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서울 진격전
칠성은

경주-서울 진격전

칠성관리자 0 13,006 2007.03.01 07:21

●전투시기 : 1950.9.21-10.7
●전투지역 : 경주, 점촌, 충주, 서울
●주요지휘관 : 신상철 준장, 이기건 중령
●참고문헌 : 한국전쟁사(국방부), 한국전쟁사(전쟁기념사업회)

0127-1.jpg
(이 작전 지도는 대전을 공략중인 적 부대와 이에 대응하는 한국군과 미군의 작전 현황을 그린 것인데, 본 내용과는 관계가 없는 듯 합니다. )


1. 경주-서울 진격전의 개요

경주-서울 진격전은 영천부근 전투가 끝난 후 제 7사단을 주축으로 하여 서울까지 진격한 전투이다.

0127-2.jpg

2. 경주-서울 진격전의 주요 지휘관

*아군
제 7사단장 준장 신상철(9월 20일 부임시 준장 진급)
제 3연대장 중령 이기건
제 1대대장 중령 최주종
제 2대대장 소령 이재기
제 3대대장 대위 최창환
제 5연대장 대령 최창언
중령 박승일(9월 29일 이후)
제 1대대장 소령 최훈섭
제 2대대장 미 상
제 3대대장 대위 신건선
제 8연대장 중령 김용주
제 1대대장 소령 양인석
제 2대대장 대위 고한조
제 3대대장 소령 박관영(50. 12. 18~51. 4. 10.)
제 7야전공병대대
배속부대
제 18야포대대장 중령 박연호
병력 약 10,000명

3. 경주-서울 진격전의 진행과정

가. 전투전의 개황

국군은 낙동강 방어선이 형성된 뒤 글자 그대로의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고 있던 8월 20일에 대구에서 포항지구 전투사령부 요원을 기간으로 하여 보병 제 7사단을 재편(국본 일반명령 제 49호에 의함)하게 되었는데, 예하 3연대도 이날 동시에 재편되었고, 5연대는 민기식 부대를 기간요원으로, 8연대는 독립 유격대를 기간요원으로 하여 각각 같은 날 대구에서 재편되었고, 그 뒤 9월 1일에 이르러 포병 제 18대대가 사단에 배속되었다.
이리하여 재편된 제 7사단은 그 뒤 9월 5일부터 13일까지 영천 부근 전투에 참전한 다음, 영천-임포동-경주-아화-류상동-삼귀동-동도동-해선동 선에서 남침하려는 적을 저지시켰고, 다시 안강-기계에서는 패퇴하는 적에게 계속 타격을 주었다.

나. 작전계획

육군본부는 제 7사단을 군 예비사단으로 하고 서울 진격을 준비하였다.
이리하여 제 7사단 사령부를 비롯한 예하 3개 연대는 모두 경주 부근으로 집결하게 되었으니, 사단 사령부는 9월 17일에 영천군 아화리로 이동한 다음, 이곳 양조장에 사령부를 설치하였고, 제 3연대는 9월 19일에 안강에서 경주로 이동하였으며, 제 5연대는 9월 18일에 영천군 고경면 옥산리(동)에서 경주로 이동하였는데, 제 8연대는 이미 9월 14일에 경주 서쪽에 있는 건천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사단은 9월 19일까지 경주근처에 집결을 완료하였으며, 9월 21일에는 장비검열을 실시하는 등, 다음에 있을 진격명령에 대비하게 되었다.

다. 경주-서울의 진격전

9월 21일
제 7사단은 사단장 신상철 준장의 지휘 아래 경주에서 안강리로 진격하였으며, 제 3연대는 9월 18일에 제 1군단의 직할부대로 배속되었다가 이날 부로 제 1군단에서 배속이 해제되는 동시에 육군본부 예비연대로 편입되었으며, 제 5연대는 사단장 명에 의하여 연대장 최창언 대령 이하 3,734명이 기계에 출동하여 패퇴하는 적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9월 22일
제 3사단과 수도사단의 중간 지역에 배치되었던 제 7사단은 이날 육본작명 제 191호에 의하여 청하선에서 제 3사단과 그 임무를 교대하고 육군본부의 군 예비대가 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제 1군단에 배속되었던 제 3연대와 제 2군단에 배속되었던 제 5연대도 원대인 제 7사단의 지휘 아래 복귀하게 되었다.

