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지구 전투
칠성은

의정부지구 전투

칠성관리자 0 21,655 2007.03.01 07:28
● 전투시기 : 1950.6.26
● 전투지역 : 경기도 의정부
● 주요지휘관 : 유재흥 준장, 함준호 대령
● 참고문헌 : 한국전쟁사(국방부), 한국전쟁사(전쟁기념사업회), 38도선 초기전투(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 의정부지구 전투의 개요

본 전투는 1950년 6월 26일, 한국전쟁 발발 당시에 서울 북쪽 17km의 의정부 정면에서 유재흥 준장이 지휘하는 제 7사단과 이형근 준장이 지휘하는 제 2사단이 북한군 제 1군단(군단장 중장 김웅) 예하의 2개 사단과 1개 기갑여단으로 구성된 공격집단의 침공을 막아, 이를 격멸코자 한 방어전이다.
그 경과의 개요를 보면, 벽두에 제 7사단이 포천과 동두천 부근에서 서전을 치른데 이어, 대전에서 증원한 제 2사단이 의정부 부근에서 격돌케 되는 바, 바로 이 지역은 수도 서울의 관문과도 같아 피아간에 주력으로써 대결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적은 처음부터 여기에 공격의 중점을 두고 병력과 화력을 집중투입한데 반하여 아군 측에서는 아무런 대비 없이 이와 맞섬으로써 전투 초기의 상황이 급박하게 변해갔다.
특히 이 지역은, 경원 본도인 3번 도로를 비롯하여 동측의 43번과 서측의 316번이 모두 양호한 노면에 열을 지은 듯 남북으로 뻗힌 데다, 광천산맥과 천보산맥이 종벽을 이루어,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횡적연계와 종심배치에 불리한데 비하여 공격하는 입장은 기계화 부대의 운영과 공격 돌입이 용이하였다.


625CB00014-1.jpg

2. 의정부지구 전투의 주요 지휘관

*아군
제 7사단장 준장 유재흥
(6월 26일 14:00부로 의정부지구 전투사령관)
제 1연대장 대령 함준호
제 1대대장 중령 한태원
제 2대대장 소령 이의명
제 3대대장 소령 김황목
제 9연대장 중령 윤춘근
제 1대대장 소령 류환박
제 2대대장 소령 전순기
제 3대대장 소령 이철원
제 5포병대대장 소령 이규삼
배속부대
수도경비사 예하,
제 3연대장 중령 이상근
제 1대대장 소령 임백진
제 2대대장 소령 박남표
제 3대대장 소령 김붕상
제 18연대장 중령 임충식
제 2대대장 소령 장춘권
제 3대대장 소령 안민일
보국대대 제 2중대장 중위 박창암
기갑연대 장갑차 1개소대
포병학교 대전차포 2개중대
제 2사단장 준장 이형근
제 5연대장(대리)중령 박기성
제 1대대장 소령 이정도
제 2대대장 소령 차갑준
제 16연대장 대령 문용채
제 1대대장 중령 유의준
제 2대대장 중령 김 헌
배속부대
제 25연대장 중령 김병휘
제 2대대장(대리) 대위 나희필
제 3대대장 소령 고동석
포병학교 제 2교도대장 소령 김풍익
육군사령학교장 준장 이준식
생도대대장 중령 조 암
배속부대
서울시경 전투경찰대대
인접부대
우 인접 : 제 6사단장 대령 김종오
좌 인접 : 제 1사단장 대령 백선엽

*적군
북한군 제 1군단장 중장 김웅
제 3사단장 소장 이영호
제 7연대장 대좌 김창봉
제 8연대장 중좌 김병종
제 9연대장 대좌 김만익
포병연대장 대좌 안백성
제 4사단장 소장 이권무
제 5연대장 대좌 최인덕
제 16연대장 대좌 박승희
제 18연대장 대좌 김희준
제 105기갑여단장 소장 유경수
제 107, 109 전차연대기간


