 한국측 대표직을 이한림 준장에게 인계하고 제2군단장에 보임되었던 7월 23일까지 육군참모부장직을 수행하였다.
유 재흥 중장이 제2군단장으로 부임할 당시의 전황은 휴전회담이 개최된 지 1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쌍방간에 제한된 목표에 대한 공방전만을 전개하고 있었다. 금성천 북쪽의 수도고지와 지형능선을 확보하고 있던 군단 예하 수도사단은 중공군 제12군의 공격을 받고 3개월 여에 걸쳐 방어전을 전개하였다.
수도사단은 중공군 제12군 산하 제34사단과 제35사단의 집요한 공격을 미 제5포병단의 지원아래 격퇴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5차례나 수도고지와 지형능선을 피탈당하였으나 결국 진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전투는 신태영 국방장관이 “수도고지 탈환전은 6.25전쟁 중 최대의 격전이었다”고 담화문을 발표할 정도로 치열했으며, 쌍방간의 수많은 인명손실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교전 이전의 원점에서 종결되었다.
제2군단이 수도고지를 완전 점령한 이후 유재흥 중장은 수도고지의 동쪽에 위치한 527고지와 748고지전투를 지휘하였으며, 1953년 2월 3일 육군참모차장으로 전보되어 재직하던 중 휴전에 임하였다.

* 참고문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2003
국방부, 자유민에게 전해다오 제1집, 1955
육군본부, 한국의 전쟁영웅들, 1992
이원복, 호국용사100선, 명성출판사, 1976
국방부, 호국의 별 제3집, 1979
포병학교, 포병의 발자취, 1963
병학사, 내 젊음 조국에, 1987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38도선 초기전투: 중동부전선 편, 1982
국방일보,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2002. 11. 9
국방부, 한국전쟁사 제8집, 1975
공군본부, 공군사 제1집
육탄 10용사 현충회, 육탄 10용사, 도서출판 法政, 1986
국방부, 호국의 별, 제6집, 국방부 정훈국, 1982
국방일보, 한국의 전쟁영웅들 (1) 육탄 10용사, 1992. 6. 4
국방부, 호국전몰용사공훈록 제3집, 1997
**********
역시 전쟁기념관 자료입니다.

Comments

신성권8312경기 2021.01.31 18:14
현리전투에서 철수명령도 내리지 않고 혼자 경비행기 타고 도망친 경력은 빠졌네요. 유엔군사령부에서 그 책임을 물어 한국군의 작전권을 박탈했죠.
손은석9705서울 2021.01.31 18:36
선배님.  한국군의 작전권은 엄밀히 말해서 이승만 대통령이 이미 1950년 7월에 맥아더 장군에게 넘겼습니다. 현리 전투는 한국군과 유엔군(특히 미군)의 지휘 체계가 이원화된 상태에서 발생한 비극인지라 유재흥 장군의 패배가 계기가 되었을 뿐이지 그 때문에 박탈당한 건 아닙니다. 공과 과가 있는 유재흥 장군은 2군단과 3군단 괴멸에 책임이 있기는 하지만 전쟁 초기 영천 전투에서 2군단장으로 전공을 세운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현리전투는 애초에 미 10군단장 아몬드 장군이 결정적인 패배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에 전쟁사에서 한국군 패배에 대해서 크게 책임을 묻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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