9월 24일
연대장 김용주 중령이 지휘하는 제 8연대는 경주군 사계리 상옥동에서 있었던 경주부근전투에 참전하여 적의 침투를 저지하였다.

9월 25일
전날까지 안강리에 위치하고 있던 사단은 이날 안동으로 진격하였으며, 제 3연대(연대장 중령 이기건)는 제 7사단 사령부가 약진한 뒤를 따라 경주에서 안강-청하-안동으로 진격하여 철도관사에 연대본부를 설치하고, 다음에 하달될 진격명령을 기다리게 되었다. 한편 제 8연대(연대장 중령 김용주)는 경주군 사계리 상옥동에서 전투를 끝마친 다음, 안강에 집결하였다.

9월 26일
제 5연대(연대장 대령 최창언)는 9월 21일 기계에 출동, 참전하였다가 이날 사단장 신상철 준장의 명에 의하여 청하를 거쳐 안동으로 이동, 집결하였다.

9월 29일
안동에 위치하고 있던 제 3연대는 이날 안동을 출발하여 22:00에는 예천까지 진출하였으며, 여기서 두시간에 걸친 휴식시간을 갖는 한편, 장비 점검을 끝마치고는 24:00에 예천을 떠나 북진하면서 적을 추격하였다.

9월 30일
제 3연대는 이날 10:00에는 점촌에 도착하였으며, 여기서 두시간에 걸쳐서 휴식을 취한 다음, 이날 12:00에 따가운 볕이 내리 쪼이는 가운데 이곳을 떠나 문경으로 진격을 재촉하였다. 그리하여 점촌을 출발한지 10시간이 지난 22:00에는 별다른 상황 없이 문경에 진출하였는데, 여기서 장병들은 다음날 새벽 05:00까지 눈을 붙일 수 있었다.

10월 1일
05:00에 제 3연대는 예정대로 문경을 떠났고, 10시간 30분 뒤, 15:30에는 연대본부는 수안보에 진격하였으며, 각 대대는 17:00에 도착하는 즉시로 수안보에서 8km전방에 있는 오가자 부근에 출몰하는 패잔병들을 격멸하기 위하여 출동하였다. 급속도로 추격한 끝에 적을 발견하고 집중사격을 퍼부었던바 적은 분산, 도주하고 말았고, 일부는 모든 것을 체념하였는지 손을 들고 투항하여 왔다. 이리하여 얼마 뒤에는 이 패잔병들을 무난히 격퇴시켰으며, 포로 17명, 소총 15정, 다발총 11정을 노획한 다음, 22:50에 수안보로 복귀하였다.
한편 이날 제 5연대 본부서는 충주 사범학교 교정에서 신구 연대장의 이취임식이 거행되었으며, 전임 연대장 최창언 대령은 사단 부사단장으로 전보되었고, 사단 사령부부로 있던 박승일 중령이 신임 제 5연대장으로 취임하였다.
제 8연대도 역시 이날 안동에서 충주로 진격 하였는데, 군수품과 보급품은 트럭으로 수송하였고, 각 대대 장병들은 도보로 강행군하였다. 이리하여 안동-예천-점촌-문경-수안보-충주선을 일로 진격, 북진하였다.

10월 2일
이날까지 안동에 계속 주둔하면서 작전을 통할하고 있던 사단 사령부는 안동을 출발하여 예천-점촌-문경-수안보-충주선을 일로 진격, 북진하였다.
제 3연대는 전날 15:30에 수안보에 진격한 다음, 이날 10:00에는 수안보를 출발하여 사단 사령부의 뒤를 따라 17:30에 이르러 충주읍까지 진격한 즉시 그곳에 연대본부를 설치하였고, 각 대대는 칠금리 근방에 위치하여 사주경계에 들어갔다.