0014-2.jpg


3. 의정부지구 전투의 진행과정

육군총참모장은 제7사단사령부를 2회 시찰한 후 재경부대를 의정부지역에 우선적으로 투입하는 동시에 후방 3개 사단을 서울로 이동시키도록 조치하였다.
이에 따라 25~26일 사이에 의정부지구에 투입된 증원부대는 총 15개 대대(1개 전투경찰대대 포함)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부대들은 건제를 고려하지 않고 축차적으로 투입되었다. 더욱이 탄약을 위시한 각종 보급지원이 뒤따르지 못했으며, 유·무선통신망이 구성되지 않아 횡적 연락과 협조는 고사하고 상하급 제대간에도 통신이 소통되지 않아 전투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6월 26일 01:00에 제 7사단사령부를 시찰한 육군총참모장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의정부를 고수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반격명령을 하달하였다. 이때 제 2사단장(사단장 준장 이형근)은 반격작전을 전개할 시기가 아니라는 것과 다음날 제 2사단 주력이 도착한 후에 전투력을 집중 운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방어에 유리한 한강선에서 방어 작전을 실시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그에 대한 총참모장의 반응은 매우 강경하였다. 그는 무조건 반격으로 전환하라고 엄명하고 적 전차는 육탄공격으로 파괴하라고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26일 아침부터 제 7사단은 동두천을 목표로 반격을 감행하게 되었으며, 제 2사단은 축석령을 경유하여 포천을 목표로 반격하였다.
제 7사단은 포천지구에 투입된 제 9연대와 제 3연대가 분산되었으므로 가용병력은 제 1연대 예하 2개 대대와 제 3연대 2대대 및 전날(25일) 사단에 배속된 제 18연대 예하 2개 대대를 합쳐 모두 5개 대대였지만, 실제 병력은 증강된 1개 연대규모에 지나지 않았다. 제 7사단은 제 1연대로 하여금 동두천을 공격하게 하는 한편, 배속된 제 18연대는 신산리를 공격토록 하였다.
이 무렵 제 7사단과 대치한 적 제 4사단은 동두천에서 공격을 위한 재편성을 완료하고 공격개시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즉 적 또한 아군의 반격과 거의 같은 시간에 의정부를 탈취하기 위한 공격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적은 아군이 3번 도로를 강력히 방어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한 듯, 동두천~덕정~의정부로 이어진 3번 도로를 피하여 그 서쪽의 봉암리~덕정간 도로에 주공을 투입하여 기습효과를 노리고 있었다.
한편 제 7사단은 수색정찰이나 관측을 통한 적정수집활동을 거의 하지 않아 적정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26일 08:00시에 반격을 개시하였다. 주공인 우일선의 제 1연대는 적의 저항이 전혀 없는 가운데 동두천~소요산까지 진출하였으나, 조공인 제 18연대는 봉암리 부근에서 강력한 적과 조우하여 분산되고 말았다. 그 얼마 후에 적이 덕정을 좌우측에서 협공하였으므로 제 7사단은 부득이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 7사단이 반격을 전개한 자체가 무모한 작전행동이었다.
제 1연대는 반격 중에 적의 강력한 공격에 봉착하여 퇴로가 차단됨으로써 소대, 또는 중대단위로 흩어져 우이동·창동·태릉방면으로 분산 철수하였다. 또한 이날(26일) 저녁까지 마차산에서 연대로부터 명령이 하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제 1대대는 어두어진 후에 마차산에서 철수하였으나 끝내 대대 지휘체제가 와해되고 병력은 사방으로 흩어져 창동, 태릉 등지로 분산되었다.
