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파 유격대 백골 병단의 혈투 - 제 2 편-
칠성은

북파 유격대 백골 병단의 혈투 - 제 2 편-

손은석(97.05서울) 0 18,806 2009.12.07 14:18
북파 유격대 백골 병단의 혈투 
                       
                                    - 제  2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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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부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죽음의 적지로 가는 유격대 간부들에게 국방부 장관이
준 장교 임관장. 적진 투입 환송식에서 정일권 총장은
살아서 귀환하면 2계급 특진 시켜 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정작 귀환한 대원들에게 국방부가 내놓은 것은 '없던 일로 하자는
딴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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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군량 밭은 아군의 작전 지역인 오대산 지구로부터 적어도

30키로 상당은 될만한 적 후방지역이었다.


백골 병단 사령부로 호송되어 온 생포자 13명을 조사한
채 사령관과
참모들은 깜짝 놀랐다.

놈들이 소지했던 문서에서 엄청난 비밀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인민군 총사령부에서 전선 사령관에게 보내는 메시지,

북괴 중앙당의 지령문서 등 특급 기밀 문서가 수두룩했다.


이때 생포된 일당 중 방안에 의젓하게 누워 있다가 생포된

자는 소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중앙당 군사부 제 2 비서겸

북한군 중장 길 원팔[吉 元八]이었다.

그는 빨치산 제 5지대장 겸 남조선 빨치산 총사령부란 직함도
함께
가지고 있던 거물이었다.


길 원팔의 참모장으로 있던 외팔이는 강 칠성[[姜 七星]

북한군 대좌로서 중국 인민 해방군 출신이었다.

해방 전 일본군과의 격전으로 오른팔을  잃은 그는 왼손만으로도

권총의 명사수였다고 한다.


인민군 중위였던 여자 군관은 남한 출신으로서 서울의 H여대

4학년을 다니다가 자진 월북했던 붉은 아가씨였고 소년과 소녀는

심부름하는 아이들이었다.

그 밖의 일당은 참모진과 통신 군관등이었다.


길 원팔은 체포되었을 당시 북한군 후방에 만연했던
발진티푸스를
앓고 있다가 많이 완치가 다 된 상태였다.
북한은 이가 옮기는
발진 티프스를 미군이 북한에 가한
세균전으로 악선전했다.


그는 6.25사변의 발발과 함께 빨치산으로 남하하여 경북 지방에서

활동했었다.
중공군이 참전하고 전선이 바뀐두 북으로 소환되어
김일성으로부터 영웅 칭호와 함께
국기 훈장 1급을 받고
진급한 뒤 남반부 빨치산의 전력과 투쟁 강화를
위해서
대남 빨치산 사령관의 자격으로 다시
남하 중에 병이 걸려서
요양 중이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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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격대가 적지 투입전 지급받은 일제 99식 소총.
그러나 실탄이 얼마 없어서 빈총으로 메고 다닌
대원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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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원팔의 프로필은 이렇다.

그는 평북 덕천군 덕천면 덕천리 출생으로 아버지는
철도국에
근무했었다.


고향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스가모 고등 상업고등학교를 거쳐 일본 중앙대학교에 재학중

8.15를 맞아 귀향했다.


일본 중앙 대학교는 국군 연대장인 한신 장군과 사단장
김 종오 장군이
학병으로 끌려가기 전 재학했던 대학교로서
법학과가 유명하다.


재학시 부터 좌익 사상이 있던 그는 조선 노동당에

가입해서 대남 공작사업에 종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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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음날 아침, 상황은 급반전되었다.

옥수수 광에 가두어놓은 생포 여자 군관이 심야에 탈출해

버린 것을 발견하였다.


추격대가 급파되었으나 그녀의 종적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 녀는 길 원팔이 인솔하고 남하하던 남파 빨치산 5지대가
주둔했던
인근 북서쪽의 가리산리 방향으로 도주했던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쪽의 상황을 다 파악한 그녀가 탈출에 성공한다면
최악의 상태가
아닐 수 없었다.


