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런 선배 전우 : 함준호 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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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선배 전우 : 함준호 준장

칠성관리자 0 13,671 2007.03.01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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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문 : 咸俊鎬
● 생몰연대 : 1921.11.17-1950.6.27
● 출신지역 : 서울 종로
● 최종계급 : 육군 준장
● 상훈내용 : 태극무공훈장
● 참고문헌 :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약력

*1921. 11 서울 출생
*1949. 2 군사영어학교 졸업 및 육군참위(소위) 임관
*1948. 8 제 3연대장
*1948. 11 육군중령
*1949. 6 지리산지구전투사령관
*1950. 1 제 5사단 부사단장
*1950. 4 제 7사단 1연대장
*1950. 6 전사
*1950. 6 육군준장(추서)


1. 생애

1950년 6월 27일 창동저지선에서 수도 서울방어를 위해 밀려오는 적 전차에 대항하다 적탄에 의해 전사함으로써 위국헌신(爲國獻身)의 예를 몸소 실천한 제7사단 1연대장 함준호(咸俊鎬) 대령은 1921년 11월 17일 서울 종로에서 출생하여 경기도립상업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인재였다. 재학 중에는 일본인 학생들을 모두 제치고 학생대대장까지 지내고 오늘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전신인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진학하였다. 조국의 해방을 맞아 국군창설에 이바지하겠다는 각오로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한 그는 1946년 2월 18일 졸업과 동시에 국방경비대 육군 참위(소위)로 임관되면서 10050의 군번을 부여받았다.
1948년 8월 함준호 소령은 5월 1일부로 제5여단에 예속된 제3연대장에 보직되었으며, 10월에 ‘여.순 10.19사건’이 발생하자 부연대장인 송석하 소령의 남원대대를 진압작전에 출동시켜 여수와 순천을 탈환하는데 공을 세웠다. 12월 30일 일단 작전을 종료하고 제15연대와 교대하여 원대로 복귀한 연대는 반란군의 주력을 섬멸하기 위해 다음해 1월 전주에서 남원으로 이동하여 연대장 함준호 중령의 지휘 아래 본격적인 토벌작전을 전개, 제14연대의 반란 주모자인 김지회(金智會)와 홍순석(洪淳錫) 중위 등 수뇌 일당을 사살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처럼 제3연대장에 임명된 후에는 지리산지구전투사령관으로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였고, 전쟁발발 직전인 1950년 4월 30일에는 제5사단 부사단장을 거쳐 제7사단 1연대장으로 부임하였다. 6월 25일
마침내 북한의 기습적인 전면도발이 개시되자 동두천.의정부지구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그는 수도 서울의 사수를 결의하고 전투에 임하여 진두지휘하였으나, 아쉽게도 1950년 6월 27일 적탄에 의해 전사하였다.
한편, 인자하고 관대한 성품의 소유자였던 장군은 서도에도 능하여 경기도립상업학교 재학 시절에는 전국학생서화전람회에서 최우수작품으로 입상될 정도였으며, 특히 중국 서도의 삼성인 구양순의 필치를 능가한다는 찬사를 받았다. 이처럼 서도에 의해 형성된 결과인지 그의 성품은 온화하고 인자하며 관대하여 예하 장병들은 장군의 말이 없어도 충직하게 장군을 따르게 되었다.
이러한 장군의 성품은 지리산공비토벌작전에서 공비들을 자수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함 장군은 국군에 의해 통비(通匪) 혐의를 받던 자가 스스로 찾아와 “이틀만 석방해주면 국군이 탈취당한 무기를 찾아오겠다”하자 그를 풀어주었다. 이틀 후 그는 탈취한 무기와 함께 통비분자 16명을 연대 CP로 데려왔다. 이유를 묻자 그는 “함 장군의 말씀과 어진 성품에 감복하여 자수를 결정하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이처럼 함준호 장군은 부하와 심지어는 적으로부터도 존경을 받는 덕장이자 전투에 임해서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용장이었다. 정부는 장군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51년 7월 26일 군인 최고의 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는 한편 육군준장으로 추서하였다. 현재 장군의 유해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장군묘역 1-7에 안장되어 있다.