한편 제 1연대보다 2시간이 늦은 26일 10시에 반격을 개시한 제 18연대(연대장 중령 임충식)는 이날 12시경에 은현초등학교 부근에서 방어로 전환하게 되었는데, 이는 적의 계속적인 압력으로 의정부가 위협받게 되자 사단에서 취한 조치였다. 제 18연대는 은현초등학교 서쪽 감제고지에 급편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중 적의 기갑부대가 덕정으로 접근하였으나 연대는 적을 그냥 통과시켰다. 이는 엄청난 전투력의 전차를 직시한 연대장이 무모한 대결을 회피하고 후속하는 적 보병과의 일전에 대비하여 아군의 배치상태를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취한 조치였다. 그러나 적 보병부대는 나타나지 않고 사단본부로부터 이날 밤중까지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한 제 18연대장은 의정부가 적에게 점령되었다고 판단하고 철수를 개시하여 삼송리를 경유 28일에 행주나루터에서 한강을 도하한 후 소사·오류동 지역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다.
한편, 제 2사단은 26일 03:00시에 반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이때 사단의 병력은 제 5연대 예하의 2개 대대밖에 없었다. 전날 청주를 떠난 제 16연대는 이날 04:00시에야 창동에 도착하였다.
2개 대대병력으로는 포천탈환이 어려우므로 축석령을 방어하고 있을 제3연대를 초월 공격하겠다는 것이 사단장의 작전구상이었으나 이는 너무 성급한 반격이었다. 이 무렵 제 3연대는 이미 분산되었는데 제 2·7사단장은 그러한 사실을 모른 채 작전구상을 함으로써 제 2사단의 반격작전은 처음부터 승산이 없는 작전이 되고 말았다.
제 5연대(참모장 중령 최창언)는 제 2대대를 선발대로 먼저 축석령으로 진출시켰으나 제 3연대는 그곳에 없었다. 이윽고 자욱한 안개 속에서 전차의 굉음이 들리더니 적 기갑부대가 제 2대대(대대장 소령 차갑준) 진전에 나타났다. 제 2대대 장병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용감히 싸웠으나 교전한 지 10분도 못 되어 탄약이 떨어지고 투지마저 꺾여 분산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제 2대대장은 병력의 일부를 수습하여 태릉으로 철수하고 나머지 병력은 분산되어 한강 남쪽의 낙오자수집소에 집결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후속부대인 제 1대대(대대장 소령 이정도)는 고갯마루에 도착하기도 전에 적과 싸워보지도 못한 채 퇴계원방면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이렇게 제 2사단은 적을 저지하는 데에도 급급한 지경이 되자 제 16연대(대대장 대령 문용채)를 상금오동 부근의 감제고지에 배치하여 적의 진출을 저지하려 하였다. 그로부터 약 1시간 후에 전차 20여 대를 앞세운 적이 공격을 재개하자 아군은 전차를 파괴할 수단이 없어 전전긍긍하였다. 다만 제 16연대 1대대 부대대장(김진동 대위)이 지휘하는 특공대가 2.36인치 로켓포의 기습적인 집중포격으로 선두 전차 1대를 배수로에 빠지게 함으로써 잠시 동안 적의 진출을 지연시켰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 아래에서 제 16연대의 2개 대대는 적 보병부대와 한차례의 교전을 치른 후에 태릉과 호원동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26일 12시쯤 제 16연대 방어진지를 돌파한 적은 의정부를 향해 계속 남하하고 덕정을 점령한 적 제 4사단은 의정부를 서쪽에서 협공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다급한 상황 아래에서 금오리에 포진한 육군포병학교 제 2교도대대장(김풍익 소장)은 105mm 곡사포 1문으로 적 전차의 무한궤도를 파괴하였지만 제 2탄을 장전하는 순간 후속전차의 포격으로 대대장과 제 2중대장(장세풍 대위) 및 6번포분대원 모두가 전사하였다.
그 직후부터 적 전차대는 아군의 저항이 거의 없는 가운데 26일 13시경에 의정부 읍내로 진입하였다. 의정부읍내에서는 철수하는 군인과 뒤늦게 피난길에 오른 주민 및 부상병들의 인파로 대혼잡을 이루고 있었으나 아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제 7사단과 제 2사단 전술지휘소는 창동으로 철수하여 새로운 전술지휘소를 개설하게 되었다.