백골 병단은 즉각 철수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길 원팔의 일당과 그간 백골 병단이 군량밭에 주둔하면서
체포했던 
50명의 북한군과 내무서원에 더해서 인민 위원장,
민청위원장, 그리고
세포 위원장등 지방 악질 공산당 분자들을
합쳐 모두 70명이 넘었다.


이들을 방면하기도, 호송하기도 불가능한 철수 작전에 이들을

할 수없이 모두 처단하기로 하였다.


유격대가 철수를 개시하기로 한 3월19일 오후 8시보다 
두 시간 전인
오후 다섯 시쯤 간이 군사 재판이 열리고
길 원팔과 그 일당들에게
총살형이 언도되었다.


단지 길 원팔의 시동 격이었던 최 모 학생만은 너무 어려서

처형에서 제외되었다.

최 모 학생은 채 명신의 심부름하는 시동으로 신분이 바뀌어

유격대와 동행해서 남한으로 왔다.

그는 평강군 인민 위원회에서 와병 중이던 길 원팔을
돌봐 주도록
파견했던 중학교 2학년 학생으로서 그의 아버지는
전직 교사였다.


채 사령관은 이 소년을 남한으로 데려와 계속 돌봐주었다.

이 아이는 나중에 서울 명문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시내 유수 대학의 대학 교수까지 되었다.


길 원팔은 처형 전 그의 아버지가 넘겨주었다는 회중 시계를

꺼내서 정보 참모인 최 윤식대위에게 넘겨주었다.


강 칠성 대좌도 처형되었는데 그가 김일성에게 받은
국기훈장 3급
메달은 유격대가 가지고 나와 육본 정보국에
전달하였다.


이 메달은 정보국장 이 극성 중령이 잘 보관하고 있다가
전쟁 기념관에
백골 병단 코너에 전달하였다.


그는 죽기 전 마지막 소원으로 남쪽을 보고 죽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처형당했다.


채 명신 사령관을 그의 회고록에서 길 원팔의 처형을 아쉽게

생각하는 글을 남겼다.

데리고 남하하는 것이 바람직했지만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다는 것이다.


나중에 북한군의 추격이 극렬하였고 병단이 몇 번의 위기를

겪은 사실을 보면 남한으로의 압송은 불가능했을 듯하다.

모 군간부가 30여년이 흐른 뒤인 1987년, 지금은
남한 땅이 된 군량밭을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40여채의 큰 동네였다던 군량밭이 단지 서너채의
미니 마을로 변한것을 보았다.놀랍게도 길원팔의
총살 사건을 기억하던 노인이 아직 생존하고 있었다.

노인은 유격대가 철수하고 길원팔의 부하들인 빨치산
부대원들이 길 원팔과 강 칠성의 사체를 가져갔다고 말해주었다.

토벌 경찰이 사살한후 남한 섬진강가에서 화장해서 강에 뿌린
이 현상의 가묘가 지금 북한 평양의 열사능에 있다.
월북했던 이 현상의 처만 묻혀 있다,

위와 같이 길 원팔의 사체가 확실하게 수거되었다면
이 현상의 예와 같이 북한 어느 곳이건 길 원팔의 묘소가
혁명 열사의 묘소로서 존재할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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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가진 작전 명령서가 체포 당시 압수되어 지금도
육본에 보관중이다.

이 것은 전쟁이 발발하기전인 1950년 3월 김일성이 그에게

발령한 것으로서 이 작전 명령서가 그때 이미 그가 남쪽의

침투해서 영남 지방에서 활약한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가 백골 병단에 처단된 후 북한이 다시 남쪽으로 남파한

거물 유격대장이 유명한 남 도부 중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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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좌익들. 맨 아래 중앙이 남 도부, 하 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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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도부는 본명 하 준수, 경남 함안 출신으로 일본에서
대학교를
중퇴했고 가라데의 고수였다.


징병을 피해서 지리산에서 은둔 생활 중에 일찌감치 좌익

유격 활동을 하다가 월북했었다.


그는 영남 지방을 거점으로 했지만  지리산 거점의 이 현상보다는

미온적인 활동하다가 전쟁이 끝나고 대구시내에 잠입하던 중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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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철수를 감행했던 백골 병단에게 길 원팔 부대인
5지대원의
근간이 된 대병력이 공격해왔다.


