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종 출신 장교의 6.25
칠성은

육.종 출신 장교의 6.25

민경철(88.11충북) 1 8,129 2011.03.17 20:41
 
[2111호] 2010.06.28

육군종합학교 출신 소위가 겪은 6·25

중공군 포로 심문하다 전방 자원
중공군과 대치 중 방망이 수류탄 맞아
아직도 등에 그때 박힌 파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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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3월 나는 서울 양정중학교(6년제)를 졸업했다. 나는 황해도 은율 출신으로 서울에 유학 중이었다. 그런데 학교에 다니던 중 고향이 공산화되어 38선으로 고향 가는 길이 막혀버렸다.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고향 부모님으로부터 지원이 끊겨 그럴 수가 없었다. 마침 간부후보생 모집광고를 보고 응모해 합격증을 받아놓고 있었다.
   
   나는 서울이 함락되었을 때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한 채 필동에 있는 친척집에서 3개월간 숨어지냈다. 9·28 서울 수복 이후 환영대회를 나갔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내가 이북 말씨를 쓰는 것을 경상도 출신 군인들이 이상하게 보았다. 나는 국군에 의해 체포되어 포로수용소에 갈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 어떤 군인이 내게 다가왔다.
   
   “너 양정 다니지 않았니? 나는 중앙 다녔다. 휘문중학교에서 5대 사립(휘문·보성·양정·배재·중앙) 학도호국단 간부 모임을 가질 때 너를 봤다. 나는 ○○○의 후배다.”
   그 친구가 신원을 보증해줘 나는 가까스로 풀려났다. 지금은 하도 오래돼서 그 친구의 얼굴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 사건을 겪은 뒤 나는 전시 상황에서 괜히 돌아다니다가는 큰일을 당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서울에서 사촌동생을 다시 만났다. 사촌동생은 북진(北進)하는 국군을 따라 고향을 가겠다고 따라 나서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나는 북진 대열에 따라나서지 않았다. 사촌동생에게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통일이 되었으니까 어머니 만나는 것은 천천히 해도 된다. 나는 간부후보생에 들어가기로 되어있으니까 네가 먼저 가서 고향을 보고 와라. 나는 군에 가서 소총 소대장을 하고 싶다.”
   
   이것이 운명을 갈라놓았다. 사촌동생은 고향 은율에 갔다가 그만 적군에 포위되고 말았다. 결국 고향 은율에 있는 구월산에 들어가 공산군과 싸웠다. 구월산 유격대로 전사했다. 나도 그때 어머니를 만나러 고향에 갔었더라면 구월산에서 그렇게 죽어갔을 것이다.
   
   1951년 1월 나는 화물차 지붕 위에 매달려 부산으로 갔다. 6·25전쟁 하면 으레 나오는 열차 위에 매달려 있는 피란민 사진. 내가 그중 한 명이었다. 화물차가 터널 속을 지나갈 때가 가장 힘들었다. 시커먼 물이 빗방울처럼 후두둑 후두둑 얼굴 위에 떨어졌다.
   
   부산에 도착한 나는 동래여고에 있던 종합학교 23기로 입교했다. 그날은 1월 15일로 우연히 내 생일이었다. 2개월간 훈련을 받고 소위로 임관되었다. 임관 직후 나는 대구에 있는 육본 정보국 정보학교로 배치되었다. 당시 정보학교는 제7훈련소라고 불렀고 달성초등학교에 있었다. 그때 정보국으로 배치된 소위는 나를 포함해 이창수, 황장호, 윤자순 등 5명이었다. 그때 우리들은 이한림 정보국장에게 신고를 했다. 이한림 장군이 “귀관들은 장교가 아니야. 견습사관이야”라고 말했다. 쌀쌀한 목소리여서 여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나는 정보학교를 거쳐 포로심문관 파견대장으로 중부전선의 2사단에 파견되었다. 거기에서 중국어를 하는 통역장교와 함께 중공군 포로를 심문했다.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하는 가운데 철원, 금화 등지에서는 중공군 패잔병이 무더기로 잡혔다. 포로들에게서 얻은 정보를 취합해 본부에 보고하는 역할을 맡았다. 중공군 포로들은 대부분 20대 초반이었다.
   