10월 4일
제 3연대는 이날 07:00 다시금 전진을 시작하여 충주를 떠나 횡성을 목표로 진격하는 도중, 적 패잔병들의 산발적인 저항을 받았으나, 이를 가볍게 물리치면서 12:00에는 목계리를 경유, 쉴 사이도 없이 추격을 계속하여 17:00에 횡성에 진출하였다.
한편, 이때 제 5연대는 충주를 출발하여 원주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10월 5일
이날 수도 서울을 향한 진격은 시작되었다. 사단장 이하 사령부 요원들은 충주를 떠나 부지런히 길을 재촉하였다. 전투에 별로 경험도 없는 신병들이라 충주까지 오는 동안에는 낙오병도 상당히 나왔으나, 충주에서 서울까지 진격하는 사이에는 낙오병이 별로 없었다. 충주를 떠난 뒤 장호원-이천-광주를 거쳐서 광장교 다리를 건너게 되어 어느덧 서울이 눈앞에 다가 왔던 것이다. 멀리 바라보이는 서울을 가리키며 장병들은 “서울이다. 서울! 저기가 서울이다!” 하고 고함을 지르면서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이리하여 드디어 서울 진격의 꿈은 이루어졌다. 왕십리-을지로6가-을지로4가에서 우측으로 돌아 창경궁 앞을 지나 혜화동 동성중학교에 사단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나서 사단장은 즉시 예하 연대의 진격 상황을 파악하도록 지시하였다.

10월 6일
이날 10:00에 제 3연대는 횡성을 출발한 뒤, 양평군 청운면 용두리를 경유하여 양평읍을 통과, 망우리 고개를 넘고, 중랑교를 건너 청량리에 도착하였다. 청량리역 앞 길 건너편에 있는 서울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자리에 연대본부를 설치하였다. 뒤따르던 각 대대도 그 근처에 위치하였다.
한편 제 5연대(연대장 중령 박승일)는 이날 원주를 출발하여 양평까지 진격하고 있었다.

10월 7일
제 8연대(연대장 중령 김용주)는 이날 비로소 충주에서 서울로 진격하게 되었는데 군수품과 보급품은 트럭으로 수송하였으며, 각 대대 병력은 도보로 강행군을 하였다. 중도에 사단 사령부에서 주선하여 준 트럭으로 원주를 거쳐, 횡성을 지나 양평군 청운면 용두리를 경유하여, 평양읍을 통과, 망우리-중랑교-청량리-신설동-돈암동으로 진격, 한성여중에 연대본부를 설치하였다.
여기서 연대의 2대대(대대장 대위 고한조)는 제 10연대(연대장 대령 고근홍)와 임무를 교대하고 북악산에서 패잔병을 토벌하며 사단 예비대로서 다음 명령을 대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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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경주-서울 진격전의 결과

제 7사단은 제 2군단의 예하 6사단과 8사단이 이미 통과한 그 뒤를 따라 경주-서울 사이의 진격을 일단 10월 7일까지 끝마치고 다음, 평강까지의 이동을 준비하게 되었다. 즉 사단장은 10월 8일 11:00에 육본작명 제 212호에 의하여 포천(신읍)으로 일단 예하 연대를 집결시킨 다음, 다시 평강을 향하여 진격하기로 결심하고 우선 포천 근처에 집결하도록 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런데 제 3연대는 이미 10월 7일 13:00에 서울을 출발, 사단의 선두부대로서 먼저 포천(신읍)에 진출하고 있었다. 10월 8일 포천읍에 사단본부를 정하였으며, 각 대대가 양문리로 출동하여 18:00에는 126고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제5연대는 10월 10일 양평에서 포천으로 전진하였으며, 동시에 제2군단에 배속되는 즉시로 군단의 예비대가 되었다.
제8연대는 10월 9일 포천군 신북면 만세교리를 진격하게 되었는데, 서울 북악산에서 잔적을 토벌하고 있던 제2대대도 역시 이날 만세교리로 진격하였다.
한편 우측 인접부대인 제6사단은 금화까지 진격하고 있었고, 좌측 인접부대인 제8사단은 10월 10일 연천-철원 사이의 중간지점을 진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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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http://www.warmemo.co.kr/)에 있는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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