지방 내무서원 병력과 길 원팔의 휘하 5지대원 뿐만 아니라
전방에서
차출된 32 사단등 일개 사단 병력이 백골 병단의 뒤를
물고 추격했다.


백골 병단은 전선을 돌파해서 남한으로 복귀할 때까지
열흘 넘게
적 대병력의 엄청난 추격을 받았다.

백골 병단 유격대의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더구나 3월 날씨치고 대단한 동장군이 몰려왔다.


백골병단은 우선 적의 허점을 찌르기 위해서 북상해서
용대리까지 갔으나
여기서 적 사단 병력의 공격으로
할 수없이 다시 동남방으로 방향을
틀었다.


용대리가 병단이 북상했던 최북단이었다.

이 최 북상 지점인 용대리에는 백골 병단 전적비가 서있다.

용대리 전투에서만 대원 40명이 산화하였다.


부대는 천신만고 끝에 백담사 입구까지 철수하였다.

이 곳은 당시 적지였다.


약간의 휴식을 취한 부대는 설악산을 지나 소청봉 근처에서

1951년 3월 24일 야영을 하였다.

이 야간 숙영에서 적의 야습을 받아 큰 피해를 보았다.


부대는 남으로 철수하던 다음날 새벽 1951년

적에게 또 다시 매복 기습을 받았다.

기습해온 부대는 길 원팔의 부대인 빨치산 5 지대원들이었다.

악에 바친 그들의 공격은 극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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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인식 선생이 방문했던 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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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부대 철수 중에 폭포 위에서 벌어진 전투는 유격대를
섬멸 직전의 큰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부대는 큰 타격을 입고 가까스로 탈출을 할 수가

있었다.이 폭포 주변 기습에서 60여명이 전사했다.


부대는 계속 철수해서 1951년 3월 25일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박달령 남쪽 설피밭에 이르렀을때 다시 적의 공격을 받고

혈전을 벌려야 했다.


적의 공격과 함께 닥친 엄청난 추위로 부대는 적진 침투 이래

최대인 120명의 인적 피해를 입었다.

동사와 탈진에 의한 아사자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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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전에서 11연대 2대대장 윤 창규 대위의 장렬한

최후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부상을 입고 걸을 수가 없어서 들것에 실려 부대원과 함께

철수 중이었다.


그러나 적의 공격으로 부대가 큰 위험에 빠지자 더 이상
부대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최후를 스스로 마지했다.


그는 적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야! 이 새끼들아! 내가 대대장이다!”

적의 지휘관인 듯한 자가 부하에게

지시하는 소리가 들렸다.


“ 저놈을 생포해라 !”

적들이 접근하며 “손 들엇 !“하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큰 폭음이 적의 비명 소리와 함께들려왔다.


윤 대위가 접근하는 적과 함께 수류탄으로 자폭했던

것이다. 그는 국군 현역 부사관 출신으로 대대장을 자원했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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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격대는 소련제 수류탄을 지급 받았다.
윤대위가 자폭했던 수류탄은 북한군이 사용했던
위 세 종류 수류탄중 한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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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신창이가 된 백골 병단은 3월 28일 인제군 기린면 방동리의

작은 외딴 산골마을로 후퇴헤서  겨우 약간의 휴식을 취했다.

마침 이때 북한군의 두개 군단이 아군의 공세에 총퇴각
중이었기 때문에
적의 추격이 완화되었다.


병단은 1951년 3월 30일 드디어 적전선을 뚫고  북진하던 국군

7사단 3연대로 귀환 할 수가 있었다.

병단을 창설할 때 647명이던 부대원으로서 전선을 뚫고 돌아온
부대원은
단지 260명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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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한 11 연대 147명 장병들의 기념 촬영-
아직 국군 복장으로 갈아 입지도 못한 백골 병단대원들이
1951년 4월 10일 수복된 강릉 도립병원에서 찍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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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루한 북한 군복에 뼈만 남은 백골 병단 원들이 강릉으로
이동해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낙오했던 대원들이
계속 귀환하여 최종
생환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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