   
   중공군 포로, 일자무식에 군기도 엉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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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들이 참호에서 돌덩이를 집어던지고 있다. photo 항미원조戰史
포로로 잡힌 중공군은 인해전술의 소모품이었다. 노획물은 거의 없었다. 중공군들은 대부분 자기 이름자를 쓸 줄 몰랐다. 그래서 심문하는 데 애를 먹었다. 또한 방언이 너무 많아 통역관이 힘들어 했다. 중공군은 소속 부대 이름을 제대로 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고향을 물어보면 행정구역을 대지 않고 “○○골 출신이다” “○○리 출신이다”라고 대답했다. 중통(중국어 통역) 중위는 포로들을 대략적으로 분류해 어느 지역 출신이라고 보고했다.
   
   그들은 항미원조(抗米援朝)라는 구호만 알고 있었다. 어디서 어디로 이동하는지 전혀 몰랐다. 물론 지도 같은 것도 없었다. 중공군들이 알고 있는 한국 지명은 딱 한 곳, 부산이었다. 부산을 점령하면 신을 것이라며 배낭에 꽃신을 하나씩 갖고 있었다. 꽃신은 꼭 실내화 같았다.
   
   중공군들은 모두 콩을 넣어 둔, 순대보다 굵은 띠를 어깨에 메고 있었다. 물에 불려 먹기 위한 비상식량이었지만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중공군들은 미군이나 한국군이 버리고 간 C레이션을 주로 먹었다고 했다. 들리는 말로는 중공군이 대단하다고 들었는데 포로들을 보니까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천하태평이었다. 조직 생활을 한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필기도구를 갖고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포로 심문이 지겨워진 나는 상부에 전방으로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그렇게 해서 1951년 10월, 양구 북방 문등리의 양갈래 고지 지역으로 나갔다. 7사단 5연대는 양갈래 고지를 놓고 중공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대대장한테 신고를 하러 들어갔을 때 대대장은 나와 악수도 하지 않은 채 작전지도를 보면서 “응, 배치하라”고 말했다. ‘하루살이 소대장’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나는 이렇게 해서 대대장 얼굴도 못본 채 근무를 시작했다.
   
   
   압박 붕대용 삼각건이 목숨 살려
   
   양갈래 고지는 원래 숲이 무성한 곳이었지만 전쟁 이후 나무가 다 사라져 버렸다. 멀리서 보니 산이 황톳빛으로 빨갰다. 전방 소대장으로 보름쯤 지났을 때였다. 양갈래 고지 앞에는 901고지가 있었다. 901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새벽 5시에 소대원들을 이끌고 산을 올라갔다. 흙이 발목까지 푹푹 빠졌다. 중공군이 기관총을 아래로 쏘아대고 있었다.
   
   8부 능선쯤 올라갔을 때였다. 나는 명령을 내리기 위해 부하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고개를 처박고 못 본 척하고 있었다. 부하의 이름을 불러댔지만 그는 다른 데를 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부하들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중공군이 던지는 방망이 수류탄이 “펑, 펑, 펑” 하고 여기저기서 터졌다. 시커먼 게 대굴대굴 굴러 떨어지는 게 보였다. 순간 야구배트로 등짝을 있는 힘껏 때리는 통증을 느꼈다. 나는 쓰러졌다. 조금 뒤 화약 냄새가 확 코를 파고들었다. 어깨에 감각이 없었다. ‘내가 살았나’ 하고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소대원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나 혼자만 남았다. 내가 방망이 수류탄을 맞은 지점은 경사가 가파른 곳이었다. 조금 움직이니까 몸이 주르륵 미끄러져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곤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연대 본부였다. 나는 그때 압박 붕대용으로 삼각건을 목에 감고 있었는데 그게 나를 살려준 것이다. 사단 이동병원으로 옮겼지만 위험해서 수술을 못한다고 했다. 결국 대구 1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가 제주도 98육군병원에서 목 부위의 파편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B급 부상자로 판정되어 다시는 전방 소대장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내 몸에는 지금도 중공군의 흔적이 남아있다. 병원에서 X레이를 찍으면 의사가 꼭 물어온다. 등에 있는 작은 콩알 같은 게 뭐냐고. 목 부위에 박힌 큰 파편 두 개는 제거했지만 등에 박힌 작은 파편은 빼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등을 찬찬히 만지면 그날 901고지의 화약 냄새가 손가락 끝으로 전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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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이주석(82.02강원) 2011.09.13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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