백석천·내촌 일대의 지연전

6월 26일 오전에 창동으로 열차이동한 제 25연대(연대장 중령 김병휘)는 육군본부 명령에 따라 의정부 남쪽 교외의 백석천에 제 2·3의 2개 대대를 배치하였다.
적 제 3사단은 의정부를 점령하자 곧 다음 작전을 위한 재편성과 재보급을 위해 약 4시간동안 지체하고 있었다. 적은 이날 17:00시에 공격을 재개하였다. 전차 20대를 앞세우고 접근하는 적의 위세에 불안감을 느낀 어느 병사가 오발하는 순간, 아군 병사들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발생하여 방어진지가 적에게 노출되었고 얼마 되지 않는 휴대탄약은 교전한 지 2~3분 만에 바닥이 나고 말았다.
이런 상황 하에서 적 전차대는 백석교를 속속 통과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다리 밑에 잠복한 2.36인치 로켓 분대장이 5번전차를 파괴시켰으나 후속전차가 발사한 포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뜻밖에 전차 1대를 잃은 적은 충격을 받았는지 더 이상 진격하지 않고 의정부로 되돌아갔다. 앞서 가던 전차 4대는 호원동 부근에 방어진지를 편성한 제 16연대 2대대(대대장 소령 김헌)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친데다가 후속전차가 없음을 확인한 듯 약 2km를 후퇴하여 노상에서 사격태세를 갖추고 후속부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이들 전차와 격전을 치른 제16연대 2대대는 많은 피해를 입고 분산되었다.
이날 밤 백석교 우측에 배치된 제25연대 11중대장(문일수 중위)은 전차 특공대를 편성, 지휘하여 노상에 정지중인 적의 전차 4대를 습격하여 그 중 2대를 파괴하는 큰 전공을 세웠다. 다음날(27일) 새벽 적이 공격을 재개하자 제 25연대는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탄약 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태릉, 능곡, 수원 등지로 분산 철수하였다.
한편 육군사관학교장(이준식 준장)은 25일 13:00시 육군본부 명령에 따라 생도대대와 배속된 전투경찰대대를 391번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내촌 부근의 감제고지에 배치하였다. 다음날 아군은 남하하는 적과 격전을 치른 후 태릉으로 철수하여 제 9연대와 더불어 불암산~태릉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미아리~태릉방어선의 우측 일각을 담당하게 되었다.


0014-3.jpg

4. 의정부지구 전투의 결과

포천과 의정부 전선이 무너진 뒤로 그 파급영향은 거의 전 전선에 미치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좌 인접인 제 1사단(사단장 대령 백선엽)은 아직 임진강 방어진을 고수하고 있는데, 동측방이 무너져 그 위협으로 말미암아 철수를 강요당하는 상황에 놓이고, 태릉 정면에서도 생도대대가 적선 후방에 위치케 되는가 하면 춘천의 제 6사단과 강릉의 제 8사단까지도 수도 서울의 위기에 따른 전술적 및 심리적인 충격으로 작전에 혼미를 거듭하게 되었다.
이에 반하여 적은 서울 탈환을 제 1목표로 삼아 의정부 지역의 전과 확대를 획책하는 한편 일부의 병력을 27일에 벌써 김포반도로 상륙시켜 서측방에서 위협을 가하였다.


**************
전쟁기념관에서 나온 자료입니다.

Comments

번호 포토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게시물이 없습니다.
Category
State
  • 현재 접속자 70(1) 명
  • 오늘 방문자 884 명
  • 어제 방문자 803 명
  • 최대 방문자 6,359 명
  • 전체 방문자 1,944,820 명
  • 전체 게시물 36,652 개
  • 전체 댓글수 58,420 개
  • 전체 회원수 2,994 명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
광고 / ad
    Previous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