2. 공적

1950년 6월 25일 기습적으로 남침을 감행한 북한군은 그들의 1단계 목표인 수도 서울의 조기점령을 위해 개성과 고랑포 방면에는 제1사단과 제6사단을, 동두천과 의정부 방면에는 제3사단과 제4사단을 배치하고 있었다. 38도선에서 수도 서울에 이르는 단거리 접근로는 철원-동두천-의정부 축선으로 불과 50㎞에 불과하였다. 이 축선은 철원-연천-의정부에 이르는 경원가도와 김화-의정부에 이르는 한 개의 도로가 의정부에서 합류되어 서울에 이르는 단일로였으며, 별다른 하천 장애물도 없었다. 이러한 지리적인 조건으로 북한군은 이 접근로를 택하였고, 아군도 이 축선을 적의 접근로로 판단하고 있었다.
북한군의 주공 좌일선은 제3사단이 제109전차연대의 지원 하에 포천가도로, 우일선은 제4사단이 제107전차연대의 지원을 받으며 동두천가도로 진출하여 의정부를 양쪽 방면에서 공격해왔다. 이에 맞서 국군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은 예하 제1연대를 동두천 방면에, 제9연대를 포천 방면에 각각 배치하고 적의 침공을 방어하고 있었다.
그러나 적은 전차를 앞세우고 아군 진지를 계속 격파하며 침공해 온 반면 아군은 57㎜ 대전차포와 로켓포를 집중 배치하고 대응에 나섰으나 역부족으로 분산.후퇴하게 되었다. 포천과 동두천, 그리고 마침내 의정부마저 적에 의해 점령됨으로써 수도 서울의 운명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육군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은 6월 27일을 기해 의정부를 탈환하기로 결심하고 창동선에서 후퇴하여 오는 병력을 수습하였으나, 그 병력은 1개 연대병력에 불과하였다.
한편 동두천 전선에서 분전하다가 창동 저지선까지 후퇴하여 온 제7사단 1연대장 함준호 대령은 불과 1개 대대 정도의 예하 장병들을 창동 북방 62고지 후방에 집결.배치시켰다. 마지막 결전을 위한 작전을 구상하는 도중 적의 전차가 우이동 골짜기로 접근해 오는 것을 목격한 그는 적 전차를 격파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인식하고, 작전장교와 연락병을 대동하고 접근로로 다가가 2대의 적 전차에 맞섰다. 전차를 폭파하기 위해 수류탄을 뽑아 든 순간 적의 선두 전차는 그의 일행을 향해 전차포와 기관포 사격을 가해왔다. 전신에 파편상을 입은 그가 투척하려던 수류탄을 손에 쥔 채 쓰러지자 작전장교가 달려들어 후송에 나섰으나 도중에 전사하였다.
개전 이래 연대장으로서 최초의 전사자가 된 함준호 장군은 전쟁초기 모든 불리함을 딛고 수도 서울을 사수하고자 결사의 각오로 싸운 지휘관이었으며, 그의 임전무퇴의 감투정신은 모든 지휘관의 귀감이 되었다.


* 참고문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2003
국방부, 자유민에게 전해다오 제1집, 1955
육군본부, 한국의 전쟁영웅들, 1992
이원복, 호국용사100선, 명성출판사, 1976
국방부, 호국의 별 제3집, 1979
포병학교, 포병의 발자취, 1963
병학사, 내 젊음 조국에, 1987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38도선 초기전투: 중동부전선 편, 1982
국방일보,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2002. 11. 9
국방부, 한국전쟁사 제8집, 1975
공군본부, 공군사 제1집
육탄 10용사 현충회, 육탄 10용사, 도서출판 法政, 1986
국방부, 호국의 별, 제6집, 국방부 정훈국, 1982
국방일보, 한국의 전쟁영웅들 (1) 육탄 10용사, 1992. 6. 4
국방부, 호국전몰용사공훈록 제3집,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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